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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은 자신의 집으로 김춘추를 자주 불러 축국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김유신 집을 지나들던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는 눈이 맞았고 급기야 문희는 혼전임신을 했다
이를 안 김유신은 부도덕한 여동생을 태워죽이겠다며 마당에 불을 피웠다
때마침 남산에 오른 선덕여왕이 이 연기를 보고 사연을 물었다
김춘추가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이를 안 선덕 여왕은 김춘추에게 문희와의 결혼을 명한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김춘추의 살람됨을 알아본 김유신의 계책이었다
김유신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유신랑!!!)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
그는 법흥왕 때에 금관가야를 신라에 바치고 귀순했다
바로 가야의 이 마지막 왕이 김유신의 증조부다
신라로 귀순한 김유신 가문은 숱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신라 주류는 정통 진골귀족들
김유신 가문은 여전히 비주류였다
김춘추 가문 역시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4년만에 귀족들에 의해 쫓겨난 진지왕
그는 김춘추의 할아버지다
김춘추는 폐위된 왕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이는 김춘추의 정치적 입지에 결정적인 약점이 되었다
신분적 정치적 한계를 지녔던 김춘추와 김유신은 혼맥을 형성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이런 관계를 유지한 김춘추와 김유신 앞에는 공통의 과제가 있었다
당시 신라의 왕은 선덕여왕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신라 왕권은 불안정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선덕여왕의 왕권을 지키는데 주력했다
당태종 역시 선덕여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황제의 일가를 신라의 왕으로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런 배경으로 진골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선덕여왕 16년 상대등 비담(사심 가득담아 별표 일억개)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유신이 이의 제압에 나섰다
(드라마 "선덕여왕" , 김남길의 폭풍연기가 돋보이는 '사망씬' 참고하시긔)
상대등 비담을 비롯 반란세력은 모두 처형당했다
구 귀족세력인 진골들도 상당수 제거 되었다
이제 두 사람은 신라의 신흥세력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하지만 아직 남은 과제가 있었다
반드시 멸망시키리라 굳게 다짐한 백제는
건재한 채로 끊임없이 신라의 국경을 침범해오고 있었다
이에 당나라와의 외교에 나선 김춘추
그러나
고구려와 끊임없이 충돌하던 당나라에게
한반도 동쪽의 작은나라 신라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당나라에 도착한 김춘추는 당 태종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당태종 스스로도 김춘추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후하게 대했다
이런 환대는 배경이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와 수차례 전투를 치룬 상태였다
특히 태종 자신이 출정했던 안시성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전을 당한 직후였다
이제 당나라는 신라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의 입장에서 고구려 분산을 위해서라도 신라가 필요했다
태종의 환대에는 이런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김춘추는 당 태종을 만났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김춘추는 의외의 발언을 한다
김춘추는 당나라와의 군사동맹 이라는 핵심내용 대신 유학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의 전략이었다
당태종의 허락으로 김춘추는 당나라의 유교 행사에 참관했다
얼핏 한가한 행보로 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당에는 수많은 신라 유학생들이 있었다
김춘추는 이들을 만났다
유학생들에게 당의 정세를 듣고 분석하기 위한 의도였다
김춘추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초조해진 쪽은 오히려 당 태종이었다
그는 결국 김춘추를 다시 불렀다
"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는가 "
" 백제가 굳세고 교활하여 침략을 마음대로 하고
더군나 얼마 전에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깊이 쳐들어와
수십 성을 함락하고 입조의 길을 막았으니
만약 흉악한 백제를 없애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다 사로잡혀 바다건너 조공도 할 수 없을 것 이옵니다 "
당태종은 나당동맹을 수락했다
그렇다면 나당 동맹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나당동맹 결성으로 김춘추는 정치적 입지를 완전히 굳히게 된다
또한 그에게는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동지가 있었다
날개를 단 김춘추는 빠른속도로 신라사회를 개혁해 나갔다
그 증거가 경주의 용광동 고분에서 나왔다
김춘추는 나당동맹 성공 1년 뒤 당나라의 의관을 전격 수용했다
당과의 관계를 확고히 하려는 김춘추의 의도였던 것이다
김춘추가 신라의 실권을 쥐고 있는 동안 진덕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않은채 죽었다
신라는 새로운 왕을 결정해야 했다
신라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제도 화백회의가 있었다
진골귀족들이 왕의 추대나 폐위 등 국가대사를 만장일치로 정하던 기구였다
후대왕을 정하는 화백회의가 열렸다
그 중심에 김유신이 있었다
마침내 김춘추는 신라의 왕이 되었다 (654년)
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이 된 것이다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으나 백제와 고구려는 끊임없이 신라를 침공했다
즉위 다음 해에는 백제와 고구려, 말갈 연합군이 침공해왔다
신라는 큰 위기에 빠졌다
나당동맹을 성사시켰지만 당나라의 지원은 오지 않았다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던 그의 열망은 무산되는 듯 했다
낭보가 날아들었다
드디어 당의 소정방 13만 대군이 출정한 것이다
백제의 계백장군이 결사 항전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영화 "황산벌" 참고 하시긔.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전쟁영화지만 허를 찌르는 대사가 많이 나오긔!)
마침내 660년 7월, 백제 의자왕이 항복했다
보름 후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사비성에 입성했다
김춘추는 소정방과 함께 높은 곳에 앉았다
김춘추의 복수는 철저했다
대야성에서 백제와 내통했던 검일의 사지를 찢어 강물에 던졌다
나중에 문무왕이 되는 법민도 복수에 가세했다
그는 의자왕의 태자 융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묻어둔 적이 있다
그 일로 20년 동안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오늘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
그러나 백제를 멸망시킨 기쁨도 잠시
당의 야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에는 소정방이 새긴 글귀가 남아 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것을 기념한다는 글귀다
그리고 백제에 5 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 통치에 나섰다
심지어 당은 신라까지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은 의자왕과 함께 백성 만2천여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신라와 김춘추가 얻은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 했다
백제는 멸망시켰지만 당은 신라까지 넘보고 있었다
이 와중에(...) 김춘추는 죽음을 맞이했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지 1년 만 이었다
이러한 김춘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신라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한 외교 지략가인가?
외세를 끌어들인 사대주의자인가?
적지않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김춘추는 외교로서 역사를 움직인 탁월한 외교가이자
비주류에서 왕위에까지 오른 풍운아 였다는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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