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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 아침은 항상 분주했다. 학교가 집 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늘 늦잠을 잤다. 부모님도 일 준비로 바쁘셔서 아침식사 후 가족들은 각자 흩어지기 바빴다. 때문에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속옷과 양말을 스스로 선택했고, 입고 신는 주기도 내 멋대로였다. 엄마에게 걸리지만 않으면 양말 하나로 일주일을 보내기도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양말을 갈아 신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축구하다 신발에 모래가 들어갔을 때나 비 오는 날을 제외하면 늘 무신경했다. 발냄새가 진동했던 기억도 없고 위생적이지 않다는 생각도 없었다. 어린 나는 "양말은 며칠씩 신어도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첫 극기훈련을 갔을 때다. 둘째 날 아침, 엄마가 챙겨준 양말이 가방 속에 있었지만 꺼내기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전날 신었던 양말을 신었다. 그런 나를 보고 한 친구가 "어제 신은 양말 또 신어?"라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게 그렇게 큰일 날일 인가?"라는 표정으로 친구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친구는 "아니 어떻게 양말을 이틀이나 신어? 설마 팬티도 안 갈아입어?"라며 나를 비 오는 날 운동장 지렁이 취급을 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늘 해오던 방식이었고, 12년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문제가 없었다. 나는 엄지발가락을 친구 콧구멍으로 들이대며 "깔끔한 척 좀 하지 마"라며 반박했다.
양말을 비롯한 위생상태에 현재 내가 느끼고 있는 수치는 이렇다. 머리 감기는 하루 한 번. 샤워는 1회에서 2회. 양말과 속옷은 하루에서 이틀. 양치는 하루 2회 이상. 대략 이 정도 틀에서 벗어나면 지저분하거나 게으르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기준'이라는 것을 어디에서 가져왔을까. 내가 제시한 수치에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는 보장도 없다. 학습으로 깨운 친 것도 아니다. 나는 이런 성질을 객관적 가치관이라 부른다.
굳이 객관적 가치관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가치관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부모보다 자식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성장환경, 부모의 교육, 자식에 대한 애정 등 많은 요소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의 삶을 통틀어 만들어졌기 때문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 주변에 자식보다 부모를 소중하다 말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양말 신기는 다르다. 양말을 일주일 동안 신는 가치관은 환경에 따라 쉽게 변한다. 극기훈련 사건이 있은 후 친구들에게 양말을 며칠씩 신냐고 물었다. TV 드라마에서 양말을 갈아 신지 않은 주인공은 지저분하게 묘사된다는 것도 알았다. 엄마에게는 당연히 한소리 들었다. 거의 모든 객관적 사실이 내가 틀렸다고 알려주었고, 나의 양말 신기 가치관은 쉽게 바뀌었다.
몇 해 전 조금 다른 유형의 가치관 차이를 경험했다. "중국집에서 배달 온 자장면을 먹고 그릇을 씻어서 내놓아야 한다"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그것이 기본적인 매너라 주장했다. 먹다 남은 음식물을 그대로 내놓는 나는 매너가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였다. 이 이야기는 생각보다 다른 목소리가 많았다. 지불한 금액에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이 포함되었다 주장하는 친구, 설거지 값 환불받아야 한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릇을 내놓을 장소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거나 계절이 여름일 때만 씻어주는 게 맞는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차이는 백날 상대방 입장이 되어봐야 똑같은 답만 되풀이할 뿐이다. 사실 입장이라는 것 자체도 이미 같은 조건에 놓여있다. 바꿔서 생각하려 해도 바꿀 것이 없다. 다시 말해 객관적 지표가 뒤죽박죽인 가치관이다. 이런 부분은 수정이 아닌 '인정'이 필요하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라는 말은 분명 좋은 표현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입장 바꿔 생각해봐야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그리고 입장을 바꾼다고 모든 갈등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 입장을 아무리 풍부하게 상상하더라도 타인이 될 수는 없다. 나와 타인의 상황을 바꾸어 보더라도, 그곳에 있는 가치관은 여전히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가치관을 수정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렇다고 꼭 수정할 필요는 없다. 해당 가치관을 유심히 살펴본 후, 그것이 위에서 언급한 '객관적 가치관'인지, 절대 바꿀 수 없는 인생 가치관인지 구분해야 한다. 또는 자장면 이야기처럼 이해가 아닌 인정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이 작업이 서투르면 귀가 얇다거나 줏대가 없다는 소리를 들을 확률이 높다.
상반된 가치관을 동시에 지닐 수 있는 다중인격이 아니라면, 모두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자신의 가치관에 역행하며 발생하는 통증이 아닐까. 어쩌면 타인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자신의 가치관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 자신을 알라" 어디에 갖다 붙여도 어울리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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