받은 마이플라워 재미(0) 감동(0) 지혜(0) 감사(0) 정보(0)
정형근은 왜 체포되어야 하는가. 그가 23건의 고소ㆍ고발 사건의 피고소(고발)자이며 그동안 20여 차례나 검찰의 소환에 불응하여 강제 구인에 이르게 된 것이라는 사실 관계를 떠나서 ─ 사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법을 무시하는 그의 태도는 마땅히 지탄의 대상이다 ─ 정형근은 과거의 고문 전력에 대해 수사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까지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이 갖는 면책 특권을 이용해 검찰의 수사를 피해왔으나, 많은 증언자들이 그의 비인간적인 고문 전력을 폭로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필자의 백 마디 설명보다 정형근에게 고문을 당한 피해자들의 증언이 더 중요할테니, 우선 몇 가지만 인용해 보기로 하자. 정형근의 고문 전력에 대해 추상적으로만 알고 계셨던 분들께서는 특히 이 부분을 주의깊게 읽어주었으면 한다.
자료 1 : 국정원의 '정형근 파일' 중 일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 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 '민추위' 사건 관련 박종철(언어학과 3년)을 연행해 조사시 물고문 등으로 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치안본부로부터 관계기관 긴급대책회의 소집 등 지원을 요청받고, 당시 대공수사국 수사단장 정형근은 ▲ 1월14일 심야에 당시 광화문에 있는 서린호텔에서 개최한 관계기관대책회의에 검찰·경찰·청와대 관계자 등 10여명과 함께 참석하여 ▲ 사건 처리방향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내용의 발표문 작성에 참여하였으며 ▲ 그 후 수차례 시내 앰버서더 호텔(1817호)에서 검찰·경찰·청와대 등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소집하여 ▲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 정부가 견디기 힘들다, 5공 정권 출범 이래 최대 위기인만큼 사건이 절대 깨져서는 안 되며, 이대로 묻혀야 한다”며 사건 처리방안을 제시하고 ▲ 담당검사 안상수에게 고문경찰관의 구형량을 낮추도록 요구하는 등 고문치사사건 은폐 및 축소조작에 개입하였고 ▲ 당시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조한경 경위를 직접 찾아가 “두 사람만 관련된 것으로 하고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입을 다물어 달라”면서 금품을 제공해 회유하고 검찰ㆍ교도소측에 각종 편의를 제공토록 하였음.
위에서 인용한 ‘정형근 파일’의 일부는 국정원이 수집한 ‘정보’일 뿐이지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또 이것이 그의 ‘전력’의 전부도 아니다. (중략) 특히 고문·가혹행위의 경우 당시 정형근 수사국장(단장)의 지휘 아래 가담했던 관련 당사자들이 상당수 현직에 있기 때문에 이는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적인 누락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형근 파일’에 담긴 정보는 부분적인 오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실 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상당히 구체성을 띠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동아』 2000년 1월호 중)
자료 2 : "파이프 담배 문 정형근이 나를 고문했다"
심진구씨(39·경기도 안산시 부곡동)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둔 가장이다. 그러나 심씨는 지난 13년 동안 노동력을 상실해 아내한테 의존해 힘겹게 살아오고 있다. 86년 안기부에 끌려가 37일 동안 당한 살인적인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상처 때문이다. (중략)
"정형근 단장이 들어오고 나면 더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다. 한번은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 심진구, 이제 불 때가 되었는데. 여기 들어와 15일이면 다 불어. 여기가 어딘지 알지? 여긴 국회의원도 맞아 나가는 데야. 그래야 고생하는 우리 수사관들도 특진하지. 그러고는 부하들에게 '간첩이라고 불 때까지 더 족쳐!'라고 고문을 독려했다. 그 중에서 성고문이 제일 치욕적이었다. 손을 뒤로 한 채 목을 젖히고, 심문대 책상 위에 내 성기를 올려 놓고 몽둥이로 쳤다. 10분씩 두 차례에 걸쳐… 차라리 죽는 게 낫지, 한 대만 맞아도 기절초풍할 정도였다. 그들은 좋아하며 히히덕 거리며 즐겼다."
안기부에서 심씨는 86년 12월10일부터 87년 1월15일까지 37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수사관들로부터 돌아가면서 계속 맞아 피오줌을 흘렸고, 잘 때는 팬티가 붙어 야전침대에 누울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는 때리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간첩으로 모는 것은 너무 두려웠다고 한다. 정형근이 2~3일에 한번씩 들러 뒷짐진 채로 파이프 담배를 물고 나타나 "심진구! 이제 간첩이라고 불 때가 되었는데”라며 그뒤에 있을 고문을 '예고'하곤 했다. 그가 들렀다 간 다음에는 더 강도 높은 고문이 어김없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다 정형근이가 들어와서 지시해서 때리거나 고문했으니 그가 이근안보다 더 나쁜 놈이다. 쫄다구는 시키니깐 하는 일이고. 나는 정형근이 보는 앞에서도 당했다. 정형근 자신도 잔혹해서 더 이상 못보고 자리를 떴을 정도다." (하략)
자료 3 : 월간중앙 1999년 12월호 서경원 前 의원 증언
질문 : 정형근 의원은 일관되게 고문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정말 고문을 당했다면 정황을 좀 상세히 얘기해 주십시오.
서 : (중략) 그렇게 맞으면서 피가 막 쏟아지니까 밥그릇을 하나 갖다주면서 피를 받으라고 합디다. 정형근이 직접 욕실에서 물뜨는 밥그릇을 가져왔어요. 밥그릇이 넘치니까 청동색 재떨이도 가져왔는데 사기로 돼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욕실에 들어가 분홍색인가 붉은색의 바가지도 들고나오더라구요. 그릇만 세가지가 동원된 거죠. (중략)
질문 : 정형근 의원의 말을 종합해 보면 최소한 자신은 직접 고문을 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안기부 수사국장이 간첩 수사를 직접 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서 : 옷을 다 벗겨서 완전히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더구만. 팬티하고 '런닝구'만 남겨놓고 군복 바지를 입혔어. (중략) 두들겨패다가 내가 맨발 벗고 있었는데 발등에 올라서서 저 혼자 빙글빙글 돌면서 나(정형근)를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중략) 돈 준 것은 안나왔다니까 김일성과 김대중 친서를 네가 갖다주고 갖고 왔다는 것을 대라는 거요. 그래서 그런 일 없다고 했더니 그걸 불라고 밤새 두들겨 맞은거요. 집중적으로 맞고 나니까 나중에 정신이 없습디다. 그래서 보십시오. 여기가 부은 겁니다. 예전에 맞은 곳이지요. (중략) 개인이 억울하다 차원이라기 보다 이렇게 당한 사람이 한 20여명 됩니다. 정형근이한테 당한 사람이 그렇다는 말이오. 그런 사람들의 증언을 두고 정형근은 간첩들이 흔히 쓰는 보위수단이라든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잠을 안재우니까 해볼 재주가 없습니다. 내 정신이 아니야. (중략) 나중에 검사가 1주일인가 열흘인가 교도소에 안 들어갔더라고 얘기해 줍디다. 그동안 못잤다는... (중략)
질문 : 정의원은 또 현역의원을 어떻게 고문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들어갈 때 그 대접을 받았습니까.
서 : 대접이요? 첫마디가 '야, 씹할 자식아. 같이 살자'였습니다. 정형근이 말대로 국회의원을 대접했다면 그럴 수 있소? (하략)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