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 언론의 보도 1980년 5월 25일 AFP 통신은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라고 전세계에 타전했다.[97] 프랑스의 언론사 르 몽드 지의 기자 필립 퐁스는 1980년 5월 27일의 아침의 광주는 죽음의 도시와 같았으며 그 때 당시 상황을 학살이라고 증언했다.[98] 일본의 마쓰나가 세이타로 요미우리 신문 홍콩 특파원은 “광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진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80년대 후반 민주화가 이뤄진 것은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지도자들 마음속에 광주항쟁 정신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은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의 붕괴와 중국 천안문 사건에도 영향을 주었다.”라고 평가했다.[99][100] 샘 제임슨 미국 AP통신 기자는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1980년 광주의 3일간 군대 만행으로 빚은 희생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군대의 만행은 이내 7일 간의 광주 사태로 치달았다.”라고 보도하면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들은 광주 소재 (주)한국화약 창고의 다이너마이트 탈취 같은 시위자들의 과격한 행동을 강조했고, 군대의 잔인한 행동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수년 동안 많은 남한인과 몇 명의 미국인은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들춰냈다. 미국은 사실상 비난 또는 적어도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라고 5.18을 왜곡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을 비판했다.[101] 블레들리 마틴 미국 볼티모어 선 서울 특파원은 “나는 지난 25년 동안의 기자생활 중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국의 강청 등 4인방 재판, 그리고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 암살 이후 폭동과 살인사건 등을 취재해 왔다. 그러나 나는 ‘광주’의 참상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건이 나의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한 마디로 나는 ‘광주’라고 대답한다.”라고 증언한다 또 “광주항쟁 기간 동안 단 하루밖에 광주에 머물지 않았지만, 1980년 5월 26일 그날 하루만으로도 바로 죽음을 걸고 폭압에 맞서 투쟁했던 용감한 광주시민들의 모습이 나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광주야말로 나의 기자로서의 경력 중 가장 감동적인 경험을 제공해준 곳이었다.”라고 5.18을 높이 평가했다.[102][101]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한 의료관련 연구개발회사 이사인 데이비드 돌린거는 5.18 광주항쟁 당시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며 “사후 유골이라도 광주에 묻고 싶다”고 밝혔다.[103] 미국의 프리랜서 기자 도널드 커크는 “광주 민주화 항쟁은 대한민국 사회가 겪었던 정치적인 사건의 전환점이기도 하다”고 말한 뒤 “이 사건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높이 평가했다.[104] 독일인 프리랜서 사진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마티아스 라이는 “나는 외국인지만 역사의 한복판에서 고통받았던 광주 시민을 만났을 때 뜨거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며 “세계인들도 나처럼 5.18 역사를 배운다면 뜨거운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05] 한국전쟁 이후 서울 상주특파원으로 일한 최초의 서양 기자인 노먼 소프는 “광주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분이다. 앞세대가 자유선거를 확립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려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지금 젊은 세대가 배우고 진심으로 감사하길 바란다”며 “지금은 언론계에서 은퇴했지만 민주화운동 때 대한민국 정부의 많은 압력에도 저를 비롯한 많은 헌신적인 기자들이 외국 독자들에게 대한민국 상황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시민을 진압하던 군인들의 잔혹함이 시위를 촉발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외국 잡지나 신문을 대한민국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이 배포 전 모든 자료를 검열했다. 광주에 대한 기사나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 등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을 때는 배포 전 지면에서 빠졌다. 외신 기자들이 쓰는 기사도 감시의 대상이었다. 주거비자가 나오는 것도 몇 달씩 걸려 30일마다 출입국을 반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106] 독일 제1공영방송 ARD-NDR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그 참상을 서방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또 그 해 9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판결을 받자 항의표시로 “기로에 선 대한민국”이란 제목의 4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필름에 담았다. “내 생애에서 한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도 이렇듯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107] 테리 앤더슨 AP 통신 기자 (당시 LA타임스 일본총국장)은 5.18에 대해 “5·18은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었다.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찬 시민들 앞에서 시위대를 추격하며 곤봉으로 때리고, 최루탄은 물론 총까지 쏘았다. 공수부대원들은 상점과 시내버스 안까지 쫓아가서 젊은이들을 잡아 끌어냈다. 광주는 분노로 일어섰다.”라고 진술했다.[108][109] 미국 볼티모어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1994년 월간 ‘샘이 깊은 물’에 기고한 글에서 윤상원의 외신 기자회견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독일 남부독일신문 기자인 히일셔는 “5.18 당시 부상자들이 너무 많아 부상자들을 수용할 병실이 부족했다”고 회고했다. 전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노먼 누트 타프 역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절박해 보였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110] 뉴욕타임스의 서울 특파원 헨리 스코트 스톡스는 “1415년 아쟁쿠르에서 있었던 육박전을 연상하게 한다”면서 “육군 병사들이 착검된 총을 가지고 인간을 도륙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500년을 더듬을 수 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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