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이천칠년 팔월 십오일.
병역의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영문 밖으로 나갔다.
못난 식충이를 테이크아웃 한다고 가게도 닫아두고
부대까지 마중나온 어머니의 차를 타고 그토록 바라던 집까지
신나게 시속 120km로 집까지 달려나갔다.
칼각 잡힌 군복은 전역에도 기가 죽지 않았고
사단장 지침으로 인해 어딜 가든지 쪽팔림 지수를 +20 해주는
5미리 바리깡으로 사방팔방 밀린 머리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면 뭘 먹을지, 어떤 친구놈을 골탕먹이러 면회를 갈지
(전역하던 시점에 친구들은 모두 부대에 있었다.)
패기로운 생각을 하던 찰나.
이천 휴게소에서 밀린 니코틴 충전도 하고
주머니에 간지나게 손도 넣어볼 생각으로 정차를 했다.
생각해보니
전역하기 한두달 전 즈음인가부터 소녀시대가 등장해서
'다시만난 세계' 뮤직비디오를 매일 아침 점심 저녁마다 듣곤 했는데
당시 군바리 답지 않게 걸그룹보다는 넬이나 이승환을 빨고 있던 나로썬
'노래는 괜찮은데 그룹 네이밍 센스가 천상지희 다음으로 그로테스크한 걸그룹'
이라고 매우 정직하게 생각했던듯 싶다.
이천휴게소에 내리자마자 매점에 들려 당분이나 채우려
칸쵸를 막 집어들었는데, 한무리의 여자애들이 꺅꺅 대면서 오고 있었다.
뭔 애들이 이래 시끄럽대? 하며 고개를 드는데
정말 표현의 가감을 제외하더라도 '후광이 비치는. 그야 말로 빛나는'
그런 애들이 오는 것이었다. 그게 소녀시대였다.
한창 신인일 무렵이어서 그런지,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고
싸인해 달라는 사람도 없어서 꽤나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군필자라면 당연히 알겠지만 걸그룹을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하루종일 틀어져 있는 엠넷때문에 어떤 걸그룹이 있는지, 어떤 걸그룹이 가장 예쁜지,
멤버는 몇명인지, 요새 힛한 노래는 뭐가 있는지 정도를 모르는 군바리가 있다면
그 녀석은 필경, 예수와 부처 사이에서 장기를 둘 수 있을만큼의 성자일 가능성이 높다.
수컷으로 태어나 폐쇄된 환경에서 굶주리다 보면 어쩔수 없이 늘어나는 본능이고
'넬'의 팬을 해도 남중 남고 군대 테크를 착실하게 밟아온 나의 억눌린 본능은
걸그룹에 눈길이 자연스레 가도록 유도하니까.
여튼. 소시 멤버들이 우르르 매점으로 와서 주전부리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티파니와 태연이 옆에서 초코송이를 고르는데.
와 진짜 윌-오-위습이 다가오는줄 알았다.
좀 더 회상해보면 막 휘황찬란한 빛이 다가와서
과자를 낚아채는 그런 기억인데.
매니저에게 '오빠 나 이거 사도 되요?'라고 물어보는 그 말을 듣자 마자
'내... 내가 사줄께! 내가!!! 아니 바치겠습니다!'하고 싶을 정도였다.
허나, 처참한 나의 '이 사람은 갓 전역한 군바리입니다' 스러운 몰골로는
싸인을 해 달란 말을 걸 용기와 패기조차 오그라 들어서 말 할수가 없었다.
사단장. 사단장은 주적입니다.
집에 돌아가자 마자, 선배들한테 전화해서
전역했으니 술이나 당장 내놓으세요 라는 말 보다 소녀시대를 봤다고 흥분된 목소리로 이야기 했지만,
다들 '소녀시대가 뭐냐?', '뭔 듣보냐'하면서 극히 일반인 스러운 말들을 하는 통에 묻혀 버렸고.
나 스스로도 술과 술로 연속되는 사회화 과정에서 기억이 잊혀졌었다.
문득, 오늘도 하루 세번 러블리즈 MV를 로테이션으로 쭉 보다가
영상에서도 환하게 비치는 케느님의 후광을 보면서 그 때가 떠오르더라.
그래서 끄적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