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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死
# 00. Prologue
죽어야 하는 자에게 살(殺)은 정당했으며 죽어야 하는자에게 생(生)은 그저 참혹함의 연속 일 뿐이였다.
- 위대한 장군 웨슬리(Wesley)
200년전 달의 군세가 만 하룻동안 전 세계적으로 낮을 비춰주는 해를 대신하였다. 이례적인 현상으로 전 세계는 긴장하였고 누군가는 세계가 멸망할 징조라며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불안과 절망 속에서도 별 다른 사건 사고 없이 하루는 지나갔고 그렇게 거대일식이라고 불리우는 현상은 끝이났다. 사람들은 모두 안도하였지만 언제부턴가 일식이 남기고 간 씨앗이 싹을 트기 시작하였다.
그렇다. 물리적인 법칙을 무시하는 자들, 그들은 핍박과 억압속에서 인간쓰레기(Cypher)라 불리였다. 흔히 전설이나 설화속에서 등장하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자들, 그런 자들이 하나 둘 씩 나타나자 사람들은 경외심 반, 두려움 반으로 그들을 배척하고 억압하며 삶의 낭떠러지로 그들을 몰아갔다. 마치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이 다시 재림하는 듯 보였다.
이러한 행동에 반하여 위대한 길을 걷는 자 그랑플람은 반 어빌리터 세력에 대항하여 능력자의 인권을 살리기 위해 발 벗고 뛰었고 그의 의지가 세상 곳곳에 퍼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현재 헬리오스의 회장 명왕 헨리밀러가 인권 운동에 힘을 쓰자 반 능력자들의 세력들과 그들의 중심인 영국 또한 여태까지의 사이퍼들의 대한 태도를 바꾸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인게 헨리 밀러 3세가 일구어 놓은 '베른 비밀조약'이 있다!)
이후 그랑플람은 사이퍼 사이에서 성자로 추앙받게 되었고 그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혁명을 겸손히 낮추었고 그는 우드시티의 중심. 현재지명으로 말하자면 포트레너드 코어레너드 중앙 분수대 광장에서 영롱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 이 곳에 곧 우리의 의지가 뿌리 내리라니, 곧 새싹이 틔고 열매를 맺으며 다시 보이지 않는 씨앗을 흩뿌려 세상 끝까지 뻗어나갈테지. "
그렇게 그는 다시 누구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미지의 땅을 찾아 다시 바다로 떠났고 포트레너드 세계수의 힘으로 포트레너드 서쪽엔 태림(太林) 디미스트가 생겨났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현재, 포트레너드는 마피아 조직으로 이루어진 연합과 그랑플람의 숭고한 길의 의지를 이어받은 헬리오스의 대립으로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연합과 헬리오스, 서로에게 합의점은 찾아볼 수 없었고, 결국 계속되는 전쟁으로 포트레너드는 음지와 양지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生死
# 01. City of worldtree
포트레너드 사방의 실루엣은 온통 처참한 몰골들 뿐이였다.
악귀같은 화염과 화약으로 주저앉아버린 중앙광장의 높은 분수대는 화약의 검은 재가 잔뜩 섞여 검게 흐려댔고 우뚝 솟아 대지를 관망하던 세계수 스타우드는 먹빛을 내뿜어 거의 반쯤 죽은 듯 한지 오래였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 사이퍼란 자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모여 이룬 지하조직(Mafia) '유니온'과 '헬리오스' 이렇게 두 집단의 대립과 갈등이 점점 고조되어 포트레너드를 무대로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였다.
너른 거리의 풍경은 그런 모양새였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화염에 그슬린 나무들과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승용차나 양철박스 깡통들, 한낱 모래성마냥 무너져내린 고층 빌딩들의 잔해. 아니, 무덤이라고 하는게 옳겠군. 소리조차 찢겨져 음산한 광경에 적막이 흘러댔다. 내심 바라던 결과였지만 과정은 결코 그러하지 못했다.
그렇게 포트레너드 동쪽에 위치한 디시카 로드(Dicika road)는 한바탕 사이퍼와 노말의 비명이 들 끓었지만 툭 끊어지듯 갑작스럽게 멈췄다. 비명소리가 멈춘 디시카는 초연하기만 했다. 먹먹한 귀가엔 타라, 그 불여우가 내뿜는 파멸의 잔향이 아직 남아있었지만 시야에 포착되는 죽음 그 자체들의 표식들은 애써 모른 척 무시하기도 힘이 들었다. 시간은 오후 11시를 가르켰지만 낮인지 밤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화염의 매캐한 검은 연기로 교전전 분명히 푸르렀을 하늘을 까맣게 흐렸고 화약이 내뿜는 섬광덕에 별빛이나 가로등 없이도 어둡진 않았으니 말이다.
교전이 오랫동안 계속되자 이 아수라장에서도 생명의 몸부림들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검정색으로 까맣게 물들어버린 시체들의 흔적만이 남아있어 오한이 들었다. 저 멀리 헬리오스 소유의 건물들이 괜시리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난 서둘러 그곳을 피해야만 했다. 언제 어디서 헨리 밀러의 황금빛 낙뢰가 언제 내 머릿속에 꽂힐지 몰랐으니 말이다.
생명이 없는 거리는 죽을만큼이나 조용했다. 핏빛 불꽃을 뿜어내는 위대한 모험가 그랑플람의 도앙은 두 다리가 동강나 안쓰러워 보였다. 이 상황에 갑갑하리만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시야는 자꾸 분산되고 자주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등줄기에 흐르는 고드름같은 소름은 오싹했고 오감을 일깨우게 만드는 소리 조차 없는 도시의 정적은 공포에 미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정적은 분명히 태평한 평화의 정적은 절대 아니였다. 살풍과 파괴가 흽쓸고 간 멸망이 도사린 서늘하고 절망스런 정적이였다.
" 젠장, 바람조차 불지 않는데 펄럭이는 깃발이라니. 우릴 너무 얕보고 있는 거 아냐? "
마치 편집된 영상처럼 가벼이 펄럭이는 연합의 표식이 새겨진 깃발은 새심 낯설어 눈에 거슬렸다. 누구를 위한 깃발인지 폐허속에서도 온전히 맑게 선명했다. 꽤나 허튼 솜씨. 전쟁에선 저런 소소한 것 또한 승패를 좌우한다. 하지만 저것 조차 의도된 것일지도 몰랐다. 식은땀이 흘렀다.
" 그나저나 왜 이렇게 조용한거야? "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당치도 않는 그야말로 농담같은 침묵이였다. 전쟁터는 오감이 전부 으스러질 정도로 시끄러워져야 옳았다. 어느 한 쪽의 전멸이 아니라면 멈추어선 안되는 그러한 교전이였다.
" 움직이면 위험합니다. 현 위치를 지켜주세요. "
통신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엔 날이 선 긴장감이 돌았다. 우리 연합측에서 고용한 정찰대원들 중 한 명 이였다. 그 역시 이 낯선 고요가 갑작스러웠을 것이 분명하였다.
" 역시 만만치 않은 놈들이야. 망할. "
통신기를 울리는 또 다른 목소리에도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위대한 모험가 그랑플람의 동상 잔해 근처에서 매복하던 저격수였다.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그들의 목소리가 나철고 멀게 느껴졌다.
" 숫자가 적어서 쉽게 봤는데… 보통 놈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
정찰대원의 맞장구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 어디에 숨어있는거지? 설마 비겁하게 도망이라도 간 건 아니겠지? "
그럴리는 전혀 없었다. 어느 누가 겁먹고 숨어있는 적들이 두려워 퇴각을 하겠는가? 더군다나 그들은 몇번씩이나 사선을 넘나들은 최상급 크라운(Crown)급의 사이퍼였다. 죽음이 두려워 머뭇거릴리는 없었다. 분명 철저히 숨어서 허를 찌를 게 분명했다.
" 휴식을 취할 요령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긴장을 늦추지 마십시요. 자칫하면 우리까지 위험해집니다. "
저격수와 정찰대원의 의문에 불안의 기색이 짙었다. 당연했다. 무거운 불길함이 뇌리에 스쳤다.놈들의 전술이 매우 낮설었다. 작전상 후퇴나 전술적 휴전은 흔한 일은 절대로 아니였다. 더욱이 놈들이 보여준 능력과 파괴력이라면 굳이 멈출 필요없이 우리를 찾아내 서슬퍼런 칼날로 우리의 목을 그어버리면 되는 것이였다. 그들은 우리 연합의 일원들을 가볍게 제친 녀석들이였다.
" 공포심을 노리는 걸까요? "
그렇다면 당치 않은 갑작스러운 고요는 참혹한 종말을 부르는 불길한 침묵일 것이 분명하였다. 방심의 유혹 뒤에서는 날이 잘든 칼과 잘 정비된 총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듯이 기습할 것이 분명했다. 무서워 할 필요는 없었다. 전쟁은 그래야 옳았다. 그래야만 승리했다. 살육의 무대위에서 주저하는 모습은 필요없는 감상일 뿐이였다. 목숨따위는 저 펄럭이는 깃발보다 못하는 것이 전쟁이였다.
" 쉽게 이길줄 알았는데……! "
정찰대원의 말대로 처음엔 분명 압승을 장담했다. 우리는단순히 사이퍼의 특수한 능력만을 믿고 설쳤던 것은 아니였다. 우리의 아군은 나름대로 이러한 일에 잔뼈가 굵은 이들도 많았다. 특기와 재능을 살려 각자의 능력을 십분 활용 할 수 있었고 실제론 처음엔 그러했다. 게다가 적들의 화력은 빈약했다. 재생이 고작인 최하급 능력자와 그를 지키는 대다수의 노말 용기사 용병들 뿐이였으니깐 말이다. 다행히도 검룡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거대한 마상창과는 두번 다시 맞대고 싶지 않았다.
적군의 화력을 간파한 아군은 각개 한 돌격대형으로 총공세를 퍼부었다. 우리의 유능한 참모 토니는 함정일 수 있으니 조심하라 하였지만 사실 난 그의 조언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실책이였고 오만함이였다. 처음 전세에는 월등히 우리가 우수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화력과 공세는 죽음의 신이 휘두르는 거대한 낫 처럼 날카롭고 치명적이였다. 검은 하늘이 온통 붉은 사선과 섬광들로 번쩍였다. 그러나 결과는 치명적인 패배. 앨리셔 캘런, 우리의 눈을 멀게하는 섬광의 심판에 우리의 시야는 우유로 가득찬 수영장에 침수되는 듯 하였고 그 사이에 매복해있던 다수의 저격수들의 탄환은 아군의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주었다. 교전은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상대 저격수들의 위치조차 알 수 없는 횡사였다.
전력의 대부분을 잃고 용케 살아남은 것은 정찰대원과 저격수 한명 씩, 그리고 결정사(結晶士)인 나뿐이였다. 갑작스러운 열세였다.
" 머리 조심해. 어디서 총알이 날아 올 지 모르니깐. "
웅크린 채 꼼짝 못하고 있는 저격수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 도대체 어디에 있는걸까요? 제대로 놈들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
낮게 내려앉은 정찰대원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 나도 그래. 얼핏 보인다 싶으면 어느새 사라지고 없어. 신출귀몰한 놈들이야. 제대로 볼 수 없었으니 반격을 해볼 틈도 없었다. "
저격수로도 속수무책인 듯 보였다.
" 밖으로 나가볼까요? 기다리는게 더 참기 힘들군요. "
정찰대원이 조바심을 내었다. 그러나 저격수의 생각은 다른듯 보였다. 제안을 끊는 목소리가 단호하였다.
" 그건 위험해. 놈들의 위치를 먼저 파악하는게 현명해. "
" 이판사판 아니겠습니까? 지루하게 기다리는 것보다는 먼저 공격하는게 유리할 지 모릅니다. 망할 클론(Clone)은 모두 사라졌고 놈들 숫자도 셋밖에 없다구요! "
쓸데없는 갈등이 일어섰다. 적막이 길어진 탓에 그나마 실날같이 이어진 유대가 정적이라는 칼에 날카롭게 잘리기 일보 직전이였다.
" 그 쪽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
정찰대원이 내 의견을 물었다. 대답할 틈도 없이 저격수가 끼어들었다.
" 제길, 소문의 젊은영웅이 참전한다 해서 기대 잔뜩하고 왔더니 당신도 어쩔 수 없나 보군. 연합의 최정예인 당신도 이렇게 쩔쩔매다니 말이야. "
나의 영웅담이 그들에게 괜한 기대감을 불어 넣어준 듯 하다. 하긴, 이곳에서의 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곧 나를 무시하고 이야기를 계속 시작했다. 나야 번잡을 겪지 않아도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이였다. 잠자코 그 둘의 결정을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 아무래도 이상해요. 왜 헬리오스에서 클론을 사용하는거죠? 저 기술은 안타리우스의 그것 아닙니까? "
정찰대원이 화제를 바꾸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들이 대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인 듯 보였다.
" 안타리우스의 잔병들인가? 놈들이 아무리 미쳤대도 이렇게 포트레너드 한복판에 발을 들일 수 있나? 설마 헬리오스와 손을 잡은건가? "
그럴듯한 말이였다. 이 전쟁에서 적들은 불완전한 클론을 사용했다. 눈이 부신 섬광의 빛. 섬광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질적인 그 빛은 분명 앨리셔 캘런의 '심판의 빛'과 흡사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 제길! 그게 사실이라면 명을 제촉한 셈인가? 이게 사실이라면 연합도 끝 아냐? "
그럴 터 였다. 허나 왜? 안타리우스는 사이퍼의 신체를 이용해 비인도적인 실험을 강행한 신흥종교였다. 그 모습을보다 못한 우리의 리더 앤지 헌트와 헨리밀러 3세의 믿기힘든 동맹으로 안타리우스의 수장 구마스의 목을 베는데에 성공했지만… 혹시 그들의 말대로 정말 다시 구마스가 살아난 것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머릿속이 괜히 어지럽게 빙빙돌았다.
안타리우스가 끼어들었다면 분명 포트레너드엔 그 소녀 또한 이곳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연합을 버리고 안타리우스로 도망쳐버렸으니.. 여튼, 그 소녀의 능력이라면 아군이 당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클론이 포트레너드 중앙광장을 돌아다니는 것도 설명이 가능했다. 나는 그렇게 쉽게 패배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전쟁의 침묵은 여태껏 쉽사리 끝나지 않을 모양이였다. 기다림이 길었다. 생존의 절박함은 깊어져만 갔다. 십분을 넘긴 정적은 어떤 전쟁에서도 보기 힘든 일이였다. 그러나 놈들 역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터였다. 후퇴나 정전이 허락되지 않는 섬멸의 장에서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어차피 끝을 봐야하는 전투였다.
" 가만… 쉿! 드디어 움직이는 모양이다. "
마침내 적들을 발견한 것은 저격수였다.
" 아, 저도 보입니다. 디시카 테라나이트 광산 앞. "
첫번째 시야에 잡힌 놈은 테라나이트 광산 앞 휴게소를 막 지나고 있었다. 걸음짓이 꽤 빨랐다. 뭔가 불안한지 계속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큐브형태의 폭탄을 떨어트리고 다녔었다. 아마 저것을 이용해 우리의 진압을 방해하는 듯 보였다. 약간은 아마추어 느낌이 났지만 아직 알 수 없었다. 함정일지 몰랐다.
곧 이어 채석장 안에서도 한 놈이 보였다. 놈은 동굴에 몸을 숨긴 채였다.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어떤 놈인지 알 수 없었다.
" 일단 놈부터 해치운다.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벌집을 만들자고, 그때까지 죽은 듯이 기다려. "
저격수의 목소리가 긴박하게 불순했다. 시야에 들어온건 둘 뿐이였다. 나머지 하나의 행방은 묘연했다. 예사롭지 않았다. 불안한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 측면을 노리는 걸까요? "
그렇다면 채석장 후문이나 글림듀 쪽으로 가는 아랫길을 경계해야만 했다. 바리게이트가 겹겹인 리버포드나 선착장 쪽은 아닐터였다. 일단 디시카 사수가 임무이니 다른 구역으로 가는 길목은 아닐듯 했다.
" 쉽지 않겠어. "
놈의 움직임을 먼저 파악하지 못한다면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숫적 우세로도 이겨내지 못한 놈들이니 정면 대결은 피해야만 했다.
' 그래 놈들과 같은 전술로 부딪혀 보는거야. '
단순한 공세보다 철저히 숨어서 하나씩 제거하는 전법을 택하는 것이 유리해보였다. 그러나 싸움이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전쟁은 느닷 없는 변수 앞에서 모든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현재까지 전세로는 승리의 달콤함을 노리는 것 보단 생존의 치욕을 느끼고 싶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 살아남는게 중요해. 정말 그녀가 참전했다면 그녀의 능력에 살아남을 사람은 거의 없어. 그래. 살아남는게 곧 승리라 생각하자. 그렇지만 정말 그녀일까…? '
어차피 승패가 목적인 싸움은 단연컨데 아니였다. 연합을 위한, 헬리오스를 위한, 사이퍼를 위한, 핍박 받고 괄대당하던 우리를 위한,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위한 이 싸움에는 사실 승패란 존재하지 않았다. 승전을 위한 전술이나 전략도 없었다. 피아의 구분은 의미를 찾아보기 힘든 웃긴 전쟁의 룰 중 하나일 뿐이였고 적의 개념도 애매모호했다. 그들 또한 30년전엔 괄대당하고 무시당해왔던 인간쓰레기들(Cyphers) 아닌가? 그랑플람이 없었다면 아마 음지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놈들, 그래 우리처럼 말이다.
" 망은 제가 보겠습니다. "
행동을 시작한 것은 정찰대원이였다. 곧 이어 위대한 모험가 그랑플람 동상쪽에서 대꾸가 들려왔다.
" 알았다. 테라나이트 광산쪽은 내가 보겠다. 신호를 기다리지. "
노출된 둘은 걱정할 필요 없었다. 둘은 미끼일게 분명했다. 문제는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하나였다. 놈이 진짜 실력자이며 우리를 당황케한 장본인이리라. 광산 앞과 리버포드 길목에 둘이 포진했다는 것은 우회의 틈을 벌기위한 전술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먼저 길목을 잡고 기다리는 편이 유리할 터였다. 통신 채널을 열어 위험을 알리려다 그만뒀다. 덫에는 덫으로 대응하는것이 좋았다는 생각때문이였다.
' 예상이 맞아야 할텐데, 만약 이쪽이 아니라면? '
낯 익은 전쟁터였지만 낯 선 전술 탓인지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느낌과 동시에 아련한 긴장감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 공격! 디시카 테라나이트 수액광물 광산을 사수하라! "
막 리버포드 로드로 가는 뒷 골목 옆에 도착하자마자 통신기를 울리는 헛된 외침과 함께 채서장을 향한 촉음과 총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찰대원의 공격이였다. 가지고 있는 발화석이 함량된 수류탄과 문스톤이 함량된 탄환의 경쾌한 파열음이 곧 디시카 하늘 전체를 뒤덮었다. 곧 이어 우리 그랑플람 동상과 디시카 로드 사이의 공간에서도 교전이 시작되었다. 총 소리가 잦은 것으로 보아 단번에 놈들을 해치우진 못한 모양이였다.
총소리는 꽤 오래 울리다 그쳤다. 다시 잠잠해졌다. 거짓말 같았다.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곧 이어 통신채널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격수가 당했습니다! 실탄도 떨어졌습니다! 이대로 죽긴 싫습니다. 저, 저들과 하, 함께 가겠습니다! "
정차대원의 마지막 목소리엔 마지막 여유대신 비감과 같은 불안감이 흘렀다. 기왕의 최후니 담담해지긴 커녕 오금이 저려온 듯 보였다.
" 코드네임 ICE! 루이스씨, 행운을 빌겠습니다. "
곧 광산 근처 검은 하늘 아래서 정찰대원의 죽음을 알리는 폭음이 터졌다. 상관 없는 일이였다. 낯선 일도 아니였다. 임전의 죽음은 일상만큼 당연한 것이였다. 누구에게 열린 기회이자 크레바스나 마찬가지였으며 누구도 원치않은 종말이였다. 예외는 없었다. 적은 아직 숱하게 남아서 언제라도 찾아 올 수 있는 죽음이였다. 어차피 전쟁터란 죽음을 위한 한바탕 잔치이니 억울해 할 필요도 눈물 흘릴 필요도 없었다. 슬픔은 죽은자가 가져가는 것이 아닌 남는자가 가져간다지만 나한텐 상관없는 말이였다. 동정심이나 연민감같은건 없었다. 그런건 사치일 뿐이였다. 나한텐 그럴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정말로 멋졌다 생각했다. 자폭작전이 성공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폭음 뒤에 별 다른 소음이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성공했을 가능성은 아주 높았다. 아니, 그렇게 믿는 편이 마음 편했다. 실패를 예감한다면 아예 전의를 잃어버려 산 송장처럼 가만히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왼쪽 팔에 서린냉기가 내 심장을 파고 들 것만 같았다. 프로즌 그립은 제대로 작동되고 있었지만 느낌은 언제라도 왼쪽 팔의 서리가 내 심장을 잡아 먹어 버릴 것만 같았다.
' 성공했을거야. 내 몫만, 내 몫만 생각하자. "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옳았다. 자폭이 성공했다면 남은 것은 마지막 한 놈이였다. 놈만 잡으면 승리였다. 치열한 포트레너드 전투에서 혼자 살아남아 난 또 다시 영웅이 되는 셈이였다. 살아남기만 하면 무공기록은 내 차지였다. 짐짓 머릿속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표적은 좀 처럼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디시카 근처 샛기도 조용했고 리버포드 쪽으로 가는 뒷골목은 물론 큰 길까지도 깨끗해보였다. 내 정찰용 망완경으로 이리저리 흝어 샅샅이 살펴봤지만 햇살 없는 거리는 조용하기만 하였다. 광산 앞 네거리의 신호등은 전시에도 작동되어 붉었고 군데군데 찌그러진 자동차 사이에도 움직임은 없었다. 대각선 쪽 부서진 유리창들 속에서도 의심스러운 점은 없었다. 이상했다.
' 혹시 태림 디미스트? '
나의 판단이 틀릴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의 자치권 내의 영토라 해도 수인(獸人)과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길 쪽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었다. 허를 찌르는 기습이라 해도 그 쪽은 자살행위였다. 흠칫 동작을 멈춰 주변을 살폈다. 서리가 진 내 왼쪽 팔에 물방울이 배는 느낌이 들었다. 땀이였다.
생각해보니 놈을 찾느라 너무 노출되어 있었다. 암살과 생존의 기본은 잠행이였다. 일단 엄폐가 쉬운 채석장으로 몸을 낮춰 숨을 멈췄다. 찰나의 방심도 표적의 별미가 될 터 였다. 머릿속에서 식은 땀이 솟아올랐다. 방심은 곧 죽음이였다. 움찔거리는 머릿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시선만 들어 디시카의 샛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직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내가 돌아온 리버포드쪽의 뒷골목도 마찬가지였다.
" 혹시…? "
어쩌면 이미 표적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불길한 생각이 스치자 한참동안 그대로 꼼짝 않고 숨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긴장감에 눈꺼풀이 떨리는 것 같았다. 호흡도 저절로 멈춰졌다. 실제로 호흡이 멈춘 것인지 숨 쉬기가 어려워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서늘한 긴장감 덕에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머릿속이 되려 맑아지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니 방금 전만해도 경계가 소홀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런 위장 없이 광산 앞 네거리를 건너기까지 했으니 표적을 자초한 셈이였다. 놈에게 발각되었다면 단번에 내 머리에 바람 구멍이 하나 생겼을 것이 분명했다. 난 그러한 내 모습을 상상하며 더더욱 허리를 숙여 어둠에 몸을 숨겼다.
아직 채석장 앞을 지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중앙광장 뒤편이나 그랑플람 동상 앞쪽에 아직 머물러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한 곳에 박혀서 길목을지키고 있을 지도 몰랐다. 정해진 시간까지 적을 섬멸 시키지 못한다면 어차피 패전이나 마찬가지 였다. 해가 뜨려 했다. 놈은 교전보다 기다림을 택할지도 몰랐다. 내 선택은 하나뿐이였다. 전진만이 희망이였다. 시간이 없었다.
" …! "
마침내 놈의 꼬리를 따라잡았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놈의 탄피를 하나 발견한 것이였다. 그녀가 참전했다는 나의 예상이 빗나갔다 생각하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지만 아직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서둘러 탄피를 확인했다. 연합에서 사용하는 모든 화기에는 메트로폴리스의 제 7구역을 지배하는 '건파우더 프린세스' 페라미의 작품을 사용하지만 이 탄피는 그녀의 작품이 아니였다. 페라미의 작품에는 고양이와 고유 시리얼 번호가 적혀있었다. 하지만 이 탄피는 아니였다. 놈의 흔적을 찾았으니 이제 잡는 것도 가능 할 것 같았다.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 역시…! "
반신반의하며 예상한대로 의외로 놈은 가까운 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중앙광장 후문에 매점입구에 놈의 흔적을 발견했다. 채석장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였다. 굳이 스코프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거리. 그렇다면 놈이 먼저 나를 발견했을 수도 있었다.
허나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였다. 내가 표적이 된 것인지. 혹은 놈이 생각보다 어수룩한 놈인지 가늠할 수는 없었다. 상관은 없었다. 아직 나의 목숨은 찰거머리처럼 붙어있었으니 이른 절망은 사족일 뿐이였다. 쓸데 없는 감정이였다. 적의 흔적을 발견 한 것은 컷다. 유리한 형국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단서를 발견했다. 흐릿하게 남아있는 젖은 발자국. 꽤 이곳에서 오래 머물렀는지 발자국은 공중전화박스 근처에 어지럽게 남아있었다. 천천히 발자국을 되집어보니 나간 쪽은 북쪽, 리버포드 쪽이였다. 이제는 빌딩의뼈대만 남았을 것이 분명한 북쪽의 리버포드. 내 머릿속엔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골이 건물 옥상에 괴기스럽게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젖은 발자국이 남아있다는 것은 채 몇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둘러 놈을 따라잡으면 이 결정조각들로 놈의 심장에 차가운 아이스티를 뿌려버릴 수 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달리는 발끝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침착, 침착해야만 했다. 함정일 가능성이 있었다. 여태껏 놈은 매우 치밀했고 신중했었다. 쉽사리 흔적을 남길 놈은 아니였다.
고심 끝에 중앙광장 수석에 위치한 주차장을 매복터로 선택했다. 시야가 확보가 된 곳이니 적의 현황을 살피는데 유리해보였다. 디미스트 뒤편은 바리게이트로 막혀있으니 중앙광장이나 공원 가로수 그늘에 숨어 있는게 틀림 없어 보였다. 확신 할 수는 없었다. 근처 어딘가에 숨어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예감되었다. 판단이 맞길 바랄뿐이였다. 숨을 멈추고 천천히 놈이 숨을 만할 곳을 점검했다.
내가 택한 매복위치는 탁월했다. 높은 건물이 없는 주변 상황에서 주차장은 가장 시야가 넓었고 엄폐물이 많았다. 놈이 움직여주기만 한다면 단번에 이 주위를 빙하기로 만들어버려 놈을 동사시킬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놈만 포착된다면 승리는 쉬운 것이였다.
" 꺄르륵, 날 찾나요? "
목소리가 들린 곳은 통신기였다. 놈이였다. 아니, 확실히 놈이라는 건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목소리는 소름끼치게 낯이 익었다. 통신기에 섞인 잡음 때문에 확실한 판별은 불가능했지만 내가 알고있던 사람의 목소리와 매우 흡사하게 들려와 소름이 끼쳐왔다. 하지만 이런걸로 망설일 수는 없었다.
" 통신채널을 어떻게 뚫었지. "
의외였었다. 통신채널은 아군끼리만 통해야 의미가 있는 물건이였다.
" 통신채널을 어떻게 열어는지 궁금하세요 오빠? 꺄르륵!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 상상만 하면 모든 이뤄지는 원더랜드♩ 엄마가 쓴 동화책엔 늘 부모님이 계셨고 부모님은 동화책속에 나오지 않아요… ♪ "
" 맙소사…! 이럴수가! "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이마냥 맑고 귀여운 목소리 그렇지만 옛날과는 다르게 약간은 우울한 목소리는 낯 익은 노랫소리와 함께 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 엘리 러브 캠밸?! 살아있었나? "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였다. 방금 교전중의 망상이 사실이였다니 불쾌하면서도 명쾌하게만 느껴졌다.
" 꺄르륵, 기억해주셔서 고마워요 얼음오빠! 그렇지만 그 붉게 빛났던 눈은 이젠 탁해져서 보기 힘들군요.. "
" …그러지 말고 어서 모습을 보이렴. 착하지? "
허망한 감정이 내 심장을 주먹으로 치는 듯 강타했다. 엘리가 살아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찾아내 그녀의 가슴에 얼음비수를 꽂아 버리고 싶지만은 불리한 쪽은 내쪽이다. 그녀에게 발각된 이상 목숨을 잃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녀는 더 이상 다섯살의 어린 소녀가 아니다.
" 당신의 빙한지옥과 같던 결정에 갇혔을때만해도 당신을 이렇게 미워하지 않았어요. "
" ……. "
" 하지만 당신은 저를 져버렸고 제 심장에 그 날카로운 아이스 샤벨을 꽂아넣어주셨죠. 그 결과 태어난 것은 엘리라는 이름의 괴물, 그래요. 당신이 괴물을 만들었어요. "
" 오해다. 사과하마.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너의 능력은 너무 위험했어. "
" 꺄르륵, 얼음오빠는 여전히 진실을 피하고 있네요. 다 알고 있으면서… 당신이 진실을 피하려해도 그건 말 그대로 진실이에요. 그래서 괴로울테고… 아무튼 이제 끝내야겠어요. 오빠가 어떻게 하나 좀 더 지켜보려 했지만 해가 뜨려 하잖아요? 너무 겁먹지마세요. 한방에… 한방에 깨끗히 끝내드릴게요. 그때 당신이 나한테 한 것처럼 말이에요! 자, 그럼! "
그러곤 통신은 그렇게 끊어졌고 나에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파국이 찾아왔다. 그대로 끝이였다. 죽음이였다. 죽음의 순간 총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확실하진 않았다. 관자놀이 쪽의 아득한 통증과 함께 선연한 핏빛이 눈앞에 천천히 번지기 시작했다.
" 젠장… "
점점 흐릿해져만가는 의식속에서 나는 허망하게 기도했다.
" 부디 신이시여. 존재하신다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요. 저 괴물의 탈을 쓴 어린 양의 목숨을 구제해주시옵고 지켜주시옵소서. 또한 교활한 악마의 꾐에 벗어나게 해주소서. 그리고 부디… 부디… 그 소녀를 제 손으로 죽이게 해주소서! "
# 01. City of world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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