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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사람만의 역사로 채워진 대한민국 범죄의 재구성 현장, 박정희기념도서관을 다녀와서
4・11총선을 며칠 앞둔 4월 6일 오전 10시 좀 넘어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기념・도서관을 연구소 활동가들과 방문했다. 방문 취지는 세 가지였다. 첫째 어떤 방식과 내용으로 독재자 박정희를 미화했는지 살펴볼 참이었다. 둘째는 현재 연구소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역사정의실천연대’의 박정희기념관반대투쟁에 참조할 요량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았던가. 셋째는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시민역사관 건립과 관련해 ‘반면교사’로 삼고자 함이었다. 식민지-분단-독재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에서, 김민철 연구원 말대로, ‘올바른 기억을 위한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박정희기념관과 우리의 시민역사관은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쌀쌀했다.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내려다보고 있는 박정희기념・도서관은 마치 박정희가 연단에서 국민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박정희 기념・도서관이란 말이 기괴하기도 했다. 기념관과 도서관 두 개로 구성되었다는 말인데 기념관에 비중을 둔 용어이면서도 지역에 도서관 기능을 하겠다는 공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박정희기념관은 월드컵경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 박정희는 축구를 좋아했지. 태국의 킹스컵을 본 떠 박스컵이라는 국제축구대회도 만들었으니. 아하 각하가 축구를 좋아하셨으니 기념관에서 계속 축구라도 즐기시라는 알뜰한 배려였을까.’ 잠이 덜 깨었는지 잠시 헛생각이 들었다.
먼저 건물 앞 준공기념비를 살펴보았다. 2010년 3월 15일 공사를 시작해 2011년 11월 15일 완공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공사발주자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이다. 지상 3층 연건평 5,272.5평방미터(1,594.9평)이니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니다. 우리 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는 시민 박물관의 세 배 규모 이상이다. 갑자기 속이 쓰라렸다. 정작 만들어야 할 것은 못 만들고 만들지 말아야 할 것만 만드는 것 같은 ‘더러운 세상!’ 도대체 이 속에 어떤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을까. 과연 박정희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김승은 자료팀장의 말로는 도서관은 ‘새마을’ 관련 책자들 외에는 별로 없다고 했으니, 전시관만 둘러보기로 했다.
2층 제1전시실 입구로 향한 계단을 올라가는 우리 앞에는 초로의 부부 두 명이 손을 잡고 전시관을 들어가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아침 가벼운 등산을 하고 둘러보러 가는 것 같았다. 뒤 이어 또 다른 60대 후반 세대들이 삼삼오오 몰려왔다. 평일 이른 시간이라 당연히 젊은 사람들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이 지긋한, 이른바 ‘조국근대화세대’ 분들이 관람하러 온다는 점이 여느 기념관과 차이가 난다고나 할까. 젊은 우리가 오히려 이방인 같았다.
제1전시실에 들어가는 초입에 박정희의 거대한 초상화가 우리를 맞이했다. 사진 안의 박정희는 특유의 다리 꼬고 앉은 자세로 오른쪽을 보고 있었다. ‘이 영감쟁이, 사진조차 우리를 외면하고 있구나.’
초중고 시절 박정희는 거역할 수 없었던 엄한 아버지 같았던 인물이다. 아니 아버지보다 더 강력한 권위로 교과서나 방송이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를 장악하고 움직였다. 내가 ‘국부’ 박정희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대학생활을 하고도 몇 년이 지나서였다. 그런데도 오늘 마주하니 어린 시절 내게 군림했던 그의 카리스마가 은연히 초상화를 통해 되살아나는 듯했다. 독재자에게도 아우라가 있었다. 더구나 그 옆면 복도에는 박정희 친필인 그 유명한 조국근대화 구호인 ‘하면 된다’가 큰 글씨로 적혀 있다. ‘하면 된다’는 구호는 산업현장만이 아니라 공수특전단 등 군대 구호이기도 했다.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후렴구와 함께.
이거 큰일이군. 진실을 떠나 분위기가 주는 공명현상이 있다.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초상화를 통해 어린 시절 매일 보아왔던 그 모습, 그러나 수십 년 잊었다가 다시 당신 앞에 불쑥 고압적인 모습이 들이밀어질 때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박정희 시대가 자신의 추억과 겹치는 사람들, 그리고 박정희에 대해 백지 상태의 어린 아이에게 이 초상화는 자잘한 사실 설명에 앞서 그 초상화 자체로 무언가를 일깨우고 사로잡거나 자리잡을 것이다. 초상화에는 주술이 있다. 아아, 이거 좀 문제인 걸.
뒤이어 즐비한 전시물 그 자체는 큰 감흥이 없었다. 오로지 ‘조국근대화’의 수많은 업적들을 도표, 사진, 각종 복원물 등을 통해 반복해서 주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00억불 수출, 공업입국과 교육입국, 농촌새마을운동에서 공장새마을운동, 그리고 딸까지 나선 새마음운동, 수많은 성장 그래프와 퍼센트로 제시된 다양한 성장 수치, 한강의 기적, 서독 간호사와 함께 흘린 눈물, 농촌 ‘똥두간’의 개량에서 유도탄 발사에 이르는 어느 곳 하나 ‘각하’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 없는 조국근대화. 수출공단 봉제공들의 작업 현장을 재현한 곳에는 ‘책임완수’라는 표어가 자랑스레 붙여져 있었다. 맙소사, 저 구호 아래 얼마나 많은 여공들이 영양실조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던가!
여하간 대한민국 모든 분야의 성장과 낱낱의 생활 하나하나가 ‘그분의 덕’으로 이뤄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다소 지루하다 할지라도 분명 효과는 있다. 반복적 세뇌를 통한 내면화! 이것이 이 전시관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이 아닌 한 박정희기념·도서관을 거쳐 가는 이들은 박정희가 부인과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으면서 오로지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에 온 생을 바친 지도자라는 사실을 뇌리에 박히게끔 만든 목적의식성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효과를 살리기 위해 온갖 비싼 기법으로 돈을 처발라 놓았다.
1전시실에서 아래 전시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경부고속도로를 체험하도록 장치가 되어 있었다. 계단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벽 옆면에는 경부고속도로 구간이 표시되어 있었고, 계단 아래 맞은편에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면서 풍경이 바뀌는 모습을 영상으로 비추고 있었다. 고속버스 무임승차 기회를 주는 것 같은 이 분위기. 컴컴한 계단을 돌아 왼쪽으로 나오면 광명의 세상이 나온다. 아아! 조국근대화의 빛을 향하여 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계단이 끝나고 왼쪽으로 돌아들어가자 ‘싸우며 건설하자 1969년 1월 1일 대통령 박정희’ 라는 친필 휘호 아래 또 다시 조국근대화 사진 자료가 사방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정말로 이 전시관은 박정희의 박정희에 의한 박정희를 위한 기념관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단 한사람의 역사로 채워져 있었다.
1층 전시관은 새마을운동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농촌새마을운동에서 공장, 학교새마을운동으로 확대되는 과정, 4대강의 다목적댐 건설(갑자기 현 정권의 4대강 공사가 떠올랐다), 그 유명한 치산치수治山治水 사업(난 고등학생 때 요산요수樂山樂水와 함께 논어에 나오는 말인 줄 알았다), 보릿고개 극복, 영농의 과학화, 농어민 소득증대특별사업, 의료복지제도의 실시, 중화학공업의 정책 선언, 전국민의 과학화, 기술인력 양성, 총력안보…. 업적이 너무나 많았다. 가히 박정희는 신의 경지에서 대한민국을 다스렸고 중국 고대 삼황오제의 모든 공덕을 겸비한 인물로 여겨졌다. 즉 문자를 창시한 복희와 농업과 의학을 선도한 신농, 과학기술을 발전시킨 황제, 뭇백성을 사랑한 요와 순, 치산치수의 달인 우임금 등 중국 고대 전설상의 성군의 집합체가 곧 박정희였다. 하긴 진시황도 자신의 덕을 삼황과 맞먹고 공은 오제를 능가한다고 자처해 삼황오제를 합쳐 자신을 황제라고 칭했으니.
교육입국과 관련한 분야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이 아니 나올 수 없다. 국민교육헌장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다.
국민교육의 방향 정립과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위한 국민교육헌장 제정
일제 교육칙어의 모방이자 국가주의 교육의 표본인 국민교육헌장이 적어도 민주주의와 관계없다는 것만은 자신들도 자인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민주주의는 아예 안중에도 없기에 이렇게 설명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말에 국민교육헌장이 나왔다. 2학년에 올라서 국민교육헌장을 애국조회 시간에 운동장에서 외워야 했다. 일제 강점기 애국조회에서 교육칙어를 봉독하던 것과 똑같았다는 것은 대학원에 진학하고서야 알았다. 국민교육헌장을 다 못 외운 아이들은 미국 잉여농산물로 만든 옥수수 급식빵을 배급받지 못했다. 옥수수빵 급식을 받기 위해서라도 간절하게 암기해야만 했다. 50살이 넘은 지금도 난 거의 다 외고 있다. 최초의 사회화(원천적 세뇌)란 이렇게 오래 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려 간 지하 전시실은 가운데 거대한 영상화면이 거의 반원형으로 펼쳐져 있었다. <메인동영상 / 5・16 / 새마을운동 / 종합동영상 / 공업단지와 수출자유지역 / 댐과 수력발전소 / 화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 / 고속도로 / 항만> 가운데 원하는 것을 누르면 눈앞에 웅장한 영상이 펼쳐진다. 지금까지 사진, 재현물 등으로 번잡하게 보던 박정희의 모든 분야에 걸친 업적들을 짧은 다큐멘터리 동영상으로 보란 듯이 마련해두었다. 정말 끔찍한 반복이었다. 대학 수험서도 이렇게 반복해서 보지는 않을 것이다. <5・16편>을 누르자 5・16관련 동영상과 함께 아나운서의 설명이 나왔다. 조국근대화시절의 전형적인 발성법인 선동형 아나운스 멘트였다.
<종합동영상>은 여기서 더 나아갔다.
사진으로, 도표로, 수치로, 실물 재현으로 그리고 동영상으로 반복되는 이 내용에 누가 일일이 반박할 수 있으랴. 유신체험세대 이른바 조국근대화의 기수 세대들은 ‘각하’와 자신이 함께 위대한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들었다고 감격해 할 것이며, 그런 것도 모르고 노인을 푸대접 하는 오늘날의 싸가지 없는 젊은 것들에 대해 분개하고, 그리고 자기들끼리 서로 위로를 하는 공간이 될 것 같았다. 박정희기념관은 박정희시대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정신적 위안소로 기능할 것이다.
어린 세대야 애정과 증오가 애초 없으니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다. 적대감도 감동도 없이 그냥 주입되어 이들의 뇌리에 스며들 것이다. 박정희 기념관은 과거에 대한 기념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미래 세대에게 박정희를 영웅으로 받들게 하고 박정희 집권기를 미화하며, 나아가 그런 세계관과 통치 방식을 가르치는 범죄의 재구성 현장이기도 하다.
일행들의 표정을 둘러보니 모두 굳어졌다. 들어올 때는 ‘아무리 잘 꾸며봤자 그게 그거지’라는 표정이었는데 말이다. 이것을 아이들이 보면 큰일이겠구나 싶은 표정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사실 독재도 노하우가 있다. 박정희가 거저 18년을 통치한 게 아니고 아직도 유신잔재들이 질긴 명을 이어 오는 게 마구잡이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사악한 것도 오래 가는 잔재주가 있다.
다시 한 번 주입되는 박정희 친필 앞을 지나면서 한 평생 민주주의를 위해, 박정희 타도를 위해 피를 흘린 분들을 떠올렸다. 이분들이 이곳을 보면 어떤 심정일까.
나가는 입구까지도 박정희는 우리를 붙잡았다. ‘인간 박정희와 육영수’라는 제목 아래 박정희가 얼마나 위대하고 그런 만큼 얼마나 소탈하고 인간적이었는가를 동영상을 통해 다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 옆방에는 박정희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정희 유품 가운데 눈에 띄는 게 말안장과 말장화였다. 만주벌에서 만주군 제복을 입고 군마를 몰던 그 향수를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했다. 만주국 장교의 추억이 박정희 기념관에까지 소중하게 모셔져 있다. 일제에 충성한 흔적마저 기념되는 곳이다.
‘인간 박정희와 육영수’의 화면이야 별 거 없지만 아나운서의 해설과 목소리가 정감 어렸다. 영상 제목에 ‘인간으로서의 어쩌구 저쩌구’ 할 때는 미리 눈치 채야 한다. 인간 같잖은 놈들을 옹호할 때 항용 써먹는 수법이다. 특히 독재자를 옹호할 때 그에게도 따듯한 심장과 눈물이 있었다는 식으로 묘사해 감성적으로 호소하려는 것이다. 사디스트가 마조히스트에게 내미는 손길과 숨결이라고나 할까.
시작부터 나폴레옹 타령이었다. 박정희는 어릴 때부터 나폴레옹을 존경했다는 내용, 이거야 뻔한 수법이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 시작부터 박정희는 범인과 급이 다른 것이다. 영웅을 꿈꾸고 자란 인물이다. 그리고 여기에 추가 장치가 있다. 위대한 프랑스를 만든 군인으로서의 표상과 조국근대화의 기수가 된 군인이 대응한다. 또 하나 더 숨어 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식민지령인 코르시카에서 태어나 프랑스 장교가 되었다. 박정희는 일본의 식민지령인 조선에서 태어난 조선인인데도 일본 군인이 된 것이 나폴레옹 사례를 통해 용인된다.
이어 입지전적 인간승리 드라마에 항용 사용되는 수법을 끌어와
라고 소개한다.
그의 가난에서 출발한 역정에 찬 인생은
고 했다. 개인의 가난과 나라의 가난을 겹치게 해 개인과 국가, 국가와 지도자를 일체화시키는 수법으로 나아간다. 다시 말해 “가난에 대해서 나만큼 아는 놈 있으면 나와 봐. 내가 가난해 봐서 아는데” 라는 내용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박정희의 교사 시절에 대해서는
고 했다. 항상 독재자나 위인을 그릴 때는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인간적 면모를 그리기 마련이다. 그 인간적 면모는 서민과 다를 바가 없다가 아니라 서민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즉 시혜적인 인군(仁君)이라는 점에서 봉건적 군주의 이상과도 통한다.
그가 자식을 키운 것도 위대한 일로 묘사되었다.
이쯤 되면 박정희만 대통령이 되란 법은 없다. 왜 누구나 하는 결혼과 자녀교육이 박정희에게만은 통치철학의 밑거름이 되는지 알 도리가 없다. 박정희는 조강지처를 버렸고 자녀도 썩 잘 키우지 못했음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결혼생활과 자녀교육에서 사실상 낙제에 가까웠던 인물인데, 그런 그의 결혼생활과 자녀교육이 통치철학의 밑거름이라니!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 생도 시절 군사훈련 받은 것도 증언의 형식을 빌어 의협심과 리더십의 증좌로 설명하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 군사훈련을 열심히 하고 특수부대 조교로 뽑힌 것도 리더십이라면 조국의 논산 육군훈련소 조교출신들 모두 박정희보다 더한 꿈을 꾸어도 좋지 않을까.
독재자를 우상화할 때 그 인간적 보완물로 현모양처형 배우자가 으레 등장하기 마련이다. 육영수여사가 빠질 수 없다. 동영상의 성우는 다음과 같이 속삭였다.
이미 전시실에는 육영수에 대해 “늘 공부 잘하고 단정한 학생”으로서, “차분한 성격으로 조용하고 얌전하게 모범적인 학창시절”을 보냈고(일제시기 요란 방정을 떤 여학생들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이후 영부인이 되어서도
고 했다. 나아가 ‘어린이와 노약자, 힘없는 사람, 불우 아동, 노인, 나환자’ 등을 보살피던 육영수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요컨대 육영수는 현모양처의 전형인 신사임당, 대자대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 그리고 친근한 어머니를 혼합한 신비적이며 이상적이고 그러면서도 늘 우리 곁에 있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게다가 감화력도 뛰어난 인물이다.
비운에 간 육여사에 대한 평가에서 이런 저런 비판적 토를 달기는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남을 반성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육영수는 가장 가까이 있던 박정희에게는 어떤 감화도 끼치지 못했다. 박정희의 난잡한 여성편력과 이 때문에 벌어진 다소간의 폭력도 있었던 ‘청와대 육박전’을 생각하자면, 더욱 그렇다. 그녀의 자식 교육도 실패했다.
지끈한 머리를 감싸고 나오면서 내 첫 말은 뜻밖에도 ‘김대중 나쁜 사람’이었다. 박정희기념관에 국고를 지원하도록 한 것이 김대중 대통령 아니었던가.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의 목숨까지 노렸던 박정희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용서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사적으로 용서할 수 있어도 국가수반으로서 적절한 절차와 동의 없이 국고 지원을 함으로써 박정희면죄부를 부여한 것은 큰 잘못이다. 박정희는 김대중이란 개인에 앞서 우리 역사의 죄인이고 수많은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아직도 고통 속에 살고 있고 더구나 박정희의 망령이 위력을 떨치는 시기에 기념관에 국고 지원을 하는 근거를 만들었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역사를 자기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빚은 것이다.
여하간 나가는 우리를 배웅하는 박정희기념관건립위원회 명단 맨 위에는 김대중의 이름이 뚜렷이 적혀 있었다.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 그리고 분노가 일렁이는 마음을 추스르려는데 계속 동영상의 마지막 음성이 내 귀에 달콤하게 맴돌았다.
(이글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 5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이 글에 인용된 박정희기념·도서관 설명문과 영상 음성 녹취, 사진자료는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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