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나는 가수다’ 임재범의 ‘빈잔’ 편곡자 하광훈
-MBC ‘나는 가수다’(나가수)의 인기는 가창력보다 편곡의 힘이다, 라고 하면 맞는 말인가.
“주인공은 물론 가수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성공한 데는, 겉에서 잘 보이지 않는 편곡자들의 힘이 있었다. 내가 (편곡을) 해서가 아니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왜 그런가.
“나가수는 지나간 노래를 다시 부르는 ‘리메이크’ 프로그램이다. 지금에 맞게, 새 가수에 맞게 재해석해서 구현해야 한다. 골조만 있는 집에 가구, 벽지, 조명까지 모든 공사를 편곡자가 하는 거다.”
-그럼 편곡은 인테리어인가? 성형수술인가?
“편곡은… 마술이다.”
18일 서울 서초동 예당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작곡가 하광훈(47)과의 문답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남진의 ‘빈잔’과 윤복희의 ‘여러분’을 임재범(48)을 위해 편곡했다.
빈잔
4월 29일 금요일 0시30분쯤이었다. 임재범이 하광훈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임재범은 ‘빈잔’ 편곡을 부탁했다. 나가수 무대에 서는 녹화일은 5월 2일 월요일. 딱 사흘 남았을 때였다.
하광훈: 어떻게 해달라고.
임재범: 그냥, 알아서.
하광훈: 뭘 알아서 해.
임재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잖아.
그러곤 두 시간 동안 다른 얘기만 하다 헤어졌다. 두 사람은 1997년인가, 98년인가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서 만나기로 했다가 무산된 뒤 처음 마주한 자리였다.
“그때도 임재범이 불쑥 찾아와서 같이 음반작업을 했는데, 도통 곡이 나오지 않았어요. 임재범은 월드음악(제3세계 음악을 뜻한다)을 하고 싶어 했죠. 인도음악은 모르는 게 없었어요. 난 그런 걸 대중이 듣겠느냐 했고, 그는 세계무대로 나가자 했고, 난 뭐가 있어야 나가지 하면서 티격태격했어요.
제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할 때였는데, 미국에서 버스를 한 대 샀어요. 내부를 스튜디오로 개조해 임재범을 불렀죠. 같이 타고 미국 땅 돌아다니며 곡을 만들어보자고. 그런데, 임재범 미국 비자가 안 나오는 거예요. 워낙 자유분방하게 살 때라 세금 같은 걸 낸 기록이 없어서.
캐나다에서 미국 국경 넘는 루트가 몇 개 있었어요. 밀입국이라도 하려고 임재범이 캐나다까지 왔는데 갑자기 그냥 가버렸어요. 왜냐고요? 몰라요. 그 친구한테는 한번도 ‘왜’라고 물어본 적이 없어요.”
임재범이 하광훈을 찾은 건 이미 작곡가 두 명에게서 각각 ‘빈잔’ 편곡을 받아본 뒤였다.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광훈은 임재범과 헤어진 뒤 밤새 고민했다. 편곡할 노래가 ‘빈잔’이란 얘기를 들었을 때 “대책이 없더라”고 했다.
“‘빈잔’은 3박자예요. 편곡하기 가장 까다로운 리듬이죠. 왈츠 보세요. 쿵짝짝, 쿵짝짝. 이거 말고 없잖아요. 4박자는 딴∼따단따단따, 따단따단따단∼따, 여러 가지로 바꿀 수 있는데, 3박자는 그게 안 돼요. 원곡의 틀을 벗어나기가 정말 어려운 거죠. 그냥 세련된 트로트로 부르게 할까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가수는 편곡 싸움이어서 그렇게는 도저히 못하겠더군요.”
하광훈은 ‘빈잔’을 과감히 4박자로 바꿔버렸다. 가장 견고한 틀을 깼더니 나머지가 해결되더라고 했다. 리듬을 바꾸기 전에 먼저 한 일이 있다. 어떻게 편곡할 거냐, 방향을 정하는 거였다.
“예전에 임재범이 했던 얘기가 생각났어요. ‘광훈씨, 우리 이런 음악 해야 하는데…’ 하면서 월드음악 얘기만 했었죠. 그 친구가 원했던 스타일로 가보자, 일요일 골든타임에 지상파 TV에서 언제 또 이런 거 해보겠냐 한 거예요.”
편곡에 물리적 시간은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방향 설정만 되면 그 자리에서도 하는 게 편곡이다. 특히 요즘은 컴퓨터가 있고, 여럿이 팀을 짜서 하는 경우가 많다. 하광훈에게도 ‘지그재그 노트’라는 3인조 편곡팀이 있다.
임재범과 헤어져 동틀 때까지 고민하고, 해가 떠오기에 한 숨 자고, 오후에 일어나서 편곡 윤곽을 잡고, 지그재그 노트 소집해 토요일 아침까지 밤을 새웠더니 악보와 함께 컴퓨터로 만든 음(音)이 나왔다.
토요일 저녁, 스튜디오로 임재범과 차지연을 불렀다. 몇 해 전 뮤지컬 ‘라이언 킹’ 보다가 유독 원숭이 분장의 배우 노래가 귀에 들어와서 “누구야?” 찾아봤던 이가 차지연이다. 국악 집안에서 자라 창부터 민요까지 두루 소화한다. 월드음악, 멀리서 찾을 거 없이 우리 음악을 하면 된다는 게 하광훈의 생각이었다.
이날 임재범과 차지연은 편곡된 ‘빈잔’을 딱 한 번 불러봤다고 한다. “이거 어때?” 묻고, “얘(차지연) 목소리 어때?” 물었더니 임재범은 “너무너무 오케이” 했다. 일요일 밤 12시에 밴드 불러다 급히 연주와 노래 맞춰보고 월요일 나가수 무대에 선 것이다.
하광훈은 “여기서 임재범이 들어가고, 저기서 차지연이 나가고, 하는 몇 가지 약속만 정하고 무대에 섰다. 도입부에 임재범이 ‘으으으∼’ 저음을 냈는데, 연습 땐 없었던 거다. 차지연의 구음창법만 있었는데, 그가 즉석에서 했다. 두 목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고 말했다.
여러분
하광훈은 중앙대 작곡과를 나왔고, 그룹사운드 ‘다섯손가락’에서 활동했고,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 멤버였다. 작사 작곡 편곡 제작을 다 했다. ‘너에게로 또다시’ ‘홀로 된다는 것’(이상 변진섭) ‘사랑일 뿐야’(김민우) ‘늪’(조관우) ‘너의 곁으로’(이승철) 등 300여곡을 작곡했다. 그가 제작한 리메이크 앨범 조관우 2집. ‘꽃밭에서’를 비롯해 수록곡 모두 편곡 작품인 이 앨범은 400만장이 팔렸다.
-‘빈잔’ 편곡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대목은.
“도입부. 보통 10초 안팎인데, 40∼50초였다. 티벳에 저음 대역의 고유한 음악이 있다. 그런 분위기, 임재범이 원했던 분위기를 내려면 인트로가 길어야 했다. 나가수 PD에게 곡이 6분인데 괜찮냐고 물었더니 괜찮다더라. 예전 같으면 방송에서 3분 못 넘겼다. 그리고, 월드음악풍 1절에서 록 스타일 2절로 넘어가는 전환부 네 마디. ‘나의 빈잔을 채워줘∼’ 부분. 아주 극적이면서 부드럽게 넘어갔다.”
-좋은 편곡은 어떤 것인가.
“음악 공부하러 미국 가서 지독한 슬럼프를 겪었다. 비틀즈 같은 명곡은 왜 세월을 뛰어넘나,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런 노래를 죽 다시 듣는데 머리를 땅 치더라. 그런 곡은 모두 특별한 연주가 없다. 인테리어로 치면 텅 빈 방에 의자 하나 달랑 있다. 그래야 세월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다.
그때까지 내가 만들었던 노래, 도저히 못 듣겠더라. 드럼 베이스 기타 총동원하고, 갖은 액세서리 붙여서 빈틈없이 꽉 채운 사운드였다. 그래놓고 ‘편곡 죽이지!’ 했었다. 더하기만 할 줄 알고 빼기는 못하는 초등학생이었다. 좋은 편곡은 최대한 자제하는 거다.”
-‘빈잔’은 좋은 편곡인가.
“난 좋은 편곡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힘을 많이 줬다. 보컬 영역을 침범하기도 했다. 해본 적 없는 음악을 하느라고.”
-‘여러분’은 어떻게 편곡했나(임재범의 ‘여러분’은 22일 방송된다).
“최소한의 반주로 노래만 들리게 할 수 없을까, 내 편곡의 키워드다. 잘난 체 않고 순수하게 노래를 받쳐주는 완벽한 조연인 편곡. ‘여러분’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임재범의 숨소리까지 들리도록.”
15일 방송에서 ‘중간평가’로 임재범이 부른 ‘여러분’은 편곡되기 전 노래다. PD가 하광훈에게 전화해 물었다. “반주를 (건반의) 어떤 키로 할까요?” “E 정도면 될 겁니다.” 그렇게 그냥 불렀고, 편곡은 그 뒤에 나왔다. 연습 때 임재범이 반주 듣고는 “자제하라는 거죠?” 했다. 이번에도 두 번 불러본 뒤 연습이 끝났다고 한다.
-편곡은 원곡의 숨은 감동을 재해석하는 거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발라드를 레게로도, 록으로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새로운 패션에 맞게 옷을 바꿔 입히는 건 쉽다. 어려운 건 원작자의 뜻이 뭐였을까, 고민해서 원곡의 뿌리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은 원작자의 뜻이 뭐였다고 생각했나.
“나는 가스펠로 이해했다. 윤복희씨 곡이다. 친분이 있어서 직접 그런 얘기를 들은 적도 있고, 곡을 들어보면 딱 가스펠이다. 그걸 살리는 게 이번 편곡의 과제였다. 편곡 전후로 윤복희씨와 두 번 통화했다. 2절은 영어로 부르면 어떠냐고 하시더라.”
-임재범이 노래하면 왜 사람들이 우는 걸까.
“그의 삶이 노래에 고스란히 묻어나기 때문 아닐까. 머리로 계산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자기가 느끼는 대로 부른다. 그래서 그가 내는 소리는 좀 다르다.”
-임재범은 어떤 가수인가. 한마디로.
“자유인이다. 그가 곡을 쓰진 않는다. 노래하려면 작곡가들이 곡을 줘야 한다. 그동안 나를 비롯해 음악 하는 사람들이 야생 호랑이 같은 임재범을 동물원에 가둬놓으려 했던 것 아닌가, 그를 위한 곡을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드는 곡에 그를 억지로 맞추려 했던 것 아닌가 싶다.”
임재범이 나가수 무대에서 ‘빈잔’을 부를 때 하광훈은 녹화장에 가서 악기 세팅과 연주 조율을 도왔다. ‘여러분’ 부를 때는 가지 않았다. 연습이 잘 돼서 갈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하광훈은 “40∼50대는 음악적으로 버려진 세대”란 얘기를 많이 듣는다고 했다. 그들도 분명 음악적 욕구가 있는데 그걸 채워줄 음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올 초부터 예당엔터테인먼트 음악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다. 아이돌 일색의 음악시장에서 이젠 뭔가 다른 음악이 먹힐 때가 됐다고 판단해서다. 그는 이렇게 억눌려온 음악 욕구가 분출되는 현장이 나가수 무대라고 말했다.
-나가수 녹화현장은 어떤가.
“사운드가 좋다. 외부 음향팀을 쓰는데, 한 달간 방송 쉬면서 더 규모가 큰 회사로 교체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청중이 느끼는 건 방송 시청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녹화방송은 보통 노래하다 틀리면 ‘다시 갈게요’ 하는데 여기선 그런 적이 없다더라.”
-나가수에 방송된 노래 중 가장 인상적인 편곡은 뭐였나. 본인 작품 빼고.
“박정현이 부른 김건모의 ‘첫사랑’. 전반부 발라드에서 후반부 라틴댄스로의 전환이 완벽했다. 백지영이 부른 ‘약속’은 원곡을 내가 작곡했는데, 끔찍하게 잘해서 깜짝 놀랐다.”(그는 나가수에서 가장 많은 곡이 불린 작곡가다. ‘약속’과 ‘너에게로 또다시’에 이어 김범수가 ‘늪’을 부른다)
-편곡을 맡은 소감은.
“내 음악인생을 돌아보게 됐다. 임재범의 ‘빈잔’, 이건 도저히 대중에게 먹힐 수 없는 곡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이걸 처음 들은 청중 표정은 ‘이게 뭐지’였다. 그런데 인터넷에 음원과 동영상(포털사이트에 공개된 무삭제 동영상은 200만회 이상 조회됐다)이 올라가자 엄청난 반응이 나왔다. 깜짝 놀랐다. 대중은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데, 나는 대중을 무시한 채 새로운 시도를 주저해온 것 아닌가 생각했다.”
태원준 기자
[email protected] 옮기면서 보기가 약간 힘들게 줄정리가 되서 죄송합니다.;
글이 입력하는거랑 출력될때랑 화면크기가 달라서 줄을 보기좋게 정리하기가 힘드네요;
여러분 코드 진행이 가스펠처럼 느껴졌던건 의도했던 거였군요.
나가수 경연에서 편곡한 것 뿐만이 아니라 '약속''너에게로또다시''늪'을
작곡하셨던 분이라니 새삼 놀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