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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대본 없이 대략적인 상황만 주어진 채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멤버들의 '해석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미션 가운데 재미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그리고 본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발 빠르게 파악해서 움직여야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무한도전> 내 추격전에서 배신을 주도하는 것은 늘 그렇듯 '사기꾼' 캐릭터를 갖고 있는 노홍철의 몫이며, <런닝맨>에서 멤버들의 뒤통수를 치는 것은 '배신의 아이콘'으로 활약하는 이광수가 수행할 때 그 재미가 살아나는 법이다.
대신 전제조건이 있다. 멤버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누가 갈등을 주도하고 재미를 뽑아낼지에 대한 방향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션은 구체적이되, 그 목적 또한 분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미션에 대한 해석이 저마다 달라지고, 결국 각자가 담당해야 할 역할 또한 불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재미와 감동 없이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미션은 대개 이런 전철을 밟는다.
지난 30일 방영된 MBC <무한도전> 형광팬 특집에서 선보인 점심미션이 바로 잘못된 미션의 대표적인 예라 할만하다. 이날 멤버들은 자신의 팬들과 함께 이동하는 과정에서 제작진으로부터 미션카드를 받았다. 팬들과 함께 점심을 먹되, 점심값이 가장 많이 나오는 팀이 다른 팀의 점심값까지 모두 계산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것이다. 단, 미션 내용은 멤버들만 알고 팬들에겐 알리지 말아야 했다.
미션이 주어지자 멤버들은 자신의 캐릭터에 맞춰 행동하기 시작했다. '배려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유재석은 팬들이 먹고 싶어 하는 고기집을 택했고, 악역 담당인 박명수는 팬들과 함께 단체로 햄버거를 먹었다. 정준하 역시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동과 분식을 먹기로 결정했다. 정형돈, 노홍철, 하하는 같은 고깃집에서 만나 서로 값싼 메뉴를 고르는 신경전을 벌였다. 팬들을 위해 점심값을 지불하는 게 큰 문제가 되진 않을 테지만, 미션이 그러하니 거기에 맞춰 반응한 것이다.
문제는, 이날 주어진 점심미션이 결과적으로 아무런 긴장감도 만들어내 못한 채 의미 없이 끝나버렸다는 데 있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점심값이 가장 많이 나온 팀이 다른 팀의 점심값까지 계산한다는 미션 자체가 문제투성이인 미션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멤버들의 '해석 능력'과 캐릭터에 의지해본다 한들, 예상외의 그림이 나오기 어렵기 어렵다.
따지고 보면, 팬들과 햄버거를 먹은 박명수나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 분식을 택한 정준하는 주어진 미션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왜냐하면, 미션 자체가 다른 팀보다 점심값을 아끼라고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6팀이 모두 고깃집으로 향하는 것보다는 한두 팀이라도 다른 메뉴를 선택하는 것이 미션의 재미를 높이는 길이 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박명수와 정준하가 그 길을 택한 것뿐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방송 후 두 사람은 돈을 아끼기 위해 팬에게 햄버거와 분식을 먹게 한 '쪼잔한' 남자가 돼버렸다. 미션의 재미를 위해 멤버들과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차라리 이번 형광팬 특집이 팬들을 위한 특집이었음을 감안할 때, 점심값이 가장 많이 나온 팀이 계산하는 것이 아닌 가장 조금 나온 팀이 계산을 하는 미션이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멤버들은 팬들을 위해 마음껏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사줄 수 있었을 테고, 팬들은 서로 조금 먹은 것처럼 다른 팀을 상대로 심리전을 펼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방송 후 욕을 먹는 멤버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점심미션은 이날 방영된 형광팬 특집에 있어 중요한 부분도 아니었다. 이동 중에 가볍게 즐기는 막간미션의 성격으로 진행된 것이다. 때문에, 골치 아프게 심리전을 펼쳐 영수증을 바꿔치기하거나 몰래 상대팀의 메뉴를 주문하는 식의 '꼼수'도 필요치 않았다. 미션의 방향을 '어느 팀이 가장 많이 먹는가'라는 정도로 단순화했어도, 충분히 팬과 멤버들 모두 즐겁게 식사를 하며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됐을 것이다.
또한, 형광팬 특집이 팬과 멤버들이 함께하기 위한 취지임을 떠올려본다면, 굳이 미션내용을 팬들에게 숨겼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점심값 때문에 멤버들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일부 팬들은 대충 미션을 눈치 채고 저렴한 음식을 먹기 자처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날 점심미션은 좋아하는 스타를 위해 먼 길 달려온 팬들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부족했던 제작진의 오판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날 멤버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문제는 주어진 상황이 잘못됐다는 데 있다. 햄버거를 먹은 박명수를 욕하거나 분식을 선택한 정준하가 비난받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만약, 이날 점심미션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그것은 판을 그렇게 밖에 짜지 못한 제작진이 짊어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무한도전> 제작진의 보다 현명하고 냉철한 판단력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