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사는 교포입니다.
오늘 출근을 해서 메일을 살펴보니 평소보다 3배 정도의 메일이 도착해 있더군요.
전화 메세지도 많이 남겨져 있고.
제가 사는 곳은 눈이 제법 많이 오는 곳인데, 회사가 있는 주는 살고 있는 주 보다는 덜하지만 눈이 많이 오긴 합니다.
특히 금년 겨울은 눈이 많이 와서 출근을 하지 못한 날이 제법 되는데, 지난주 금요일 새벽에도 눈이 많이 쏟아져 출근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월요일인 오늘 출근을 했더니 금요일부터 도착하기 시작한 메일과 전화메세지가 쌓여있던 겁니다.
그런데,
그중 3분의 2가 업무와는 상관없는 메일과 전화였습니다.
대부분 메일의 제목이 아래와 같았습니다.
Congratulations !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하고 열어보니 모두 연아의 금메달을 축하한다는 내용이더군요.
내용은 대부분 우리가 외신을 통해 알고 있는 정도의 찬사라고 보면 됩니다.
뻑갔다, 보다가 가슴터져 죽는줄 알았다, 싸인을 얻을 방법이 없느냐 (나도 못구하고 꿈도 못꾸는걸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로 부탁하다니.....) 메일주소를 알려줄수 있느냐 등등....
제 기분이 어땠을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들 하실 겁니다.
직장이 있는곳은 피겨스케이트 전통이 강한 주입니다.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 키미 마이스너가 삽니다.
아, 언젠가 한국의 남자피겨선수와 같이 올림픽에 나가게 해달라며 한국국적을 원하던 미국의 여자피겨스케이터도 그곳 출신입니다.
또한 연아양 팬들 사이에서는 \\\\'레온옹, 레온 할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연아양 광팬 미국인 할아버지도 멀지 않은 곳에 사십니다.
미국의 역대 스케이트들 중에 적지않은 선수가 그곳 출신이라 일반인들의 피겨에 대한 관심은 지대 합니다.
그동안 연아양의 이름이 조금씩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녀에 대해 물어오는 직원들이 간간히 있고 제게서 동영상을 얻어간 직원들도 좀 됩니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은 김연아라는 이름을 미국인들의 뇌리속에 똑똑히 각인시키는데 정말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대동소이한 내용의 메일을 대충 읽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전화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여기저기 별로 잘 알지도 못하던 미국인 직원들에게서 축하전화가 걸려오더군요.
그런데 대부분 여직원들인건, 한국의 연아피버와는 조금 다르게 미국은 여성들이 피겨에 관심이 많기 때문일겁니다.
전화도 받고 메일도 읽고 신문에 난 연아양에 관한 기사도 열심히 읽고 있던 도중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툭 쳤습니다.
무심결에 돌아다 보니,
허걱~!
제가 일하고 있는 계열사에서 최고높은 사장님 (여자 사장님 )이 별로 아름답지 않은 미소를 머금고 서계시더군요.
하필이면 신문기사 읽고 있을때 방문을 받아 심장마비 걸리는줄 알았습니다.
지난주에 연아양의 프리경기를 보고 감동을 엄청 받았다는 둥, 그렇게 아름다운 피겨선수를 둬서 한국인으로서 좋겠다는 둥, 자기는 패기플래밍 과 바트리나 비트가 최고인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 훌륭한 선수가 나타난것 같아 피견팬으로써 기뻤다는 등등,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며 특유의 썩소를 날리셨지만, 전 등줄기에서 땀이나 죽는줄 알았습니다.
그게 어떤 상황이든 제일 높은 상사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는건 편한일이 아닙니다.
사장님이 떠나자 여왕 ( 제가 일하는 계열사에서는 그분을 다들 그렇게 부릅니다 ^^;)님의 개인적인 방문을 받은것에 대해 다른 직원들의 부러움에 찬 눈빛공격이 시작되어 방어하느라 잠시 정신줄 놓을뻔 했습니다.
허나 연아양 덕분에 깐깐하고 날카롭기로 유명한 사장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수 있었기에 기분은 좋았다고 말할수 있을것 같군요.
점심시간에 몇몇 여자직원들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안면도 있고 업무상 교류가 있던 여자직원들인데 대뜸 오늘 점심같이 먹으러 가자는 겁니다.
뭐 미국인들이야 직장에서 남녀구분 안하니까 그게 문제될건 없어도, 이렇게 갑작스레 점심초대를 받는게 흔하지 않은 일이라 잠시 당황했습니다만 선약도 없는데 못간다고 하기도 그래서 좋다 말하고 같이 나서려니 그중의 한 여자직원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 회사 근처 어딘가에 한국식당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리로 가볼까 ? "
어.....갑자기 왜 한국식당.........
멀기도 하지만 말만 한국식당이지 음식맛이 형편없어서 저도 잘 가지 않는데 일부러 한국식당을 찾는 직원들의 청을 거절할수 없어 그곳으로 갔습니다.
식당에 도착하자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일일히 조언을 구해 귀찮아 죽겠지만 미국인들이 좋아할만한 ( 대부분 불고기를 맛보면 불평은 않합니다 ) 점심용으로 특화된 음식을 주문하고 나니 곧바고 연아양 이야기와 죠애니로셋 이야기를 시작하더군요.
NBC방송국 덕분에 연아양에 대해 대충 알고 있는것 같았고 그녀의 스케이트에 감동 받았다는 것과 그렇게 뛰어난 선수가 미국에서 안나오고 한국에서 나와 조금 질투도 나더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직원의 말이 저를 무척 고무시켰습니다.
그녀의 말인 즉슨,
" 스캇 해밀턴이 그렇게 흥분하며 중계하는걸 본적도 없고, 대담프로에 나와 그렇게 어떤 선수를 거의 찬양수준으로 칭찬하는걸 보지 못했다. 스캇이 그리 호락호락 하거나 가벼운 사람이 절대 아닌데 그사람이 거의 경배하는 수준으로 칭찬하는걸 보고 엄청 놀랐다 "
듣고 보니 공감이 됐습니다.
저도 연아양이 나타날때까지 스캇옹이 그렇게 칭찬하는 걸 본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게다가 이런말까지 그 직원은 했습니다.
" 쇼트가 끝나고 스캇이 연아양의 슬로우비디오를 보면서 한말중에, 그녀가 모든 점수(full credit)를 받게하기 위해서 슬로우모션으로 다시 보면서 평가를 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점프 하나하나를 아주 자세히 집어내며 그 정확함과 뛰어남을 설명해 가던데, 나는 그장면을 보면서 , 피겨스케이팅 세계에서는 무명의 나라에서 온 이 여자 스케이터가 심판들에게 불이익을 당하게 하지 않기위해 스캇이 진정으로 애쓰고 있구나 라고 느꼈다." 라고 말입니다.
그말을 듣는순간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저도 생각하지 못했고 한국의 신문에서도 읽지 못했던 내용인데, 수차례 돌려본 쇼트동영상속 스캇옹의 해설이 떠오르며, 그직원이 느낌이 맞던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갑자기 밀려오는 감동과 스캇옹에 대한 감사......
기분이 업되는건 물론이었고 연아양에 대한 칭찬과 그녀의 금메달에 대한 축하를 받으니 한국남자 특유의 치기가 발동해 오늘 점심값은 내가 낸다라는 말을 뱉고 말았습니다........
미국에서 4인분 점심값을 혼자내는건 조금 코피터지는 일인데 말을 뱉었으니 물릴수도 없어 결국 점심값을 냈습니다만, 억울한 생각이 들지 않았던건 저 또한 연아양의 승리에 대해 너무도 기쁜마음이 들어서일 겁니다.
참고로, 미국인들 중에는 죠애니 로셋에게 동메달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꽤 됩니다. 모친을 잃은 동정표가 몰려 미라이 나가수의 실력이 더 나음에도 불구하고 동메달을 빼앗긴거라 생각해서 인터넷 상에 캐나다인들과 미국인들 사이의 설전이 시상식 직후 한동안 뜨거웠습니다. 점심을 같이한 여자직원들중 몇몇도 그리 생각하고 있더군요.
어디나 모두 자기나라 선수가 근소한 차이로 지면 억울하다 생각하는건 만국공통입니다.
총점이 10점이상 차이가 나는건 근소한 차이가 아닌데.....
그후 퇴근할때까지 다른 직원들에게서 축하메일과 전화를 받느라 오늘 하루는 업무에 집중할수가 없었죠. ( 솔직히 연아양 소식 찾아 인터넷을 헤메이느라 땡땡이친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눈이 조금 사팔뜨기...)
그중 은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할머니 직원이 보낸 메일중에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말이 있어 그말을 이곳에 옮기며 긴글을 마감하겠습니다.
" I felt like Grace Kelly had come back to ice rink " ( 그레이스 켈리 -미국인들이 아직도 좋아하는 작고한 영화배우이자 모나코 공국의 왕비.오드리햅번과 더불어 우아함의 대명사- 가 빙판위로 돌아온것 같다고 느꼈어 )
저 오늘 입찢어졌습니다.
그래서 연아양이 더욱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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