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회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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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6/06/2011060600397.html 모든 기업은 1등을 지향한다. 1등이 아니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고, 살아남은 1등만이 '승자 독식'의 과실을 맘껏 누릴 수 있다. 따라서 기업이라면 예외 없이 1등 달성의 전략을 놓고 고민에 빠지는데, 우리 재벌들은 '선단(船團)식 경영전략'을 채택해 왔다. 하나의 모선(母船·주력사업)을 앞에 내세우고 주변에 제2, 제3, 제4의 후방(後方)군단을 거느리며 서로 밀어주고 키워주는 구조다.
'선단 경영'은 고도성장기 한국 기업들의 전략이었지만, 이제는 그 관성의 폐해가 너무 심하다는 지적이 많다. 대기업들이 "나만 잘살면 된다"는 식으로 온갖 시장에 전방위적으로 침투하다 보니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양극화 현상, 대기업의 중소기업 영역 빼앗기 싸움이 극도로 심화·촉진됐다는 것이다.
양극화라는 게 뭔가. 같은 물건을 만들었는데 대기업은 배부르고, 99%의 중소기업들은 배고픈 기이한 현상인데, 수치가 현실을 알려 준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자산총액 5조원 이상 55개 상호출자 제한 기업집단의 계열사는 1554개로 작년보다 290개가 늘었다. 지난 3년간 재계 1~20위권 그룹의 매출과 순이익은 각각 54%와 71%가 증가했다. 매출과 이익은 엄청 늘어났지만 정작 대기업이 국민에게 제공한 일자리 숫자는 최근 10년간 49만개가 줄었다.
산업현장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기업 영역 다툼도 이젠 그냥 넘어가기엔 도를 넘어섰다. 샴푸, 스팀청소기, 전기청소기, 맞춤용 양복시장, 김치냉장고, 세탁비누와 내비게이션 등 중소기업들이 먼저 뛰어들어 성공한 사업에 대기업들이 훼방을 놓은 케이스는 손가락으로 세기 힘들 정도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상품 개발해 봐야 금방 대기업들이 잠식하는데, 이 바람에 상품 개발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제조업뿐 아니다. 유통분야도 마찬가지다. 재벌그룹들은 볼펜과 연필, 면장갑, 쓰레기통, 대걸레 등 소모성 자재를 계열사나 협력업체에 독점 판매하는 MRO(소모성 자재 구매대행) 사업에 대한 비난에 직면해 있다. 이들 또한 할 말이 없었던지, 일단 "사업구조를 개선하겠다"며 물러서긴 했지만 구조개선 범위가 너무 제한돼 있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지 불확실하다.
모든 대기업이 중소기업들과 싸우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살까지 깎아가며 먼 길을 걸어가는 대기업도 있다. 두산그룹은 1990년대 후반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인수한 이후 '인프라 지원 사업(ISB)' 중심의 글로벌 사업 구조를 그룹 생존 방향으로 택했고, 주력 분야에 부합하지 않는 사업은 몽땅 접었다. 한때 그룹 생명줄이던 맥주 등 음료사업, 종가집김치 등 식품사업은 아예 포기했고, 대신 두산인프라코어(옛 대우종기), 두산하이드로 테크놀로지, 체코의 스코다 파워, 인도의 AE&E 첸나이웍스 등 기업 인수·합병을 통해 집중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키우다 보니 자연스레 국내 중소기업들과는 부딪혀 소리 날 게 없다.
"세계적 자동차 회사인 BMW라고 왜 패션, 식음료 사업을 하지 못하겠느냐? 대기업이 시장을 독식하는 것은 국가경쟁력을 갉아먹는 일이며 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의 출현을 막을 뿐이다." 위르겐 뵐러 한·독 상공회의소 사무총장이 국내 재벌들에게 전하는 경고의 목소리다. 대기업들과 중소기업들이 활동하는 무대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