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영국이 1950년 이후 실시되어 온 대북한 수출금지령을 해제하자, 한국 정부 내에서는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의원 윤치영은 "일치단결해서 최후까지 영국에 대하여 피투성이가 되어서 싸우겠다는 이런 기개와 의식을 표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외무부장관 조정환도 "영국 상선이 북한을 출입할 것 같으면 우리의 전 국력을 다하여 일전을 불사하고라도 금지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폈다.
이런 내용의 발언들은 이승만 정권의 외교 정책 수준이 어린아이들 전쟁놀이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서중석의 <이승만과 북진통일: 1950년대 극우반공독재의 해부>에서 발췌
당시, 한국 군대 내부의 폭력과 병역부정, 비리 등은 극치에 달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도대체 저들이 무엇을 믿고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겠다고 말했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빨치산 출신으로 전향해서 반공 인사가 된 이영식은 한국 군대를 체험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소감을 털어놓았다.
"나는 나중에 국군 졸병 생활을 했는데, 국군 훈련소에 들어가보니까 말이죠, 정말 한심한 생각이 듭디다. 세상에 이런 군대를 가지고 어떻게 전쟁을 했나 싶어요. 매일 졸병이나 두들겨 패고 밥 같은 것 갖다 주면 중간에서 다 떼어먹고 말이지. (장비를) 훔쳐가놓고 잃어버린 사병한테는 잃어버렸다고 두들겨 패서 돈 대면 도로 갖다주고, 참 기가 막힙디다. 국군 생활에서 (허구헌날) 두들겨 패는데 질렸어요. 인민군은 그런 게 없었어요. 두들겨 팼다가는 당장 그 날로 가지요."
- 이영식의 <강동정치학원과 지리산 유격대>에서 발췌
1957년 8월 16일, 육군 소령으로 전역한 리영희의 증언도 비슷하다.
"걸핏하면 주먹질이고, 기분이 언짢으면 하급자에 대한 몽둥이질이었다. 무슨 정당한 이유나 목적이 뚜렷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분풀이, 화풀이, 심지어 즉흥적인 장난으로 부하들을 구타하는 것이 예사였다. 한심하고도 통탄할 상태였다."
- 리영희의 <역정: 나의 청년시대-리영희 자전적 에세이>에서 발췌
"후방 부산의 장교들의 사치, 향락, 타락, 부패는 일선 근무를 오래 하고 내려온 나의 눈에 불이 나게 하였다. 전방 전투지에서 죽음에 들어가는 1백 명의 보충병을 보면서 나라를 위해 죽으러 가는 자와 도피하여 향락하는 자에 대해 격분했던 감정이 후방에서는 일상적 감정이 되어버렸다."
- 리영희의 <분단을 넘어서>에서 발췌
병역 부정도 만만치 않았다. 1955년, 서울 지구 대학 졸업자 제 1차 소집에서 영장이 발부된 수는 1209건이었는데, 응소자는 163명이었고, 그 중 입대한 사람은 112명으로 입대율은 10%도 되지 않았다. 1951년에서 1956년 말까지 유학간 3769명 중에서 입대한 자는 1957년 2월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 서중석의 <조봉암과 1950년대 (상)>에서 발췌
1950년대, 한국 군대에서 유행했던 돈벌이 사업(?) 중 하나가 산의 나무를 베어서 파는 일이었는데, 이걸 군인들은 '후생사업'이라는 점잖은 말로 불렀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군 부대가 산의 나무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팔다보니, 1950년대 한국의 삼림은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졌다. 이런 식의 후생사업에 열광한 나머지, 송충이라는 별명을 얻은 군 장성도 있었다.
- 백선엽의 <군과 나>에서 발췌
"전쟁 직후에 고급 장교들이 고철 수집과 벌목 등 후생사업을 통해 치부하고, 각 부대의 간부들이 사병들의 몫을 횡령, 착복함으로써 훈련소 같은 곳에서는 훈련병의 사망률이 높아 원성의 대상이 되었는데도 군내 부정은 심해져서 1955년도는 군내 부정의 대표적인 해로 일컬어지게 됨으로써 뜻있는 소장파 장교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 한용원의 <군부의 제도적 성장과 정치적 행동주의>에서 발췌
"군 장성들은 사병들의 부식비를 떼어 치부하였고, 미군 원조물자로 들어오는 목재를 써서 아방궁 같은 개인 저택을 짓는데 바빴고, 시야를 확보한다는 이유로 벌목된 목재를 팔아 아내의 보석을 사주는데 여념이 없었다."
- 김경재의 <혁명과 우상: 김형욱 회고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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