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의 전략은
지방군을 이용한 사비포위전이었다.
나당연합군에게 또 하나의 큰 위협은
18만 군대의 식량이었다.
격렬한 전투중에 사비 부소산성의 군량은 불타버렸다.
벼 수확은 두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
유일한 방법은 신라에서 조달하는 방법이다
이곳은 백제 진현성(흑석동 산성)이 있었던 곳이다.
신라에서 오는 보급품은
진현성을 위시하여 백제 국경의 산성들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도성을 목표로 신속하게 달려온 탓으로
백제 국경의 산성들이 건재했고
이들은 연합군의 통로를 봉쇄하게 되었다.
"실제로 백제가 부흥운동을 일으킬 때,
백제 군사가 이 진현성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신라에서 보급품이 조달되지 않아서
사비성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군사가 굶주림에 지친 적이 있습니다.
당군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천여 명으로 웅진 도어를 개통하기 위해
대전쪽으로 출두했다가 모두 몰살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보급품 전달에 중요한 요지가
이 진현성과 대전의 동쪽 되겠습니다."
- 서정석 교수(공주대 문화재보존학과)
6.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
의자왕이 장기농성들을 이끌고 있을 때
46세의 예식장군은 웅진방령,
즉 웅진사령부의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의자왕은
항전 5일째인 660년 7월 18일,
갑자기 항복하고 만다.
연합군의 공격도 특별히 없었다.
왜 항복했을까?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을 공격한 흔적도 없다?
그런데 의자왕은 항복한다?
충분히 항전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백제군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왜 항복을 했던 것일까요?
웅진성에서 5일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예식진 묘지명 탁본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占風異域 就日長安'(점풍이역 취일장안)
이 아리송한 내용이 의자왕과 예식진장군의 운명을 돌려놓습니다.
서기 660년 백제 운명의 날.
웅진성의 대반전입니다.
계룡산 자락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고왕암(古王庵).
백제 마지막 해에 지은 암자다.
암자뒤로는 천연 동굴이 있다.
백제 왕자 융이 피신했다고 해서 '융피굴'이라고 부른다.
왜 이곳에 백제 왕자가 숨었을까?
융피골 전설이 사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급박했던 상황의 증언이 아닐까?
"의자왕 및 태자 효가 성주들과 함께 항복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
- <신당서>
신당서보다 먼저 쓰인 구당서에는 더 구체적이다.
구당서는 삼국사기보다 200년 앞선 945년에 편찬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것이 있다.
신당서, 구당서 모두
백제가 항복하는데,
의자왕이 주체가 아니고
예식이 주체로 기록되어 있다.
'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
'기대장예식여의자항'
"중요한 사람,
특히 왕이면 왕을 제일 앞세우게 되어 있죠.
사건과 관계해서 세세한 내용을 씌지 못하고
아주 중요한 사실, 아웃 라인만 쓰게 되죠.
왕과 관련해서 왕보다 앞에 나온다는 것은
뭔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 이유가 뭔지를 탐색해내야 되는 것이죠."
- 노중국 교수(계명대 사학과)
의자왕의 항복 기사 바로 뒤,
태자 융의 항복 기사를 보자.
태자 융이 주체로 되어있어 어색함이 없다.
'태자융병여제서주개동송관'
예식의 이름이 앞에 씌여있는 게
사관의 실수로 볼 수 없는 증거다.
중국 역사에 김일제라는 인물이 있다.
김일제는 흉노 출신으로
한나라에 귀화하여 큰 공을 세웠다.
중국 역사에서 이민족이 공을 세우면
항상 김일제와 비교한다.
중화주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모범적인 이민족 사례가 바로 김일제다.
중국 감숙성 무위 김일제 석상.
섬서성 시안 김일제묘.
그런데 예식진의 묘지명에 보면
김일제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칭송하고 있다.
"무릇 김일제의 무리와도 업적을 논하고,
우열을 비교할 수 없으리 만큼 높다."
이민족의 모범인 김일제보다 더 극찬받는 예식진.
그의 공적은 무엇이었을까?
"백제의 유이민 중 부여융,
백제의 태자가 마지막에 정3품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흑치상지 역시 마지막에 정3품에 올랐습니다.
그들은 문헌자료와 후대에 발견된 묘지명에는
당나라에서 공이 컸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정3품인 예식진의 묘지명에는
이런 쪽의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 바이근싱 교수(섬서사범대학 사학과)
개방국가였던 당나라는 이민족의 출세가 보장되어 있었다.
외국인이 입당하여 공적을 남기면 세세하게 기록하여 남긴다.
예식진과 같은 시기 당에 건너온 흑치상지는
토번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다.
그의 비문엔
그의 공적이 세세하게 나와 있다.
"右武威衛大將軍(우무위위대장군)
左武衛將軍(좌무위장군)
沙佯州刺史(사양주자사)
折衝都尉(절충도위)"
그러나 예식진은 공적도, 관직의 경력도 없이 좌위위대장군만 기록되어 있다.
예식진의 공적은 무엇이었을까?
7. 예식의 배신, 반역!~
의자왕을 붙잡아 당에 항복하다!!!~
민족사학자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의 항복 장면을 독특하게 서술했다.
"웅진의 수성 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니,
왕이 동맥을 끊었으나 끊기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이어 가니..."
의자왕이 측근인 예식에게 잡혔다?
신채호 선생의 말뜻은 무엇일까?
다시 <구당서>의 기록을 보자.
의자왕 항복 기사에 뭔가 암호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이다.
다음 총 11자를 글자 한 자 한 자 분석해보자.
명확하게 드러나는 '기대장예식'과 '의자'를 제외하면
'又將來降(우장내항)' 네글자만 남는다.
이 중에서 모든 내용은
이 '將(장)'이라는 글자에 정확히 담겨있다.
'其大將예植 又將義慈來降(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
'그 대장예식이 의자왕을 '장(將)'해와서 항복했다.'
'將'은 무슨 뜻일까?
"장(將)'자에는
명사로 '장수'라는 의미도 있고,
동사로는 '거느린다', '데리고 간다'의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에서는 동사로 봐야 합니다.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가서 '항복을 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 노중국 교수
왕을 데리고 가다?
무슨 뜻일까?
"의자왕을 감금 내지 체포를 해서 당에 항복한 것으로 보입니다."
- 이문기 교수(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의자왕을 사로잡아서
당 소정방에게 가서 항복을 한 것입니다.
결국 예식은
의자왕과 백제에 대해서 반역을 한 것입니다."
- 김영관(청계문화관 관장, 백제사 연구)
將.
데리고 간 것인가?
체포해 간 것인가?
취재진은 놀라운 결론에 신중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문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중국 역사학자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예식이 그 왕을 데리고...'
여기서 '데리고'는
'왕을 사로잡아서 당나라에 투항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將'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전쟁에서 배신입니다."
- 바이근싱 교수
예식진.
그의 공적은 백제와 의자왕을 배신한 것이었다.
일촉즉발의 팽팽한 대치 상황.
나당연합군에 위협 당한 예식진은
영달과 파문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암호문 같았던 내용이 이제 뚜렷해졌다.
그 상황을 암호문처럼 적어놓은 것이다.
'占風異域 就日長安(점풍이역 취일장안)
"점풍(占風)은
바람을 점친다, 바람이 어디로 갈거냐,
백제의 거취,
당에게 항복할거냐, 저항할거냐,
점쳐봤다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 여러가지로 계산을 해봤다는 거죠."
웅진성의 깊은 곳에선 이미 새로운 힘을 따르고 있었다.
그날 웅진성의 결정권자는 예식장군이었다.
660년 7월 18일.
의자왕의 체포는 전투 중지 명령이자, 백제 700년 역사의 끝이었다.
"정말 충격적입니다.
항상 이런 위기의 순간에는 내부의 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역설적으로 한반도에 삼국이 대립을 하고 있었던 시기에는
당나라가 오히려 고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백제라는 한축이 무너진 후에는
668년, 신라의 지원을 받은 당나라군에 의해서
고구려도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결국 예식진의 배신은
동북아의 거대한 주춧돌 하나를 뽑아버리게 됩니다.
이후 동북아 국제질서는
중국 중심으로 고착화됩니다."
부여 고란사에는
삼천궁녀의 최후를 그린 벽화가 있다.
나당연합군에 쫓겨 낙화암에 뛰어드는 궁녀들,
그러나 삼천궁녀 이야기는 후대의 문인들이 지어낸 허구일뿐이었다.
그것은 망국의 왕이 짊어져야 할 숙명이었다.
660년 9월 3일 의자왕은 당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660년 12월 3일.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와 곧 배신의 응어리를 안고
북망산(중국 낙양)의 고혼이 되었다.
중국 시안.
의자왕의 측근에서 당 황제의 충신이 되어 화려한 삶을 산 예식진.
묘지명은 그에 대한 당 황제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方承休寵(방승휴총)
恩光屢洽(은광루흡)'
"바야흐로 아름다운 총애를 입고...
천자의 은혜로운 빛이 흡족히 내려지고..."
672년.
12년의 짧은 당에서의 영화를 뒤로 하고
예식진은 58세로 사망한다.
황제는 최고의 조칙을 내려
고위관료들이 묻히는 곳에 그를 안장했다.
고엔위안(중국 시안, 당의 고위관료들이 묻히던 무덤)
8. 1,340년만에 돌아온 의자왕의 혼.
지난 2000년 충남 부여에서는
중국 북망산에서 가지고 온 흙으로,
1, 340년만에
전쟁포로였던 백제 의자왕의 고혼을 모셔와
부여 능산리에 안치했다.
의자왕과 부여융의 가묘(부여 능산리)
자신의 영달을 위해 주군을 등졌던 예식진.
그에게도 한점 회환이 남아있었을까?
대당 좌위위 대장군 예식진 묘지명.
예식진의 묘지명은 오늘 의자왕의 오욕을 벗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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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KBS 역사추적 - 『의자왕 항복의 충격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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