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VR기기인 오큘러스 리프트를 구매할 때만 하더라도, 저는 제가 이걸 가지고 운동을 하게 될 지 몰랐습니다. 더 정확히는 이걸 가지고 운동만 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그것도 꽤 강도 높은 운동을.
그러니까 사건의 시작은 지난 겨울. VR 기기를 사고나서 처음엔 놀라움과 탄성에 가득 찬 나날을 보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초기의 흥분이나 호기심은 사라져 가고 서서히 사용 빈도도 줄어들고 있던 그 때. 저는 슬슬 VR기기를 방출할 지 여부를 고민하면서도, 방출 안 할 이유를 찾기 위해 스팀에서 이런저런 VR게임에 구매버튼을 누르고 있었죠. 전 아직도 이 때 쓴 돈이 아깝습니다. 그러다 대단히 인상 깊은 게임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사운드복싱이란 VR 리듬 게임.
게임은 단순합니다. 전형적인 리듬게임입니다. 그리고 룰도 간단하죠. 두가지 색깔의 오브가 나에게로 날아옵니다. 이 오브를 색깔에 맞춰 빨간색이면 오른손으로, 노란색이면 왼손으로 타이밍에 맞춰 격파하면 됩니다.
언뜻보면 리듬게임 치고는 지나치게 심플한 룰입니다. 하지만 VR과 접목되게 되니 돌발적인 시너지가 생겨나 버렸습니다. 리듬게임에 '체력'이란 요소가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겁니다.
체력이 게임의 점수를 결정한다.
이 게임을 제가 스팀에서 구매한 날짜가 작년 12월 31일이었습니다. 추울 때입니다. 그런데 게임을 시작한 지 단지 10분이 지났을까, 어느새 상의는 땀에 잔뜩 젖었고, 호흡이 숨넘어갈 듯 가빠지고, 심박수는 단거리 스퍼트한마냥 올라가고, 팔 근육이 당겨 오고 다리에 힘이 쭉 빠지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고작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완전히 지쳐서 나가 떨어졌습니다. 헤드셋을 벗고 보니 분명 계절은 겨울인데 방안의 풍경은 여름이었죠. 난방을 튼 것도 아니고 음악을 들으며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인데 저와 그래픽카드의 체열로 방 온도가 후끈하게 올라갔고 흐르는 땀 때문에 방의 습도마저 높아져 있었습니다. 점수도 물론 엉망이었습니다. 체력이 안 받쳐주는데 점수가 잘 나올 수가 없었죠. 플레이어의 체력이 게임의 점수를 결정하는 게임을 목격하게 된 겁니다.
처음엔 운동기구 없이 맨몸으로 이렇게 땀을 많이 낼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호흡을 턱밑까지 차오르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어떻게 그냥 좁은 방에서 팔을 휘두르고 있을 뿐인데, 왜 마치 단거리 스퍼트를 한 듯한 느낌까지 받게되는 거지?
이거... 팔로 하는 조깅 아냐?
순간 등줄기가 짜릿한 느낌이 들더군요. 이 게임을 이용해 운동을 하면 굳이 밖에서 미세먼지 마시면서 뛸 필요가 없겠구나. 헬스장까지 귀찮게 안 가도 되겠구나. 그냥 방에서 컴퓨터만 켜고 음악 들으면서 몸 흔들다보면 자연스럽게 운동이 되겠구나. 체지방을 태울 수가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니, 이젠 게임이 게임으로 보이질 않더군요. 이건 운동이구나. 근데 단지 게임처럼 즐길 수가 있을 뿐인 거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틀마다 한 시간에서 두시간씩 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시작했습니다. 운동이라 생각하며 플레이하니, 게임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지더군요. 플레이하는 곡이 내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노트가 잘 찍혀 있으면 열심히 플레이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본 애니메이션 음악에도 몸을 흔들기 시작했죠. 맘에 안 들어도 반복해 듣다 보면 취향이 되어버리는 묘한 상황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운동이 벌써 5개월 넘게 꾸준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실 바로 그 부분이 어이가 없습니다. 왜냐면 전 그 5개월간 운동을 하기 위해 별다른 의지력을 발휘한 적이 없거든요.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의지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어지다.
남들이 운동을 꾸준히 하기 위해 귀찮음을 극복할 의지력을 발휘해야 할 때, 저는 그저 게임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그대로 따르면 되었던 겁니다. 의지력이란 게 필요하질 않았습니다. 그냥 게임을 켜면 되었습니다. 아, 이게 건강을 날로 먹는 기분인가... 게다가 남들이 체지방을 빼기 위해 런닝머신에서 힘든 걸 꾹 참으며 지루하게 달려야 할 때, 저는 그냥 음악을 즐기면서 날아오는 오브를 두들겨 패면 되었습니다. 스트레스가 팍팍 풀렸습니다. 게임 도중 힘들어서 더이상 다리나 팔을 움직이기가 힘들다 여겨질 때도, 게임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어내겠다는 욕심 하나면, 곡이 끝날 때까지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게 느껴지더군요.
첫째, 혈압
작년까지 제 혈압은 높은 편이었습니다. 고혈압 환자 수준은 아니지만, 위험군에 올라 있었죠.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130 / 90 이상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헌혈을 하러 헌혈의 집에 갔는데 혈압이 높다고 안 된다고 해서, 시간을 두고 여러 번 혈압을 재서 겨우 오케이 받은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운동을 한지 3개월이 되던 올해 3월 중순 경, 옴론 가정용 혈압계를 집에 구비해 놓은 참에 측정을 해보니 혈압이 완전히 정상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수축기혈압은 110~123, 이완기혈압은 57~76 사이로 나왔습니다. 가정용 혈압계의 경우 측정치가 낮게 나오는 경우가 있다 하여, 보건소에 가서 재어보니 여전히 아래혈압이 67이었습니다. 고혈압의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의 경우엔 꾸준한 운동으로 치료가 가능한 경우였던 거였죠. 사실 혈압 생각하면서 운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던지라, 뭔가 길가다 공돈을 주은 느낌이었습니다. 점유물 이탈죄를 조심합시다.
둘째, 입맛 과거엔 배달음식을 주문해 먹을 경우 꼭 콜라와 함께 먹었습니다. 가끔은 마트에서 콜라를 사 와서 냉장고에 넣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콜라를 아예 안 먹습니다. 운동 시작한 지 4개월이 지났을 때 벌어진 일입니다. 이게 저에게 신기한 이유는, 탄산음료를 안 먹겠다고 강하게 절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어느 순간 콜라에 감흥이 없어졌습니다. 조각케익도 더이상 안 끌리고요. 당류가 당기질 않더군요.
콜라가 왜 맛이 없지?
너무 신기해서 원인을 생각해 봤는데, 운동으로 인해 혈당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어 탄수화물 중독증상이 사라진 게 아닐까 싶더군요. 그리고 이 게임을 하다 보면 수분 손실이 크다 보니 게임 도중이든 게임이 끝나고 나서든 미지근한 생수를 방에 여러 병 가져다 두고 시시때때로 엄청 마셨는데 거기에 익숙해져서인지 뭔가가 목에 넘어갈 때 차가웠으면 좋겠다거나, 톡 쏘는 듯한 시원함이 느껴졌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욕구가 사라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여하튼 요즘엔 치킨이나 피자를 먹을 때 콜라와 먹나 생수와 먹나 별 차이가 안 느껴져서, 그럴 거면 굳이 콜라 먹을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으로 아예 안 먹게 된 게 벌써 2개월이 넘었네요.
셋째, 근력운동과의 시너지 사실 운동이란 건, '자, 이제 운동을 해야지!'라고 실행에 옮기는 그 순간이 힘들 뿐, 일단 시작하고 나면 목표로 한 루틴은 다 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근력운동을 하기가 참 쉽습니다. 사운드복싱을 하며 이왕 땀 낸 거 씻기 전에 근력운동도 마저 하게 되더군요. 물론 방에서 할 수 있는 맨몸 운동들(스쾃, 푸시업, 트위스트 크런치)만 횟수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재밌는 점은, 맨몸 근력운동을 하면 그 효과를 게임에서 체감할 수 있다는 겁니다. 특히 맨몸 운동으로 스쾃을 하면 게임을 할 때 다리 움직임이 엄청 가벼워진 것을 느낍니다. 이는 곧바로 게임 점수의 상승으로 증명되더군요. 그래서 근력운동하는 맛이 납니다.
넷째, 리듬감 제가 춤을 잘 못 추는 편이라, 몸을 리듬에 맞춰 흔드는 게 좀 어색하기도 하고 때론 엇박을 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을 하며 정박자로 날아오는 오브들을 꾸준히 때리다 보니, 조금씩 리듬감이 몸뚱어리에 달라붙는 것을 느낍니다. 하기사 꾸준히 5개월 이상 음악을 들으며 몸을 움직였는데, 아무리 신경이 발달하지 않고 싶어도 그 정도면 발달할 수밖에 없었겠죠.
하기사 서당개도 삼년이면.....
몸뚱아리가 이제서야 리듬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물론 여전히 춤을 잘 추게 된 것은 아닙니다만...
하지만 이 게임을 하며 꼭 알아야 할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부상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제가 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하는 조언이겠죠?
자나 깨나 부상 조심
첫째, 무릎 조심 바닥에 6mm 정도의 얇은 요가매트처럼 푹신한 것을 깔고 게임을 해야 합니다. VR로 하는 운동의 경우 집에서 플레이하기 때문에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플레이하게 됩니다. 이로인해 완충해줄 수 있는 쿠션이 없어, 딱딱한 바닥에서 맨발로 플레이할 경우 무릎에 충격이 누적될 수 있습니다. 둘째, 팔꿈치/어깨 조심 근육량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도 높은 운동을 장시간 지속할 경우, 이는 인대나 관절에 큰 부담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맨몸 근력운동을 병행하시는 게 좋습니다. 또한 40분에서 한 시간 정도 플레이하는 것이 적당한 것 같습니다. 셋째, 자세 조심 날아오는 오브를 때릴 때, 투수가 공을 던지듯이 / 테니스 선수가 라켓을 휘두르듯 / 도끼로 장작을 내려찍듯 팔을 휘두르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 팔꿈치에 수직 방향으로 힘이 가해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팔꿈치 관절에 부담이 커집니다. 운동을 한 달 하고 말 게 아니라 평생 할 거라면 자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야구 선수가 팔꿈치가 소모재이듯, 테니스 선수가 테니스엘보로 고생하듯 건강하려고 운동을 하다가 오히려 부상을 달고 살 수가 있으니까요. 개인적인 생각으로 추천드리기로는, 복싱선수가 스트레이트나 잽을 하듯이 수평으로 오브를 치는 것이 팔꿈치에 부담을 덜 주면서도 장시간 플레이할 수 있다고 봅니다. 넷째, 다리를 많이 움직일수록 부상 위험이 하락 이 게임을 팔로만 플레이할 경우, 연속된 오브 사이의 간격이 넓을수록 팔을 큰 동작으로 휘두르게 되고, 또한 팔이 움직이는 속도도 다급해지면서 팔꿈치와 어깨에 부담이 커지게 됩니다. 또한 높은 곳에서 날아오는 오브를 내려치는 동작은, 일상에서 흔히 존재하는 동작이 아니기 때문에 어깨 부상을 입을 확률이 올라갑니다. 즉 오브와 오브 사이의 거리를 팔로 좁히기보다는 다리 움직임으로 좁히는 것이 좋고 높게 날아오는 오브는 작은 점프로 해결하는 습관을 들이면 부상의 위험이 대단히 낮아집니다. 아래 영상처럼 다리 움직임을 늘이면 운동 효과도 늘어나고, 게임도 더 신나게 느껴질뿐더러 스쾃이나 린지 효과도 누릴 수 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게임의 장점은, 유튜브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곡으로든 플레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론 비트가 빠른 곡이 아니면 노트를 아무리 잘 찍어도 루즈해지기 쉽고, 이로인해 BPM이 빠른 나이트코어류 음악이나, 일본 애니메이션 음악 등이 강세를 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BPM이 빨라야... 노트가 잘 찍혀야...
또한 유저들이 노트를 찍어서 공유하는 방식이고, 노트를 잘 찍는 유저들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곡마다 재미의 편차가 심하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게임이 출시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플레이하기 좋게 노트가 잘 찍힌 곡들이 꾸준히 쌓여왔기 때문에 운동 목적으로 플레이하기엔 아주 큰 문제가 되진 않다고 봅니다. 곡 하나가 3~5분 길이이니, 즐겨찾기 해놓은 곡이 20개만 돼도 한 번씩 쭉 플레이하는데만 80분이 넘게 걸리니까요.
그리고 아무래도 양팔이라는 두가지 버튼(?) 이용해서 플레이하는 게임이다보니,
여러개의 손가락을 사용해야 하는 2D 리듬게임에 비해 패턴이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 입체적 공간을 사용하고, 일정 이상의 펀치력으로 쳐야만 점수가 높게 나오기 때문에
체력적인 난이도가 위의 단점을 상쇄합니다.
그러니 게임이라 생각하며 접근하기 보다는, 운동이라 생각하며 접근하는 관점이 중요한 듯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게임은 출시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개발사 측에서 꾸준히 게임을 업데이트하며 UI나 기능 등을 보정하고 있더군요. 보통 VR게임의 경우 출시 이후엔 업데이트 없이 그대로 방치하며 다른 신작 개발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게임은 바로 이틀전까지도 업데이트를 하고 차기 업데이트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업데이트도 업데이트지만, 게이머들도 육체적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걸 가장 크게 느끼는 게, 올해 1/4분기에 만들어진 노트들과, 2/4분기에 만들어진 노트 사이엔 큰 격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곡일수록 난이도가 높고 패턴도 다양하고 강인한 체력이 요구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만큼 유저들의 체력이 점차 강력해지고 있다는 것이죠;
이 게임은 노트를 찍을 때도 직접 몸으로 움직이며 찍어야 해서 대단히 힘든데,
플레이하다보면 이 노트는 도대체 무슨 미친 체력으로 찍었지? 싶은게 종종 보이더군요.
여하튼... 다들 잘 알다시피 운동 초보자가 아무리 애를 써도 3개월만에 몸짱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죠. 실제로 대단한 몸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3년 이상 꾸준한 노력으로 빚어낸 몸이니까요.
운동을 꾸준히 1년 했을때, 2년 했을때, 3년 했을때 몸이 다 다르죠.
그래서 저도 별다른 욕심은 부리지 않고 장기적으로 바라보며 게임을 즐기고 있습니다.
운동 시작하고 첫 3~6개월은 기초적인 근육과 신경이 발달하는 기간이라고 하는데,
어영부영 그 시기가 게임을 하며 지나가고 있는 것 같네요.
뭔가 날로 먹는 듯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운동을 꾸준히 한다는게 이렇게 쉬울 수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