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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lovestory_34331
    작성자 : 웨지감자
    추천 : 2
    조회수 : 949
    IP : 166.104.***.136
    댓글 : 2개
    등록시간 : 2011/04/28 06:58:04
    http://todayhumor.com/?lovestory_34331 모바일
    갤럭시 보이스.



    일곱번째.

    Galaxy Voice.







    [1974년 11월 16일, 19시 33분 24초]



    무엇이나 그렇듯, 시작은 작은 발상에서부터 출발했다. 푸에르토리코 섬의 서쪽 구덩이가 레이더로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누구였을까? 계획이 수립되었고, 코넬 우주과학 연구소에서 파견된 과학자들은 지름 305미터에 이르는 반구형 지표면에 여러 개의 반사판을 이어붙였다. 산등성이를 따라 삼각형 꼭짓점 위치의 거대한 기둥이 세워졌고, 기둥에서 뻗어나온 줄들에 보조 반사레이더가 매달렸다. 마지막으로, 각종 전기시설과 전파 신호를 분석할 수 있는 제어실이 건설되었다. 이렇게 해서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레이더 전파 관측 시설인, 아레시보(Arecibo) 전파 천문대가 탄생했다.



    우주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날아드는 아주 미약한 전파 신호들을 잡아내 우주의 탄생 원리나 구성을 밝혀내는 것. 그리고, 혹시나 존재할지도 모르는 외계문명을 향해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것. 이 두 가지가 아레시보 천문대의 설립 목적이었다.



    그리고, 운명적인 1974년 11월 16일, 19시 33분 24초. 아레시보 전파 천문대에서 서른 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주를 향해 한 줄의 전파가 쏘아졌다. 메시에 목록의 열 세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M-13 구상성단을 향해 인류의 메세지가 발사된 것이다. 0부터 9까지의 숫자체계와 인체를 구성하는 수소, 질소, 인 등의 주요 원자, DNA의 핵산구조와 평균적인 지구인의 형태, 그리고 태양계와 지구의 좌표에 대한 정보를 담은 1679비트짜리 이 전파의 별명은.



    지구의 목소리.



    지구로부터 2만 5천 광년 떨어진,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을 것이라 추측되는 우주를 향해 쏘아올린 인류의 외침이었다. 누군가.. 지구의 목소리를 들을 그 누군가를 향해서, 지구의 목소리는 그렇게 고독한 항해를 시작했다.











    [2008년 6월 3일, 11시 12분 38초]



    " 정말 책을 좋아하나 봐. "



    누군가 창문 너머로 서글한 여름 햇빛을 등진 채 말을 걸어올 때면, 나는 묘한 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예감은 부드러운 기분으로 온 몸을 타고 내려가, 결국 발끝에 닿을 때 쯤에는 힘차게 박동하는 심장소리를 동반한 두근거림으로 돌아온다.



    " 좀, 알고 싶은 게 있어서요.. "

    " 그래. 호기심이 강한 건 좋은 거지. "



    그녀는 내가 대출을 위해 데스크에 올려둔 책 더미를 능숙한 솜씨로 훑어보더니 그 중 두 권의 책을 집어 바코드를 찍었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내 쪽으로 책들을 내밀었다.



    " 자, 오늘의 초이스. 늘 두 권밖에 못 빌려주는 게 아쉽네. 이렇게 열심히 읽는데. "

    " 아니에요. 내일 또 오면 돼요. "



    나는 두 손으로 책을 받아들고 고개를 숙인 채 열람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조금만 더 머물러 있었으면 내 심장소리가 그녀에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나는 얼굴이 빨개지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 화장실로 달려가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내 나이 열 아홉. 거울 속 빨갛게 상기된 볼만큼이나 한심하고 서글픈 나이에 찾아온 떨림이었다.











    [2008년 6월 4일, 8시 37분 1초]



    가끔은 내가 대학생이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남들처럼 친구와 어울려 정말 듣고 싶은 수업을 듣고, 두 눈을 반짝이며 인생의 진리를 탐구하다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렇게 사랑하게 된 이와 녹음이 짙은 여름날, 두 손을 꽉 잡고 길을 걷게 되었을까. 그리고, 대학생이 되었더라면 무엇보다 그 도서관에서 다섯 권을 빌릴 수가 있었겠지. 나는 반쯤 떠진 눈을 돌려 책상 위에 올려둔 두 권의 책을 바라보았다.



    두 권이라.



    지금의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나는 ‘일반부’로 도서관에 등록되어 있다. 일반부로 빌릴 수 있는 책은 최대 두 권. 다섯 권을 빌릴 수 있는 대학부는 고사하고 세 권까지 빌릴 수 있는 고등부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바쁠테니까. 라는 잣대로 결정된 것이 뻔한 이 숫자는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닌. 그렇다고 ‘일반인’들처럼 바쁘게 생활하지도 않는 나의 한계를 극명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하지만 책 다섯 권에는 다섯 권만큼의 세계가 있고, 두 권에는 두 권 분량만큼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 법. 나는 어제 읽다가 만 책의 페이지를 펼쳐들고 찬찬히 살펴나갔다. 오늘도 도서관에 가기 위해서는 다 읽어야 한다. 물론 다 읽지 않고도 반납만 하면, 새로운 책을 빌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왜인지 그게 옳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책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맥주와 세월의 합성작용으로 불룩 튀어나온 배를 가진 중부 유럽 노동자 계층의 중년 사내 열여섯 명이 앉아 있었고, 그들 바로 아래 계단에는 블라우스 단추를 과감하게 네 개나 풀어놓은 여성 가이드가 돔에 대해 침을 튀기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여성 가이드는 손을 들어 높이 111.3미터, 베드로 성당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그 돔을 가르켰는데, 열여섯 사내들의 고개는 아무도 그녀의 손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지상의 거대한 돔, 그녀의 가슴에만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돔을 가르키는 여성 가이드와, 그 여성 가이드의 옷깃 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돔을 바라보는 열여섯 사내들. 머릿속에서 이 장면을 빠르게 그러졌다.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 돔을 가르키고 있는 가이드의 얼굴이 그녀와 쏙 빼닮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의 가슴은 어떨까? 부드러울까? 아니면 포근할까. 나는 그 뒷부분부터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빨리 읽어야 도서관에 갈 수 있는데, 난감한 상황이었다. 팔락팔락 넘어가는 책장사이로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늘은 왠지 그녀가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2008년 6월 4일, 12시 20분 12초]



    “ 반납할게요. ”

    "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



    애타게 소망하면 전 우주가 그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한다는 문장을 얼마 전 어느 책에서 읽은 듯한데, 이번처럼 한 여자가 그날 입을 옷의 종류와 색깔까지 정하는 데 전 우주가 참여할 줄은 미처 몰랐다.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고 나를 맞이하는 그녀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풀어진 단추 네 개까지는 들어줄 마음이 없는지, 그녀의 블라우스는 끝까지 매여 있었다.



    나는 책상 의자까지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창가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날의 도서관 기행을 시작했다. 세 달 전부터 매일 찾아온 탓에 도서관을 여행하는 방식에 대해 나름대로의 규칙을 정해두고 있었다. 제목을 훑으며 지나가다, 순간 이거다 싶은 느낌이 오는 책이 있으면 집어서 54페이지를 펼쳐본다. 그 페이지만 읽고 다음 페이지로 자연스럽게 눈이 간다면 일단은 합격인 것이다. 그렇게 한시간동안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면 어느새 대 여섯 권정도의 책을 품에 안고 있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그녀의 손을 거친다.



    “ 이야, 늘 쟁쟁한 것들로만 빌려와서 선택하기가 힘들어. ”

    “ 죄송해요. ”

    " 아니야, 나도 뭐랄까. 도전하는 기분이 들거든. 이 다섯 권중에 너에게 맞는 보물이 무엇일까 하고. “



    그녀는 내가 올려둔 다섯 권의 책을 나란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책마다 표지를 뒤집어 그 안의 속지를 살펴보고는 금세 두 권의 책을 골라서 바코드를 찍어주었다. 내가 책을 고르는 나만의 방식이 있듯이, 그녀도 그녀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내가 매일 빌려가는 두 권의 책은, 항상 그녀와 나의 합동작전으로 선택된 거르고 걸러진 정예들이었다.



    “ 내일 또 올거지? ”

    “ 네. 내일 봐요. ”



    그녀가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을 뒤로하고 문을 나서며, 어쩐지 오늘도 세수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974년 11월 16일, 19시 33분 24초]



    -그녀, 혜영.



    1974년 11월 16일, 19시 33분 24초. 태어나는 순간 그녀는 빛을 보았다. 그녀가 그 빛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모두가 그 빛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항상 이상했다. 뇌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태초의 기억. 그녀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캄캄한 어둠을 뚫고 비로소 세상에 등장했을 때 자신을 반겨준 빛을 말이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지구상에서 가장 이상한 애 취급을 받았다. 집에서 그녀를 부르던 별명은 까마귀였다. 피부색이 까맣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을 듣는 순간 즉각 잊어버리는 신기한 재주 때문에 그런 별명을 갖게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임신 중에 오골계를 지나치게 먹어서 피부가 까만 딸을 낳았다고 한탄하며 늦게나마 백옥 같은 피부를 위해 수제비, 칼국수처럼 하얀 면을 가진 음식들을 먹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의심스러운 지능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종합병원에서 아이큐검사를 받게 했다. 그 아이큐검사를 받을 당시 그녀는 한글뿐만 아니라 숫자도 몰랐기 때문에 무슨 시험을 어떻게 치를 수 있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 거다. 게다가 더욱 미스터리한 것은, 아이큐검사의 결과였다. 놀라운 지능의 소유자라고 밝혀진 그녀는 그때부터 집안의 기대주로 우뚝 서게 되었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대기만성’ 이라는 지금도 그녀가 주문처럼 되뇌는 말을 알려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었다. 첫 받아쓰기 시험 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몰랐던 그녀는 옆 짝꿍의 이름을 어설프게 컨닝했다가 선생님께 혼이 났다. 그래도 ‘대기만성, 대기만성’ 주문같은 그 말을 혼자서 계속 발음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2학년에 올라간 그녀가 1등을 했다며 선생님이 그녀를 목마를 태워 집까지 데려다 주었던 것이다. 집안에선 파티가 열렸고, 그녀의 아버지는 역시 ‘대기만성’이 맞다며 크게 웃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심각했다. 컨닝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1등이 될 수 있었을까? 혼자서 시작한 고민은 고독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말 못하는 고민 때문에 집을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겨울이면 미끄러지지 말라고 늘 연탄재를 뿌려두는 집 뒤편의 언덕을 숨이 차도록 올랐다. 언덕을 달리는 동안 해가 지고 완전히 어둠이 내리면 어린 그녀의 마음에도 알 수 없는 뭉클한 기운이 솟아 가슴이 뛰었다. 별이 떠오르는 하늘을 보면 숨이 막힐 만큼 막연한 그리움이 몰려왔다. 그 이후로 그녀는 16살까지 매일처럼 언덕을 올랐다. 저녁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언덕을 올라, 해가 완전히 져 별이 하나둘 고개를 내미는 하늘을 보며 내려왔다.



    1990년 3월, 그녀가 17살이 되던 해. 문득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는 달리기를 그만뒀다. 그리고 다시는 언덕 위를 오르지 않았다. 달리기를 그만 두고 났더니 시간이 남아돌았다. 그 남는 시간동안 그녀가 마루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멍하니 앉아있지 않도록 해준 것은 바로 책이었다. 매일 뛰어놀던 체육시간은 그녀만의 비밀스러운 시간으로 바뀌었다. 체육이 있는 전날이면 서점에 가서 얇은 문고판 책 한 권을 사고 엄마의 커다란 팬티 한 장을 빼돌렸다. 체육 선생의 작고 예리한 눈을 피하기 위해 엉덩이와 헐렁한 엄마 팬티사이에 문고판 책 한 권을 끼워 넣고 그 위에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에 나갔다.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친구들이 공놀이를 시작할 때면 그녀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읽은 책들이 그녀의 현재 모습의 근거가 되었다. 그녀가 책을 읽기 시작한 무렵, 그녀만의 책 고르는 방식은, 표지 안의 속지가 팬티를 물들게 하는 알록달록한 색깔인지를 보는 것이었다. 2008년 35살이 된 지금까지도 그녀의 책 고르는 기준은 표지를 한 장 넘겨 안에 들어있는 속지를 보는 것이다.**











    [2008년 6월 5일, 11시 9분 14초]



    “혹시 말인데,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



    그녀를 둘러싼 기운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이건... 데이트? 나는 안 그래도 가속을 붙여 최대출력으로 피를 뿜어내던 심장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해야 했다.



    “ 이번 주 토요일이요? ”

    “ 응, 6월 7일. ”

    “ 네, 시간 되요. ”


    너무 급하게 대답한 것은 아닐까. 살짝 후회가 들었다.


    “ 잘됐다. 사실, 이번에 굉장히 큰 낭독회가 열리거든. 그래도 나름 구청소속 사서인지라 초청받았어. 거기 같이 가줬으면 해서. ”

    “ 낭독회? "

    " 응. 자기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의 한 부분을 발표하는 시간이지. 보통 지루할거라고 생각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재미있어. 저마다 사연과 감정을 담아 읽으니까 한 두시간 안에 몇십명 치의 인생을 겪어보는 경험이랄까? 분명 마음에 들거야.“



    그녀는 아이처럼 들떠서 말했다. 고마워요. 같이 가자고 해줘서. 입 안으로만 맴도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한 나는 그녀를 향해 가만히 웃기만 했다.



    “ 같이 가줄 거지? ”

    “ 네. ”

    “ 그럼 자세한 시간이랑 일정은 내일 말해줄게. 프린터해서 보여주고 싶은데, 지금 프린터가 고장 났거든. ”

    “ 고장 났어요? ”

    “ 응, 경리과에 부탁해서 사람을 불렀는데 아직도 안 왔네. 자, 이건 오늘의 초이스. ”



    그녀는 서랍 안쪽의 프린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프린터라.. 그녀가 먼저 손을 내민 만큼 나도 그녀에게 한발 더 다가가고 싶었다.



    “ 제가 좀 봐도 되요? 고칠 수 있을 것 같은데. ”

    “ 그래? ”



    나는 그녀가 열어주는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매일 이렇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거구나. 3개월 동안 매일처럼 드나들면서 실제로 이 사서용 카운터에 들어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안쪽에는 밖에서 보이지 않던 그녀의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휴대폰, 핸드백, 작은 수첩, 액자에 담긴 그녀의 사진, 책상 위에 붙여진, 작고 깔끔한 글씨가 빼곡한 포스트잇들.





    “ 잉크 쪽 접촉 불량인 것 같아요.”



    프린터의 뚜껑을 열고, 내가 내린 진단대로 하나씩 처리해나갔다. 마지막으로 컴퓨터를 재시작하자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프린터가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 역시, 남자긴 남자네. 나는 기계에 대해서는 완전 백치야. ”

    “ 별 거 아니에요. ”

    “ 고마워. ”



    그녀가 발음한 고마워 라는 단어는 허공을 날아 내 주위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 저도 고마워요. ”

    “ 응? 뭐가? ”

    “ 아무것도 아니에요. ”



    그 후로도 나는 프린터가 제대로 작동되는지 시험해 본다는 명목으로 그녀의 착생 안에서 한참이나 멍청히, 그렇게 서 있을 수 있었다.



    “ 자, 여기 있어. 낭독회 장소랑 내용이 나와 있을거야. ”



    그녀는 프린터에서 뽑혀져 나온 종이를 건네주었다.



    “ 그런데, 저 낭독회라는건 한 번도 가보질 않아서.. ”

    “ 너 좋아하지? ”

    “ ..네? ”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 책. 좋아하잖아. ”

    “ 아.. 네. ”

    “ 그럼 됐어. 요 근래에 읽어봤던 책 중에서 끌렸던 게 있으면 그걸로 하면 돼. 내일 도서관에 나와서 골라봐. 중요한건 좋아한다는 진심이니까. ”



    당신을 좋아하는 것도 진심이면 되는 건가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서른 다섯 살이고, 나는 고작해야 열 아홉 살. 그녀에게 처음 볼 때부터 친근한 반말을 쓸 수 있는 남자 ‘애’ 정도로 밖에 안 될테니까, 나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1990년 3월 7일, 22시 29분 21초]



    대답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16년 뒤였다. 처음 발견한 것은 아레시보 천문대에서 3km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아마추어 전파기사, 마이크 레볼던이었다. 그는 잠들기 전 집 발코니에 설치된 작은 레이더로 우주의 잡음을 듣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샤워 후에 가벼운 마음으로 소음을 청취하고 있던 도중, 레볼던은 귓가로 들려오는 전파가 여느 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미하지만 의미 없는 소음이 아닌, 일정한 높낮이의 음이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큰 발견을 직감한 레볼던은 즉시 평소 친분이 있던 아레시보 천문대의 과학자에게 전화를 해 그가 맞춰놓은 채널의 주파수를 불러주었다.



    1990년 3월 7일, 22시 29분 21초. 외계로 떠난 지구의 목소리가 첫 번째 대답을 지구로 보내준 날이었다.











    [2008년 6월 6일 5시 00분 33초]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6월 6일이 현충일이라는 것이며, 구립 도서관은 공공시설인 까닭에 공휴일인 현충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로 했다. 원래 계획은 도서관에 나와서 낭독에 쓸 책을 함께 골라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제 도서관에서 나가기 직전 달력을 본 내가 내일이 현충일이란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자, 그녀는 새벽 5시에 나를 일어나게 만든 한 마디를 꺼냈다.



    “ 그래? 그러면, 서점으로 데이트 갈까? ”



    서점 데이트. 무슨 데이트면 어떠랴. 저 말의 핵심은 뒷 단어인 데이트에 있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밤새 뒤척이다 새벽 3시쯤 겨우 잠들었지만, 고작 2시간 후에 다시 일어났다. 심장소리가 내가 들어본 그 어떤 알람소리보다 더 크게 울렸기 때문이었다.



    약속시간은 10시. 장소는 도서관에서 가까운 대형 서점으로 잡았다. 서점이라면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무슨 자세로 무슨 말을 나눠야 하는 거지? 고민이 늘어갈 때마다 내 마음은 더 힘차게 뛰었다. 4시간 53분 뒤에는 그녀를 만나게 된다. 빨리 해가 떴으면 좋겠다.











    [2008년 6월 6일, 10시 18분 2초]



    간사이 지방에 대한 여행기를 뒤적거리다 다시 미술 쪽으로 관심도 없는 그림책들을 보았다. 그것도 질리면 철학이나 심리학에 관한 글까지 괜히 펴보고는 곧장 덮어버렸다. 막 아프리카 해변에 여름마다 찾아온다는 핑크색 돌고래에 대한 책을 펴려고 할 때, 내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 미안, 많이 늦었지? ”



    그녀였다. 모카색 치마에 연한 실크셔츠를 입고, 머리는 평소처럼 묶어 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풀어서 귀 안쪽의 귀걸이가 살짝 드러났다. 아, 여자는 때와 장소에 맞춰서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거구나.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제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

    “ 그냥, 왠지 여기 있을 것 같았어. ”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가 너무 눈부셔서 나는 그만 고개를 숙여버렸다.











    [2008년 6월 6일, 10시 40분 0초]



    “ 어릴 적에 책을 옷 속에 숨기던 때가 있었어. ”



    쓸쓸히 몸을 웅크리고 모여서 모닥불을 쬐는 노인들의 모습 같은, 낡은 서가 앞에서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선 서가에 꽂혀있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 묻어나오는 문고판 책들 사이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예전 문성사 버전 그대로구나. 이것 봐. 안의 종이가 하얀 색이지? ”

    “ 네. ”

    “ 옷 속에 책을 넣었을 때, 속지가 빨갛거나 노란색이면 속옷이 엄청 더러워져. 엄마한테 무진장 혼나고는 다음부터는 속지가 하얀 책들만 고르게 됐지. 체육시간은 이 문성사에서 나온 문고판 책을 읽는 시간이었어. 원래 난 체육시간을 좋아하는 달리기를 잘하는 애였는데, 17살 때부터는 달리기보다 책읽기를 더 좋아하게 됐어. ”

    “ 왜 17살때부터 바뀐거죠? ”

    “ 글쎄, 지금은 잘 기억이 안나. ”



    그녀가 알려준 낭독의 방법은 이런 것이었다. 책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섞을 것. 그리고 경험의 진심을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장면을 택할 것. 덕분에 나는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꽤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서점을 걸어 다니는 일은 즐거웠다. 굳이 서점이 아니어도 그랬을지 모르지만, 책을 좋아하고 책을 정리하는 일을 하며 책에 대한 기억이 많은 그녀가 가장 생기를 발하는 곳은 역시나 책들 속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틈틈이 내 눈길을 끄는 책들의 54페이지를 펴보았다. 결국 5권의 책을 양손 가득 들게 되었을 때, 우리는 서점 옆에 붙은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 이번에도 골라주세요. ”

    “ 똑같네. 항상 네가 이렇게 책을 가져오면 내가 그 중에서 두 권을 골라주고. 조금 식상하지 않아? ”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탁자 위에 내가 골라온 5권의 책들을 진열해 놓았다.



    “ 제가 책에 대해 가진 기억 중 대부분은 그 도서관에서 만들어진 거니까요. ”



    그리고 당신에 대한 기억두요. 그녀는 내 얼굴을 잠깐 쳐다보더니, 항상 하는 것처럼 책들의 표지들을 살펴보았다.



    “ 그래, 이번에는 이걸로 하자. ”



    나는 그녀가 손가락으로 찍어준 책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책 고르는 비법처럼, 표지를 넘겨 속지를 보았다.



    “ 어라, 이 책들은 빨간색인데. ”



    그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 응. 넌 사실 색에 물드는 게 더 어울리거든. ”



    나는 그녀가 골라준 책들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피처럼 붉은... 빨간 색이었다. 혹시 그거 알아요? 내 얼굴을 빨갛게 만드는 것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붉은 피를 내보내게 만드는 것도, 빨간 속지의 책을 골라준 것도. 당신이라는거요.











    [1990년 3월 7일, 22시 29분 21초]



    - 그, 호준.



    그는 늘 어두운 곳에 있었다. 그의 기억은 언제나 검은 세계와 맞닿아 있어서 그는 지금도 가끔씩 그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된다. 1990년, 3월 7일 22시 29분 21초. 비명소리를 들은 이웃집의 신고로 출동한 119의 구급차 안에서 그가 태어나던 순간. 그의 아버지는 어딘가 포장마차에서 술에 취해 누워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탄생의 기쁨보다 앞으로 아기와 살아가야할 날들에 대한 걱정으로 눈물을 쏟아냈다.



    그의 아버지가 늘 내뱉던 ‘장님년’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6살 때였다. 왜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는지, 그리고 엄마는 그렇게 맞으면서도 묵묵히 엎드려 바닥을 향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가 학교에 가서 처음으로 얻은 별명은 ‘귀신’ 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의 집은 늘 어두웠고, 햇빛을 받으며 또래들과 뛰어놀지 않았던 그의 피부는 하얗다 못해 투명할 정도였다.


    게다가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덕분에 그의 학교 친구들은 그를 꺼려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의 어머니는 집이 어떤 밝기를 지녀야하고, 어떤 감성이나 분위기를 담고 있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배회하던 아버지가 가끔씩 집에 돌아와 티비를 보거나, 전등을 고쳐주지 않는 한 그 집은 끈적끈적하게 느껴질 만큼 어둡고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그런 환경에서 지금까지 자랄 수 있게 지탱해준 것은 아마도 9살이 되던 해, 크리스마스. 교회에서 나온 봉사자에게 받은 작은 지구본이었다. 코드를 꽂아 스위치를 누르면 안의 전등이 켜지는 그런 지구본이었다. 고사리같은 손으로 처음 스위치를 켰던 그 순간 이후부터 지구본은 언젠가 결국 그를 집어삼킬 것 같던 집안의 어둠과 싸우는 무기이자 희망이었고 삶의 증거와 빛이었다. 그는 몸을 비틀어 태양을 향하는 식물들처럼 하염없이 은은한 주황빛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고 그 앞에 몸을 둥글게 말아 지구를 바라보았다. 지구 곳곳을 작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언젠가는 그 곳들로 날아가게 되는 상상을 했다. 그의 세계에서 지구는 푸른빛이 아니었다. 그에게 지구는 언제까지고 그를 비추어주는 은은한 불빛, 따뜻한 주황빛,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위안을 주는 그런 색이었다. 그는 그 지구본 앞에서 책을 읽었고, 일기를 쓰고, 꿈을 꾸고, 그의 미래를 상상하고, 때로 어머니의 신음소리와 아버지의 욕설을 피해 귀를 막았고, 눈물을 흘리며 그 앞에서 잠이 들었다.



    그가 19살이 되던 2008년 2월. 암흑 속을 방황하던 그의 어머니는 영원한 어둠을 향해 눈을 감았다. 주위에서는 얼마 전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 이름 앞으로 가입해놓은 보험에 대해서, 아버지의 평소 행동거지를, 어머니의 비명소리와 아버지의 고함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들를 수근 댔다. 그는 그런 이야기들을 믿지 않았지만, 만취한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와 웃으며 그의 앞에 보험금 지급서를 흔들어 댔을 때는 그런 이야기가 진실로 다가올만큼 분노를 느꼈다. 그날 밤. 잠든 아버지의 지갑과 통장을 훔치고 지구본과 함께 집에서 도망쳐 나올 때 올려다본 하늘은 달도, 별도 숨어버려 어둡기 짝이 없었다.



    그는 독립심 강한 대학생으로 위장해 혼자서 방을 얻었다. 사망보험금은 방의 계약금을 내고 1년 치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할 만큼이 되었다. 가출 뒤, 그는 방에 틀어박혀 일주일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내내 지구본만 바라보았다. 그 속에 자신과, 아버지와, 엄마가 모두 녹아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며칠을 시체처럼 누워 울고, 웃고, 멍하니 바라보고를 반복했다. 아마 지구본 안에 전구가 터져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말라 죽을 때까지 지구본만 바라보았을 지도 몰랐다. 며칠 만에 집 밖으로 나와 전구를 팔만한 철물점을 찾던 그는 눈부신 햇빛에 이마를 찡그리며 작은 구립도서관을 발견하게 된다.











    [2008년 6월 7일, 17시 30분 10초]



    “ 너 진짜 대단했어. 와, 그렇게 박수를 받을 줄이야. 뭐라고 했었더라? 제 영혼의 한 면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

    “ 그만해요. 저도 부끄러워 죽을 뻔 했어요. ”

    “ 아니야, 진짜 대단했어. ”



    나는 낭독회를 무사히 끝내고 저녁을 같이 먹자는 그녀와 함께 작은 시내를 걷고 있었다. 어젯밤, 그녀가 골라준 책들로 낭독을 연습해보았지만 결국 낭독회에서 읽을 책으로 결정한 것은 다른 책이었다. 나는 불과 2시간 전에 내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술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그것은 누군가 보다가 잠시 덮어둔 책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우연히도 터져버린 전구를 사기 위해 헤매다가 작은 도서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들어간 도서관에서 그 책을 보았죠. 그리고 그 책을 뒤집던 순간, 한 페이지 분량의 글이 저의 인생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 글이 저를 그토록 강하게 끌어당겼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혼자 추측하기에 바로 우연히 뒤집어본 그 책이, 바로 그 책의 54페이지가 제 영혼의 한 면과 맞닿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이후로 저는 무슨 책이든 54페이지를 펴보게 되었습니다. 책의 54페이지란 책이 저에게 처음으로 열리는 문과 같은 것이고, 저는 그 문을 통해 책의 본질을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저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한 부분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저는 어떤 책이든 결국 54페이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제 최초의 54페이지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처음이라 할 수 있는 54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 ...1974년 11월 16일, 19시 33분 24초. 아레시보 전파 천문대에서 서른 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주를 향해 한 줄의 전파가 쏘아졌다. 메시에 목록의 열 세 번 째 자리를 차지하는 M-13 구상성단을 향해 인류의 메세지가 발사된 것이다. 0부터 9까지의 숫자체계와 인체를 구성하는 수소, 질소, 인 등의 주요 원자, DNA의 핵산구조와 평균적인 지구인의 형태, 그리고 태양계와 지구의 좌표에 대한 정보를 담은 1679비트짜리 이 전파의 별명은, 지구의 목소리. 지구로부터 2만 5천 광년 떨어진,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을 것이라 추측되는 우주를 향해 쏘아올린 인류의 외침이었다. 누군가.. 지구의 목소리를 들을 그 누군가를 향해서, 지구의 목소리는 그렇게 고독한 항해를 시작했다.
    대답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16년 뒤였다. 처음 발견한 것은 아레시보 천문대에서 3km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아마추어 전파기사, 마이크 레볼던이었다. 그는 잠들기 전 집 발코니에 설치된 작은 레이더로 우주의 잡음을 듣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샤워 후에 가벼운 마음으로 소음을 청취하고 있던 도중, 레볼던은 귓가로 들려오는 전파가 여느 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미하지만 의미 없는 소음이 아닌, 일정한 높낮이의 음이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큰 발견을 직감한 레볼던은 즉시 평소 친분이 있던 아레시보 천문대의 과학자에게 전화를 해 그가 맞춰놓은 채널의 주파수를 불러주었다. 1990년 3월 7일, 22시 29분 21초. 외계로 떠난 지구의 목소리가 첫 번째 대답을 지구로 보내준 날이었다....'





    6월의 햇살은 눈부시게 빛났다. 내 옆에서 걷고 있는 그녀는 햇빛에 덩달아 선명한 색체로 빛이 났다. 공기는 따뜻하고 포근해서 나는 꿈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아까의 이야기로 웃고, 다시 왜 웃었는지를 이야기하며 더 크게 웃었다.



    “ 고마워요. ”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 뭐가 고마워? ”

    “ 그냥, 전부 다요. 전부 다. ”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을 손에 쥐게 되었다.



    “ 너, 나 좋아하지? ”

    “ ... ”

    “ 좋아해? ”

    “ ..네. ”



    내 대답이후로 우리는 말없이 그대로 손을 잡고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끝없이, 끝없이 길을 따라 걸었다.











    [2008년 6월 7일, 21시 12분 5초]



    그녀의 아파트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내부에 별다른 가구가 없어 휑한 기분이 들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거실에 놓인 침대와 그 옆에 탁자크기로 가득 쌓여진 책들이었다.



    “ 정리도 안했는데, 큰일이네. 이상하지? 침대가 거실에 있어서. ”

    “ 아니요. ”

    “ 혼자 사는데, 내 방을 따로 둘 필요가 없더라구. 어차피 쇼파에 누워서 책 읽다 자는데, 그냥 침대가 더 낫다 싶어서 거실에 뒀어. ”



    나는 쇼파 겸 침대에 앉아 어색하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작은 벽걸이 시계, 티비는 없었고, 낡아 보이는 전축과 책들이 집 가구의 전부였다. 거실과 붙은 부엌에서는 그녀가 차를 타고 있었다.



    “ 커피 마실래? ”

    “ 네. ”

    “ 설탕 두 스푼? ”

    “ 네. ”



    나는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내 손을 내려다 보았다. 따뜻한 기분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대로 손을 잡고 작은 레스토랑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가게에 단골이며, 맛있는 메뉴가 많아도 사람이 별로 오지 않아서 좋다는 말을 했다. 그대로 얼떨떨한 기분에 뭘 먹는지 모를 정도로 밥을 먹고는 그녀의 아파트까지 따라왔다.



    “ 무슨 생각하고 있어? ”

    “ 아무 생각 안했어요. ”

    “ 여기, 커피. ”



    그녀는 커피 잔을 건네면서 내 옆에 앉았다. 두 잔의 커피 잔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만 방안에서 움직일 뿐, 나와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앞만 바라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냥 함께 있는 시간조차 두근거리고 행복한 기억으로 내 뇌 속에 그대로 새겨지고 있었다. 나는 이것과 비슷한 느낌을 알고 있다. 내 지구본에서 나오는 색깔. 은은한 불빛이 내 발끝을 비추는 그런 느낌. 그녀와 함께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꼭 내 지구본 같다고.



    “ 내 나이.. 알고 있어? ”

    “ 네. ”

    “ 나, 서른 다섯이야. 1974년에 태어났어. 너보다 16년 먼저. ”

    “ 알고 있어요. ”

    “ 호준아. ”



    그녀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호준아.



    나는 왜인지 눈물이 났다. 뜨거운 두 줄기 물방울이 눈을 타고 흘러내렸다.



    “ 울지 마. ”

    “ 그냥, 그냥.. 눈물이 나요. 왜 일까요? ”



    그녀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나는 엄마에게 안긴 어린 아이처럼, 그녀의 어깨 너머로 눈물을 펑펑 쏟아내었다. 지금까지의 삶이, 어둠이, 응어리가 한꺼번에 녹아 그대로 내 눈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2008년 6월 8일, 1시 2분 7초]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그녀의 품에 안겨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볼에 닿아 간지러웠다. 그녀가 작게 숨을 내쉴 때 마다 내 피부를 통해 그 박동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감싸고 있는 그녀의 팔을 들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 깼어? ”



    그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부스스한 머리로 그녀도 일어나 침대에 앉아 있었다.



    “ 갑자기 엉엉 울더니 쓰러졌어. 그래서 어쩔 수 없었지. 안고 잘 수밖에.. ”

    “ 죄송해요. ”

    “ 이리 와. ”



    나는 그녀의 손짓을 따라 침대로 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 잠 와. 내일도 출근해야 되는데. ”

    “ 죄송해요, 저 때문에.. ”

    “ 농담이야 바보야. 내일은 일요일이야. ”



    달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침대를 비추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 나, 달리기 잘했다고 한 거 기억나? ”

    “ 네. ”

    “ 어릴 때, 언덕 위를 무작정 달렸었어. 해가 질 때쯤 출발했지. 숨이 차도록 달리고 또 달려서, 언덕 위에 도착해 가쁘게 호흡을 몰아쉬면 그대로 누워버릴 수밖에 없었어. 그렇게 올려다보던 하늘이 얼마나 눈부시던지. 그런데 말이야, 이상하게 나는 그 하늘이 무지하게 슬퍼보였어. 왠지 그립고 아득한 기분이 드는 게 가슴이 먹먹해 오는거 있지? 그 후에 책을 읽다가 그 감정을 비슷하게 설명해주는 단어를 찾었어. 바로, ‘향수’ 라는 단어야. 왜 내가 하늘을 보고 향수를 느꼈을까? 그것도 바로 우리 집 뒷산에서 말이야. 나도 참 웃겼어. ”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방 안을 울리고, 내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그녀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녀가 숨을 내쉬며 누워서 보았다던 꼭 그 하늘같은 밤이었다.



    “ 그러다가, 지금도 기억해.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3월이었을 거야. 항상 하던 것처럼 언덕을 올라 하늘을 보고 있는데, 어쩐지 그 날은 아무리 하늘을 봐도 그리운 마음이 들지 않는 거야. 그 대신,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어. 이제 드디어 하늘을 올려 보지 않아도 되는구나. 나는 생각했지. 그 길로 내려와 그때부터는 책을 읽었어. ”



    그녀는 말을 마치고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녀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 심장박동이 손을 통해 서로에게로 전해지고 있었다.



    “ 아까, 네가 읽었던 글. 전파를 쏘았다는 날. 1974년 11월 16일. 내가 태어난 날이야. 어쩌면 말이야, 나는 그 날의 그 전파와 함께 태어나서 함께 우주를 향해 쏘아진 운명이었는지 몰라. 우주를 향해 보내진 지구의 대표자인거지. 먼 우주를 향해 여행하니까 늘 하늘을 보면 그리운 마음이 들었던 게 아닐까? 내 운명이 저기 있는데 하고. ”



    나를 바라보며 웃는 그녀의 입술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어서 나는 무심결에 내 입술을 그 빛을 향해 움직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혜영.



    나는 눈을 감았지만, 아마 나보다 16살이 많은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2008년 6월 12일, 10시 1분 5초]



    “ 여기, 이거. 선물이에요. ”



    그가 다시 도서관에 온 것은, 그 새벽에 내 아파트에서 일어나 함께 별을 보았던 날 이후로 나흘만이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햇빛이 비치는 자리에 가서 앉지 않고 그대로 오른손에 든 종이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 이게 뭐야? ”

    “ 그냥, 선물이 주고 싶었어요. ”



    그 키스가 그의 마음을 조금 더 열어준 것일지도 모른다. 항상 소심하게 네 아니며 아니요 밖에 하지 못했던 그가 내게 선물을 주었다. 봉투 안에 든 것은 지구본이었다.



    “ 지구본? ”

    “ 네, 조금 오래된 거긴 하지만요. ”



    지구본은 그의 말대로 낡은 것이었다. 겉에 드러난 지구의 색은 바래있었고, 아메리카 대륙은 누구의 공격이라도 받은 듯 종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유럽은 지중해와 구분이 가지 않았고, 중국과 러시아의 광활한 대륙에는 작은 점들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소중하게 다뤄온 것임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지구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 집에 가구가 없더라구요. 침대 옆에 놓고 스위치를 켜보세요. ”

    “ 음, 너무 가난해 보였나. ”

    “ 아니에요. 아무튼, 집에서 켜보면 알거에요. ”



    지구본 아래로 전기코드와 작은 스위치가 보였다. 아마 안에 전구가 들어있는 모양이었다.



    “ 아끼는 것 같은데. 나한테 줘도 괜찮아? ”

    “ 이제 괜찮아요. ”

    “ 이제? ”



    그는 시선을 아래로 하며 조용히 웃었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나는 그를 따라 웃어주었다. 박호준. 일반부에 등록된 19살짜리 가출소년. 2월 28일. 봄의 시작과 함께 도서관을 찾아온 그의 옛 모습들이 겹쳐져 내 눈앞에 펼쳐진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마치 감옥이나 동굴에서 몇 년이나 빛을 보지 않고 산 사람처럼 느껴졌다. 티 하나 없이 하얀 피부가 그랬고, 그리 밝지도 않은 빛에 손 가리개를 만들어 눈을 가리면서도 끝까지 그 빛을 기웃거리며 바라보는 모습이 그랬다. 처음에는 그렇게 햇빛이 드는 창가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몇 시간이나 가만히 있다가 집에 돌아갔다.



    어느새 나는 그를 항상 바라보게 되었다. 책장 사이를 누비며 이상하게 똑같은 페이지만 펴보고 덮고를 반복하다 결국에는 몇 권의 책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그 중에서 두 권을 골라달라고 했다. 책을 읽은 적이 거의 없어서 마지막에는 사서인 나에게 검열을 받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나는 그 귀여운 부탁에 늘 내 방식대로 책을 골라주었다.



    " 정말 책을 좋아하나 봐. "



    매일 아침 10시에서 11시면 그가 찾아왔다. 출근해서 책을 정리하고, 신간들을 모아서 분류표를 붙이는 와중에도 틈틈이 시계를 보게 되었다. 그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조금씩 불안했다. 오지 않으면 어쩌지. 그에게 책을 빌려주면서 항상 묻는 말이 있었다.



    “ 내일 또 올거지? ”



    그는 고맙게도 항상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놀라운 점은, 그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가 열아홉 살이란 사실을 잊어버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서른다섯 살이고, 그는 열아홉 살이다. 하지만 그를 바라볼 때마다 마치 내가 언덕 위를 숨이 차도록 뛰어 올라가던 열여섯 살로 돌아가, 그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는 기분이 되었다. 그에게는 그리움이 따라다녔다. 그를 보면 마음이 뭉클해지고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1990년. 내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 내가 비로서 책을 읽기 시작했던 해. 내가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게 되었던 해. 그가 태어났다.



    “ 저도 고마워요. ”

    “ 응? 뭐가? ”

    “ 아무것도 아니에요. ”



    아무것도 아닌 것에 고마워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좋아할 때 일어나는 일반적인 감정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것보다 더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나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리고 그 사실보다 더 내 가슴을 죄어오는 것은 그보다 16년 먼저 태어난 나 자신이었다.



    “ 그러고 보니, 내일은 현충일이에요. ”

    “ 그래? 그러면, 서점으로 데이트 갈까? ”



    나는 비겁하다. 그가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웃음을,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어버린다.



    “ 응. 넌 사실 색에 물드는 게 더 어울리거든. ”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하얀 얼굴이 빨갛게 물든다. 바보같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걸 티내면 손해 보잖아. 그는 내가 골라준 책을 집어 소중히 넘겨보았다. 그리고 낭독회에서 그는 그날 골라준 책을 읽지 않았다.



    “ 뭐가 고마워? ”

    “ 그냥, 전부 다요. 전부 다. ”



    나도 고마워. 전부 다. 전부 다.. 호준아. 마음이 터질 것 같아서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손을 잡고 걸었다. 그 때 너무나 따뜻했던 것이 황금빛으로 내리쬐던 햇빛인지, 아니면 그의 손인지, 그도 아니면 둘 다인지 잘 모르겠다.



    “ 아까, 네가 읽었던 글. 전파를 쏘았다는 날. 1974년 11월 16일. 내가 태어난 날이야. 어쩌면 말이야, 나는 그 날의 그 전파와 함께 태어나서 함께 우주를 향해 쏘아진 운명이었는지 몰라. 우주를 향해 보내진 지구의 대표자인거지. 먼 우주를 향해 여행하니까 늘 하늘을 보면 그리운 마음이 들었던 게 아닐까? 내 운명이 저기 있는데 하고. ”



    그 키스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나는 당연한 것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영원 같기도 하고, 짧은 순간 같기도 했던 키스가 끝나고 그가 내게 해준 말은 내 가슴으로 파고들어와 내 위선과 걱정들을 산산이 부셔버렸다.



    “ 미안해요. 16년 동안 기다리게 해서. 나 없는 세상에서 기다리게 해서요. ”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이 소년은, 지난 16년간 나 혼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리운 마음을 가지게 한 뒤에서야 태어나, 내게 책을 읽도록 만든 이 소년은. 창문 너머로 서글한 여름 햇빛을 등진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 그럼, 나도 보답을 해야겠네. 너 생일 언제야? ”

    “ 3월 7일이요. 1990년 3월 7일. ”

    “ 혹시..? ”

    “ 네. 아레시보 천문대에서 대답이 돌아온 날이에요. ”



    내가 읽다가 잠시 올려둔 책이 창문 너머로 불어온 바람을 맞아 팔랑팔랑 넘어간다. 그리고 한 페이지에서 멈춰졌다. 바로 55페이지.



    - 그렇게 아레시보 천문대로 돌아온 그 대답을 해석한 결과는 실망스럽게도, 너무나 다양하고 포괄적이어서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몇 가지 해석만 보더라도 어떤 과학자는 M-13성단이 아닌 M-7성단의 위치와 그 곳에 사는 지적생명체의 뇌파라는 주장을 하고, 다른 과학자는 전파를 보낸 외계인이 타고 있는 우주선에 접속하는 주파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압권은, 한 낭만적인 과학자였다. 그는 이 전파의 파동을 알파벳과 결합시켜서 결국 한 문장을 얻어내었노라고, 발표했다. 외계에서 보냈다기에는 너무 사랑스러운 문장이라는 조롱과 함께 웃음거리로 전락해버리고 만 그 문장은 바로,



    ' 당신이 너무 그리웠어요. '



    이 문장은 지구의 목소리에 빗대어, ‘은하의 목소리’ 라는 별명을 얻었다.







    -The End.



    2010. 6. 16 - 6. 20







    * 정혜윤, <런던을 속삭여 줄게> 中

    ** 정혜윤,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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