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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死
# Additional Edition 01. Rebecca
" 뭐야, 그 웃긴 가면은… 다음에 만날 땐 그 두꺼운 가면을 벗어줬으면 좋겠어. 거짓된 조소가 아닌 너의 진짜 미소를 보고 싶어. 나의 오랜 친구야…. "
- 철의 여인 레베카(Rebecca)
" 오늘은 좋은 건수가 없을려나? "
디시카에 들어서자마자 네온사인들이 먼저 시선을 맞았다. 골목마다 밤 하늘의 어둠을 가린 형광들이 현란한 춤사위를 펼쳤지만 감동은 글쎄…먹고 살기 바쁜 이때에 이런거에 감동을 느낀다면 그것 나름대로 대단할지도 몰라. 후훗, 벽마다 활자화 된 유혹들이 벚꽃처럼 흐드러졌고 그 속에는 인파는 물비늘처럼 넘실대며 스쳤다. 군데군데 잘못된 영어철자들이 좀 거슬렸지만 빛으로 빚은 화려는 충분히 자극적이였다.
유혹의 시작은 역시 시각이였다. 아니, 삶의 시작부터 시각은 거의 모든게 되어있지 않았을까? 디시카의 요란스러운 화려는 더러운 사창가의 칙칙함을 가리기 위한 착시에 지나지 않았다. 디시카는 온전한 흑도 백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변모했다. RGB가 뒤죽박죽 섞인 요사스런 홀림의 장이였다.
" 안녕, 오늘 내 시중 좀 들지 않을래? 난 굳이 남자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
초입부터 허룽거리는 목소리들이 쏟아졌다. 사창가엔 당연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남성은 여성을 희롱하기 위해 디시카에 모였다. 그들은 성(性)에 굶주렸으며 그것을 얻기위해선 지갑에 든 몇푼 없는 지폐쪼가리도 아무런 꺼리낌 없이 여자에게 줄 수 있었다. 적어도 디시카에서는 그랬다.
" 너 같은 스타일이랑 놀고 싶은데, 어때? "
" 아니, 난 딱히 그런 취향이 아니라… "
" 더 특별한 걸 원해? 난 동시에 셋도 가능해. 지금 둘은 골라놨는데 너도 끼지 않을래? "
" 오늘은 무지 짜증나는 날이야. 네가 날 위로해주면 좋겠는데… 어때? "
여성의 유혹은 이성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갈 지폐가 많아질테니 아마 이 대공황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걸 지도 몰랐다. 하여간 영국 윗대가리란… 자치권을 포기했다고 도시를 이렇게 막 방생시켜도 되는거야?
" 하 참, 곤란하네. 이래봬도 나 경찰인데? 배 곯지 않게 감방에 넣어줄까? "
전직 경찰의 허세로 그들을 물러나게 하는데에 성공했다. 디시카의 길목엔 화려와 유려가 둘쑥날쑥 닥쳤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거리의 초입은 늘 그런식이였다. 짧은 치마에 젖가슴을 반쯤 드러낸 여자들의 거리. 여자이면서 상아색의 살덩어리였다. 속으로 욕지기가 올라왔다. 번화가의 노골적인 응대는 차마 보기 껄끄러웠지만 소란을 피우면 곤란한 입장이라 힘겹게 참아본다.
번화가의 초입을 선택하는 건 늘 처음 디시카에 온 돈많은 불량배거나 졸부, 아니면 채석장에서 테라나이트를 채취하는 광부들이 대부분이였다. 물론 그것에서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들어서면 저 멀리 동방 전설의 아방궁을 방불케 하는 환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正)과는 반대되는 쾌락과 환락의 도시. 마치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 같았지만 차이점은 이젠 그들을 벌해줄 세력같은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였다.
" 역시 여느때나 변변찮네. 이곳은… 나도 속 편하게 도일씨처럼 리버포드에서 바(Bar)나 하나 차릴까. "
항락을 향한 무덤덤한 시선은 금세 심드렁해졌다. 이제 그들은 큰 반항을 얻지 못하는 구태였다. 옛날에나 통할 자극이였다. 아무리 디시카가 성(性)을 위한 도시가 되었다지만 늘 같은 결론. 식상했다. 권태가 솟았다. 욕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머릿속이 투명해진 것 같았다. 디시카도 처음엔 이러지않았다. 불량배나 건달들이 가득한 도시였지만 근면한 노동자의 도시이기도 했다. 과거의 전쟁영웅 데미안 도일도 디시카의 평범한 잡부로 시작했다. 이제 디시카는 죽었다. 연합이란 목줄 없이 지속하기 힘든 도시였다.
' 다른데로 가보자. 혹시 모르니깐. '
디시카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디시카 광장을 벗어나는내내 창녀들은 눈에 거슬렸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또 걸었다. 스쳐가는 골목들을 곁눈으로 훑으며 도시의 끝으로, 끝으로 들어섰다. 골목마다 넘치는 노출과 관음의 행렬이 탁한 화려로 안개처럼 흘렀다.
중심가를 벗어나자 차츰 형광이 잦아들었다. 목소리들도 간헐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이 깊어지고 사위가 잠잠해졌다. 번화가를 완전히 벗어나 외곽첩경에 거의 닿을 무렵이었다. 디시카를 드나든 이후 오랜만에 닿는 외곽쪽이였다. 연합에 몸 담근 시절 도일씨와 휴톤을 불러 허름한 주점에서 맥주 한 잔을 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콧 끝이 찡해졌다. 콜라를 처음 접했을때의 충격 또한 머릿속에 그러졌다.
" 아~ 맥주 먹고 싶다! "
갈증이 앞섰다. 얼른 돌아가 한잔 걸치고 싶었다. 디시카의 외곽은 디시카답지 않은 한가함이 존재했다. 적녹청의 화려속에 무채색 침묵이라니! 어울리지 않았다. 살색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는 괴성도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멀찌감찌 광장 쪽에서 피어오른 폭죽의 잔상이 소리없이 울렸다.
" 어서 와. "
폭죽의 폭음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온 것은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 허, 깜짝이야! 뭐야? "
엉겁결에 대꾸한는 투가 저절로 주춤했다. 디시카에서 인삿말을 듣다니, 낯설기만 했다. 디시카에선 적의 인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디시카에선 인사보단 시퍼런 단검의 날을 먼저 들이대야 옳는 그런 장소였다.
" 네 육체를 털어갈 상대지. "
" 허어? "
의외로 목소리가 젊잖게 이어졌다. 곧 이어 내가 들어온 골못에서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작은 사내였다. 검은색 옷 차림에 허리춤에 걸려진 왜도는 길어서 땅바닥에 닿을 뻔 하였다.
" 여긴 자주 오나? "
그 사내는 좀처럼 공격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디시카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표정. 그래 약에 반쯤 정신나간 듯한… 데샹의 걸작품 마약 '샌드 글래스'의 영향으로 보였다. 음흉한 사내… 그렇게 위로 올라가 무슨 짓을 벌일려고.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라니깐,
" 그런건 왜 물어? "
" 그냥, 지루해서 묻는거야. 시간도 많은데 서두를 필요 있어? "
놈은 시간이 많은 모양이였다. 아니면 기만을 위한 안개일지도 모를 일이였다. 느긋한 말투와 느린 호홉속에서 긴장이 느껴졌다.
" 여기가 재미있나? 하긴 별 힘 들이지 않고 주머니를 털 수 있으니 재미 좀 봤겠지. "
술수에 넘어갈 수는 없었다. 허튼 소리로 경계를 늦춘 후 허를 찌르고 올 터였다. 디시카에 오래 박혀있는 놈이라면 그런 전술도 가능할 것 같았다. 대꾸할 필요는 없었지만 선제공격을 감행하기엔 어딘가 찜찜했다. 느낌으로 보아 놈도 꽤 짱구를 굴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 내가 시비를 걸었으니 대결은 해야겠지. 하지만 좀 쉬었다 하자. 어차피 하나는 승자가 되고 하난 패자가 될테니깐. "
목소리는 갈수록 여유로웠다. 천천히 움직이던 그림자가 넓직한 큰 바위에 걸터 앉는 것이 보였다. 슬며시 짜증이 솟았다. 놈의 여유에 조롱이 담긴것 같았다. 조롱이라면 참기 힘든 일이였다. 실패와 낙오에 인한 조롱은 옛 친구의 일로도 충분했다. 세상에선 조롱당해도 이곳에선 조롱당할 이유는 없었다.
" 창녀에다가 건달까지 슬슬 기분나빠지려하는데? "
"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면 덤벼봐. "
그림자 역시 재빨리 방어태세를 갖추며 왜도를 곧추세웠다. 곧 이어 칼끝에 푸른 반사빛이 피었다. 두 합, 세 합이 아슬아슬하게 나의 스탭에 빗겨갔다. 상대도 짐짓 놀란 눈치, 살(殺)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칼의 울음에 덮여 지워졌다.
날 사이로 그의 미소가 보였다. 동시에 가슴께에 바람이 일었다. 옷자락이 베어지는 소리가 섬뜩했다. 놈은 허를 놓치지 않았다. 가슴께를 스친 바람결에 몸을 물리는 순간 칼바람이 정수리를 향해 밀려왔다. 빨랐다. 횡으로 펼처진 왜도를 거둬들이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날이 직각으로 쏟아졌다.
" 백로 떨어트리기?! "
놈에게 홀든가의 대인 제압 검술 중 하나인 백로 떨어트리기가 겹쳐보였다. 펼치는 공세가 빨랐다. 곁으로 비약하며 낙법을 썼지만 쉽지 않았다. 여덟 합을 넘기면서 숨이 턱에 찼다.수세도 벅차니 공세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 네 녀석… 안타리우스의 클론이냐?! "
" 체, 왜 물러서? 죽기는 싫은가? 서둘러 끝내자고 한 건 너 아냐? "
놈은 내 말에 대꾸도 않은 채 고삐를 늦추지 않고 다가왔다. 서둘러 물러서도 놈의 눈빛은 여전히 왜도 끝에 있었다. 절망이 앞섰다. 흡사 홀든의 장남 다이무스가 겹쳤다. 곧 몸 어딘가에 뜨거운 불길이 지나갈 터 였다. 베이고야 말았다. 붉은 빛의 선혈은 땅바닥에 흩 뿌려졌다. 예상외로 데미지가 컸다. 금속화로도 어찌 할 수 없는 데미지였다.
" 낄낄, 오늘은 재수가 좋군, 젊은 영웅에다가 철의 여인의 육체를 가져갈 수 있다니, 아이작님도 기뻐하실테지. "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의 등장,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듯한 느낌.
" …로 부르지마. "
" 뭐? "
" 그 딴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했다. "
" 뭔 개소리야? "
나의 분노에 답하듯 나의 양 주먹은 빠르게 금속화됐다. 이것이 나의 파멸로 이어질지 적의 파멸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길은 없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적은 나보다 한수 위였다.
" 기도 하는 신이 있다면 지금 기도해. 네놈처럼 막돼먹은 미치광이들 때문에 사람들이 사이퍼에 대해 편견과 두려움을 가지는거야. 내 선량한 친구도 그 때문에 무고하게… "
" 지랄 하는군. "
놈은 빠르게 앞으로 튕겨나와 나에게 접근했다. 그의 품세나 동작이 컸다. 일격에 끝낼 요령인 듯 보였다. 원하는 바였다.
" 어디 한번 몸으로 느껴봐. "
그의 왜도가 나의 주먹에 닿았다. 금속이 부딪히는 경쾌한 파열음이 맑게 울렸다.
" 말도 안되는군. "
" 상황… "
" 체, 이거 한방 먹은듯 한데? "
" 종료! "
팔을 뒤로 쭉 뺀 뒤 반작용으로 인해 꼼짝도 못하는 사내를 향해 경쾌하게 스트레이트를 한방 먹였다. 퍼억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고 사내는 토혈하며 신음을 내뱉었다.
" 커헉! "
" 어때? 내 주먹 맛이…? "
사내는 뒤로 나빠지는 듯 했지만 믿기힘든 동작으로 낙법하여 나와 거리를 두었다. 틀림없다.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이다.
" 끄하하하! 재밌군 재밌어! 이래서 싸움을 멈출 수가 없어!…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도 의외로 현명한 놈이라 말이지. 이쯤에서 물러나주지. "
" 미친놈… 그보다 젊은 영웅이라니, 무슨 소리야? 그 자식은… "
젊은 영웅이란 키워드에 대해 뭔가 캐내보려했지만 사내는 이미 어딘가 사라지고 없었다. 놈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딘가에 루이스가 존재했다. 아마 방금의 나 처럼 생사를 위협받는 상황일지도 몰랐다. 시급했다. 얼른 그를 찾아봐야했다. 외곽쪽으로 더 발걸음으로 향해 보기로 했다.
" 움… 직여… 빌어먹을… 다리야…. "
예상외로 그는 가까이 있었다. 외상은 없어보였다. 단순히 아사 직전으로 보였다.
" 루이스, 코드명 ICE 전(前) 연합의 최정예요원. 현재 잠정사망 맞지? "
그는 움직일 힘도 없어보였다. 허나 나눠줄 빵 같은거라곤 나에게도 없었다.
" 누가… 사망… 이란거야. 이렇게… 살아… 있는데…. "
" 야야, 여전히 썰렁한 놈이구나. 곧 너도 이제 바닥에 널부러진 쓰레기들 처럼 되어버릴텐데? "
" 젠장…! 젠장…! 너… 정체가… 뭐야…. 안타리우스… 냐…? "
" 에구구, 미안미안! 내가 심했네? 오래간만의 재회인데 괜한 오해까지 받다니. "
그는 중요한 인물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전력과 활력이 될 것이다. 놓칠 수 없다.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그는 깜깜한 길을 밝혀줄 등대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
" 너 그 자체야! 어때? 썩어 문드러진 포트레너드를 구할 성자가 되어보지 않을래? 그랑플람처럼 말이야! "
" 정신나간… 소릴… 입에… 뭐라도… 쳐… 넣어준 뒤에… 말하지…? "
" 흐히히. 그럼 동의한걸로 보고 열 부터 일 까지 천천히 세어볼래? 꽤 편해질거야. "
" ……. "
" 헉! 이봐, 정신 좀 차려봐! 에이씨… 맥주 한잔 들이키고 갈려했더니 안되겠구만! "
아마 이번엔 웨슬리씨도 뭐라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겠지! 아이고 꼬시다! 한방 먹은 그의 표정을 생각하니 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자! 빨리 돌아가서 맥주 한잔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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