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난다기 보다,
혹시 이게 꿈인가 싶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껌......껌이요. 껌 좀 주세요.
매우 가라앉은 진지한 목소리였다.
“너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면서 그런 소릴 해?”
나는 그저 황당하고 어이없을 뿐이었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생각 없이 행동한 적이 없었건만.
-......제발요. 저 지금 미칠 것 같아요. 제발, 제발요.
나보고 대체 어쩌라는 건가.
지금 이 시각에 강원도까지 내려오기라도 하라는 건가.
내려갈 수 있다손 처도 출근시각인 6시까지는 이제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오주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당부했잖아. 혹시라도 새벽에 전화 할 생각 말라고. 그런데 기껏 전화해서 한다는 말이,
뭐, 껌 주러 강원도까지 오라고?”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말을 했다.
그러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화기 너머로 무언가를 긁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봐 오주임. 장난 친 거라고 생각 할 테니. 이만 끊자고. 몹시 불쾌했다는 것만 알아.”
-딸칵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개인적으로 아끼던 오주임이었지만,
이런 예의 없는 전화 한 통으로 정이 뚝 떨어져 버렸다.
사람이 미워지는 것은 정말 순식간인 모양이다.
출장에서 돌아오면 단단히 혼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따르르르르릉
또 다시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는 오주임.
나는 한 숨을 깊이 쉬며 전화를 받았다.
“야 이 새끼야. 너 미쳤어?”
다짜고짜 욕을 했다.
이제 명백히 화가 났다고 선언할 수 있다.
-......껌, 좀, 제발......
“야 오승원! 이 새끼가 좋게 봤더니, 완전 깨고 있네.”
나는 몹시 흥분했다.
새벽에 전화를 안 받아 본 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너무 경우가 없었다.
무언가 부탁하는 자세도 전혀 안 돼 있었고, 자세가 되었다고 해도 억지 부탁이었다.
아니,
세상에 어떤 마음 좋은 회사원이 후배 직원에게 껌을 주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선단 말인가.
그것도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대리님. 제발......
그나저나 정말 절박한 목소리였다.
언제까지고 이런 대화를 할 수 없어 감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후우. 대체 왜그래. 껌 못 씹으니까 그렇게 미치겠어?”
-......씨발! 껌 갖고 오라고 개새끼야!...
순간 당황했다.
갑자기 오주임이 욕설을 내뱉는 게 아닌가,
그것도 매우 심한 욕설이었다.
나는 심한 충격으로 말없이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핸드폰의 배터리를 빼 버렸다.
불쾌한 건 둘째 치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대체 그 껌이 뭐 길래 이렇게 사람을 미치도록 만들었을까.
“자기야... 무슨 일이야. 이 새벽에 누가 전화 한 거야?”
아내가 잠에서 깨어 눈을 비비며 내게 물었다.
“어, 아니 뭐. 알잖아. 저번에 집에 한 번 데려왔던, 오주임이라고.”
아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오주임? 그 사람이 왜 이 시간에 전화를 해? 술이라도 마셨대?”
그러고 보면 술 취한 상태였을지도 모르겠다.
오주임의 주사는 사내에서도 유명한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 술 취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응, 아마 그런 모양이야. 내일 혼쭐을 내줘야지. 미안해 자기야. 자자.”
......
......
“자기야 일어나. 늦겠어. 6시 10분이야, 10분. 어서 준비해야지!”
6시 10분이라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킨다.
“알람이 왜 안 울렸지? 아... 어제 배터리를 빼 놨지 참.”
침대 옆, 탁상 위에 핸드폰과 배터리가 분리되어 다소곳이 놓여있었다.
나는 황급히 그것들을 조립하고 핸드폰을 켰다.
로딩화면이 지나자 은비의 사진으로 꾸민 대기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캐치콜이 38건 있습니다.]
캐치콜.
통화중이거나, 핸드폰을 꺼놨을 때 걸려왔던 전화를 문자로 보내주는 서비스였다.
4시에 오주임의 전화를 받고 핸드폰을 껐으니,
약 2시간 만에 38건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뭐 해 자기야. 아침 차렸으니까 어서 씻고 나와!”
방 밖에서 아내의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잠시 침대 맡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38건의 부재중 전화가 모두 오주임에게서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할 뿐이었다.
......
......
“은비야 아빠 나가시는데 인사해야지.”
“하암...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우 졸립다.”
“자기 오늘 나 동창회 있는 거 알지? 저녁 차려놓고 나갈게.”
“엄마, 나는?”
“은비는 엄마랑 같이 가야지. 엄마랑 맛있는 거 먹고 오자.”
“정말! 와 신난다!! 아빠 나 엄마랑 맛있는 거 먹고 올게!”
......
......
“하아암.”
대체 몇 번이나 하품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턱이 안 빠지는 게 용 할 정도로.
“김대리는 하루 종일 하품만 하는구만. 어제 그렇게 피곤했나?”
두툼한 서류뭉치를 책상에 탁탁 두드리던 박과장이 내게 말했다.
40대 초반으로, 안경을 쓰고 앞머리가 조금 벗겨졌다.
지극히 셀러리맨답게 생겼다고 해야 할까?
“아, 예. 조금요. 가뜩이나 힘든데 새벽에 오주임이 술 먹고 전화까지 했거든요.”
내 말을 들은 박과장이 잠시 손을 멈춘다.
“응? 오주임이? 그래서 오늘 아침에 전화를 안 받은 거구만.”
“아, 예. 뭐... 다른 사람들도 안 받던가요?”
“내가 건 사람들은 다 안 받았어. 이주임이랑, 양주임이랑, 양대리까지.”
단체로 전화를 안 받는다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 오부장님은요? 오부장님께는 해 보셨어요?”
박과장이 고개를 젓는다.
“상사한테는 안 했어. 뭐 중요한 전화는 아니었으니까 상관없지만. 기획서 오늘 오후까지 내는 거 알지?”
“예, 지금 쓰고 있어요. 아 그런데 너무 가혹한 거 아닙니까. 당일 출장 바로 다음날에 기획서라니.”
내가 말하자, 박과장이 눈을 부릅뜬다.
나는 그 모습에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미리 미리 해 놓으면 좋잖아. 질질 끈 게 누군데 그래. 김상무님 결제니까 깔끔하게 해야 된
다.”
“예, 예.”
골치가 아파온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김상무한테 급조한 기획서가 통할 리가 만무했다.
갑자기 어제 씹었던 껌 생각이 났다.
생각만으로도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왠지 그 껌을 씹고 있으면 일이 잘 될 것만 같다.
주머니를 뒤져 껌 하나를 빼 입에 넣었다.
-아그작
황홀한 단 맛이 마치 전기가 흐르듯 온 몸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왠지 껌의 개수가 줄어든 느낌이었다.
주머니에서 껌 들을 빼내어 개수를 세어보았다.
“셋, 넷, 다섯... 여섯.”
여섯 개?
내가 둘, 오주임이 하나, 그리고 어제 택시기사가 하나.
그런데 왜 여섯 개가 남은 거지?
열두 개를 받았으니 여덟 개가 남아야 되는 거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껌 두 개의 행방을 추측할 수가 없었다.
결국 택시에서 흘릴 때 두 개를 더 흘린 모양이지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
기획서를 마무리 하고 나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때 쯤 되면 늘 즐거운 기분이 들었는데,
오늘 져넉은 혼자 먹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인지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정리한 서류들을 파일에 끼워 보기 좋게 꾸며 놓는다.
기획서와 함께 김상무에게 보여줘야 할 중요한 서류들이었다.
그런데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 보니,
박과장이 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요란스럽게 문을 열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김대리, 김대리. 아직도 전화 안 받는데, 이거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출장 간 사람들 얘기인 것 같았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급한 용무로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아직도 안 받아요?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었는데, 오부장님도 안 받던가요?”
“응, 다 안 받아. 그런데 자네 오늘 시공계획서를 나한테 줬던가?”
“예? 아니요. 그건 강원도에서 팩스로 직접 보내기로 했잖아요.”
박과장이 잠시 숨을 골랐다.
“김상무님이 지금 확인 좀 하자고 난리신데 큰일이네. 이것들이 뒤통수를 칠 줄이야.”
박과장이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사의 실권을 쥐다 시피 한 김상무에게 밑 보여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오주임한테 또 연락 오면 알려드릴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박과장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리고 기획서 완성 됐으면 상무님께 가보라고. 안 그래도 찾으시던데.”
올 것이 왔다.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준비한 파일을 옆구리에 꼈다.
......
......
“......”
“......”
“자네......”
“예, 상무님.”
“이걸 지금 기획서라고 가져 온 건가? 이렇게 급조한 티가 팍팍 나는 종이 쪼가리를?”
“아...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나름대로? 나는 그 딴말 하는 놈들이 제일 싫어! 나름 대로라니. 그게 대체 무슨 염병할 놈의 기준이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기껏 회사 돈 들여서 강원도 여행도 시켜줬으면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김대리?”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러니까 기획부가 쓸모없는 부서라는 소리를 듣지. 과장이란 인간은 여태 시공계획서도 안 보여주고 있
고, 부하 직원은 기획서를 이따위로 써 오고. 나 원 참.”
“죄송합니다. 원래는 부장님께 보여드리고 최종적으로 상무님께 보여드려야...”
“그래서 뭐. 부장용으로 썼다 이거야? 말이면 단 줄 아나 이 사람이!”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듣기 싫으니까 나가 봐. 박과장이나 들어오라고 해.”
......
......
-아그작
입에 껌이 있는 상태에서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두 개의 껌이 입안에서 합쳐져 덩치 큰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나는 그것을 난폭하게 씹기 시작했다.
“질겅, 질겅, 질겅, 김상무. 개새끼. 질겅, 질겅, 질겅”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퇴근 하고 한참 지났는데도 기분이 풀리질 않는다.
분을 삭힌답시고 청계천을 거니는 중인데, 꼴불견 연인들의 모습에 오히려 울화통만 더 치미는 것 같다.
한숨만 푹푹 쉬며 걸음을 옮기다가, 아무도 없는 벤치를 발견하고 그 곳에 앉았다.
여러 색의 조명을 이용해 알록달록한 물줄기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은비와 함께 왔다면 어지간히 신기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잠시 그 물줄기를 쳐다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지나간 문자나, 사진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오주임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안 받는다고 했는데 내가 하면 어떨지 궁금한 마음이 든다.
지체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역시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두 번 만 더 기다려보고 끊어야지.
-뚜우우우우
-뚜우우, 딸칵
받았다.
갑자기 당황스러워져 말문이 막힌다.
-예 대리님.
오주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새벽의 긴박하고, 애절한 목소리가 아닌 평소의 목소리였다.
“어, 어 그래 오주임. 조금 괜찮아?”
-예? 뭐가요?
“어제 술 좀 많이 마신 것 같던데, 괜찮아 진거야?”
-술이라니요. 술 마신 적 없어요.
“뭐? 그런데 너 새벽에 왜... 아니 그보다 과장님 전화를 왜 계속 안 받은거야?”
-아...... 그건, 사정이 조금 있었어요. 단체로 핸드폰을 사무실에 두고 어디를 좀 다녀와서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단체로 핸드폰을 두고 어딘가를 가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말이었다.
“아니, 왜 핸드폰을 두고 어디를 가? 핸드폰 반입이 금지된 곳이라도 있어?”
-음...... 뭐 그런 비슷한 거예요. 이젠 괜찮아요. 안 그래도 시공계획서 지금 팩스로 넣고 있습니다.
이걸로 과장도 다행히 한시름 놓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정상적인 말투와 목소리라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새벽에는 다른 오주임과 통화를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오주임, 오늘 새벽에 나한테 전화 했던 거 기억나?”
내가 물었다.
내심 기억나지 않다고 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네, 기억나요. 새벽에는 죄송했어요.
순순한 대답이었지만, 오히려 이 대답이 나에겐 더욱 충격적이었다.
한마디로 의문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껌 달라고 때 쓰던 게 다 기억난다는 말이지?”
내가 재 차 물었다.
말 대로라면 나에게 심한 욕설을 했던 것도 기억 날 것이었다.
-네. 하지만 이제 다 해결 됐어요. 대리님의 껌이 없어도 괜찮아요.
오주임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한다.
마치 ‘껌을 이제 충분히 구했으니 더 이상 귀찮게 할 일 없을 거다’ 라는 말로 들렸다.
“껌을 구했다는 거야?”
-구했다기 보다는. 깨달았다고 하는 게 맞겠죠. 아 대리님,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 잠깐만,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게 있...”
-딸칵
오주임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 동안 멍 한 표정으로 껌만 소리내어 씹었다.
내 귓가에는 오주임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계속 맴돌고 있다.
-깨달았다고 하는 게 맞겠죠.
대체 무슨 뜻일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추측할 수가 없다.
출처 : 웃긴대학 공포게시판 '건방진똥덩어리'님 作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