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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와 여인들 시리즈 세번째의 마지막편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앞선 편들을 분량조절을 못함(죽을죄를지었습니다 굽신굽신..)
+
제인 시모어의 기록이 거의없으며 왕비로서 있던 기간이 짧음(고작 2년)
으로 인하여 이번편은
앨리슨 위어의 저서를 충실히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다른 시리즈에 비해 글이 길어진다거나
좀 지루해질 수 있습니다.
시작!
1537년 초봄, 헨리는 제인이 임신했단 소식을 듣습니다.
헨리, 완전 신나하죸ㅋㅋㅋㅋ으힠ㅋ
4월 초 헨리 추밀원에 가서 이 사실을 완전 자랑합니닼ㅋ..
그리고 제인의 임신소식이 막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해 봄, 헨리는 다리 통증땜시 바깥 출입을 못했지만
제인의 임신때문에 좋아서 어쩔줄 몰라합니다.
5월 말에 왕비가 품이 넉넉한 임신복을 입고 자랑스레 햄프턴 궁에 나타났을 때
아이가 배 속에서 발길질을 시작했죠.
한 가신은 이에 대해
"모든 충직한 가신들이 기쁘게도 신은 그녀에게 왕자를 선물했다."
라고 씁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에 신이 선사해 준 아기가 발길질을 했다는 소식에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는 이에 대해 감사하는 특별미사를 올립니다.
같은 날 아기의 발길질을 기념해서 전국 교회에서는 찬미의 송가가 울려퍼지죠.
런던에서는 시민들에게 공짜술을 제공하고 축하의 모닥불을 지핍니다.
고작 태아의 발길질에 저 난리법석을 피우나,
싶기도 하지만
손이 귀한 튜더 왕조였고, '아들'이 없는 헨리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는 양반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헨리는 여름에 올려주기로 했던 대관식을
아기가 태어난 이후로 또다시 연기하게 되게 됩니다.
여름동안 각 교회에서는 제인의 안전 출산!
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립니다.
제인은 공적 업무는 가능한 피하고 차분하고 조용하게 지내게 되죠.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왕실 주치의들과 최고의 산파들이 제인의 곁을 내내 지킵니다.
임산부인 제인은 유별나게도 메추라기가 땡겼다고 합니다.
당시 메추라기는 진미로 소문났지만
이 시기에 메추라기는 제철이 아니었죠.
그래서 헨리는 잉글랜드 밖의 영토인 칼레에서 메추라기를 공수해 오는 둥 진땀을 흘립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평양의 임산부가
"여보~ 나 한계령 통배추가 먹고싶어..."
라는 식이라고 해야하나요?
아무튼 5월 24일 칼레 총독이 힘쓴 끝에 엄청난 양의 메추라기가 도착합니다.
6월 초 역병이 도진 탓에 왕실부부는 윈저궁으로 옮기고
그 와중에도 계속 메추라기를 와구와구 먹어치웁니다-_-;
7월 중반 제인은 만삭이 되어 드레스 품을 최대한 넉넉히 늘리게 되는데요.
이 때 칼레 총독 부인에게
"메추라기 구해다줘서 ㄳㄳ아 덕분에 잘무거뜸ㅋ"
라고 하고는
그녀의 딸 중 하나를 시녀로 들이게 됩니다.
9월 초 제인은 아기를 출산할 예정인 햄프턴 궁으로 갑니다.
그리고 16일
한 때 앤 불린이 분만하였던 분만실로 들어가게 되죠.
그러나 이 시기에 런던에는 끔찍한 역병이 발발합니다.
헨리는 아내+태아+자신의 건강이 심히 걱정되었습니다.
제인도 역병을 끔찍히 두려워 했죠.
이 때에 한 시녀의 편지 내용엔 다음과 같이 써있었습니다.
"왕비가 병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헨리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궁에 머무는 인원을 줄여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시종들을 이끌고 에셔로 가버리죠.
정작 임신 중인 아내를 안정시키려면
남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서 말이죠.
그러고는 자신의 시종인 노퍽공작에게
"나 그래두 왕비 곁에서 멀리 떠나있지는 않을꼬얌~"
이런 말만 남기고 가버립니다.
제인의 출산 예정일이 한달여나 늦어진 상황에서도
헨리는 제인과 떨어져 지냅니다 ㅡㅡ;
10월 7일이 되어도 제인은 출산의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10월 9일 오후 제인은 드디어 진통을 시작합니다.
규칙적인 진통이 찾아오자 헨리는 사자를 런던으로 급파하여 소식을 알립니다.
런던의 반응은 떠들석하게 되죠.
그러나 제인의 진통은 사흘 낮 사흘 밤동안 계속됩니다.
런던에서는 아이를 안전하게 분만하기 위해서는
배를 째야한다는 악성 루머도 나돌았죠.
(당시 제왕절개를 시술 했다면 100%사망입니다. 제왕절개는 20세기 와서 안전하게 시행되죠.)
제인은 지독히도 긴 분만의 고통으로 인하여
거의 초죽음 상태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마침내
1537년 10월 12일 새벽 2시
그녀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무사히 출산합니다.
헨리, 27년이라는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왕자를 얻게 됩니다.
왕은 아들이 태어났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에셔에서
제인에게로 레알 빠르게 달려옵니다.
그리고 아기에게는
'에드워드'
라는 이름을 지어주죠.
왕자 탄생 소식을 들은 런던에서는
교회마다 찬송이 울려퍼지고 종소리가 쉼없이 울립니다.
축하의 모닥불이 거리마다 지펴졌고
저명인사들은 즉석 연회를 열었으며
런던탑의 총포는 왕자 탄생을 기려 2천 발의 예포를 허공에 쏘아 올립니다.
공짜 술에 푸짐한 음식을 장만하여
길거리 잔치가 벌어집니다.
런던의 종이 밤 10시에 일제히 타종을 멈추면서 제인은
'적법한 결혼'에서 '왕자'가 탄생했음을 알리고 추밀원에도 정식으로 알리삼
이라고 편지를 씁니다.
완전 존귀하신 아들을 얻은 헨리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에 휩싸입니다.
런던에 역병이 돌고 있는데다가
당시에는 영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이지요.
(실제로도 헨리의 자식들 중,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아들도 있음)
그래서 그는 왕자가 머무는 거처의 방과 홀, 안뜰 등을
매일 같이 비눗물로 하루 세번 깨끗이 청소하라고 명합니다.
옷, 침대보, 장난감 등 아기 근처에 있는 것은
무조건 하얗게 깨끗해야 했죠.
이탓에 제인은 맘껏 아기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요.
왕자는 10월 15일 월요일에 세례를 받습니다.
4백명에 이르는 인원이 참가를 했죠.
참가자들은 세례에 참석하기 전 제인의 처소에 들러
왕비 제인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 날 제인은 완벽하게 제 역활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녀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다음날 오후 제인은 심한 설사로 고생했지만 저녁쯤엔 한결 나아집니다.
그러나 밤새 앓아서 17일 새벽에는 우려할 만한 상황이 되었죠.
산욕열이었습니다.
당시 산모에게는 흔한 병으로,
회음부 내부가 찢겨 감염이 되어 고열에 시달리게 된거죠.
당시에는 위생관념이나 세균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산파들이 손을 청결하게 관리하지 못했고
출산 후에는 잘못된 섭생을 하여, 제인이 좋아하는 기름진 음식을 양껏 먹게 해줬기 때문에
산욕열에 걸리게 된 것이죠.
주교가 마지막으로 종부성사를 하려 할 때 제인은 다행이 몸을 추스릅니다.
그래서 헨리는 왕자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를 계속할 수 있었죠.
그러나 금요일 제인은 다시 앓았고
사흘간 사경을 해메게 됩니다.
22일 밤에 그녀의 상태가 위중해지자
헨리는 다음날에 사냥철에 맞춰 에셔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아내를 그대로 두고 떠나는게 '양심상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제인은 23일에 밤새도록 중태에 빠졌지만 또다시 차도가 조금 보였죠.
주치의들은 다음날 밤만 잘 견딘다면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날 왕실 예배당은 기도자들로 초만원이었습니다.
혹자는 기도로써 그녀를 구할 수 있었다면 절대 죽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기도 하였죠.
그날 밤 8시 헨리는 빠르게 의식을 잃어가는 제인의 병상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헨리는 밤새 그녀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1537년 10월 24일 수요일 새벽 2시경
제인은 스물아홉의 나이로 조용히 영면을 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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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는 아내의 시신이 누워있는 거처에 있는게 꺼림칙했던지
다음 날 아침, 노퍽공작에게 장례 절차를 일임하고는 윈저궁으로 가버립니다.
그리고 얼마간 아무도 안만나다가
며칠 뒤 가신들이 재혼을 건의하자 왕은 이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동의합니다.
(그리고 3년후에 재혼 하게 됩니다.)
11월 8일 제인의 시신은 2백의 사람들이 따르는 가운데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성당으로 옮겨집니다.
11월 14일에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장례미사가 열리면서
제인의 장례식을 끝을 맺습니다.
예법상 왕은 아내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덜햄 주교는 왕을 위로하고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은 최고로 축복받고 덕성스런 아내를 데려가긴 했지만 폐하가 아버지이자 어머니 역활을 해주실
최고로 존귀한 왕자님을 주셨습니다.
폐하에게 존귀한 아내를 주셨다가 기쁘게 다시 데려가셨습니다."
헨리와 제인의 결혼은 여섯 결혼 중에서 가장 성공적이었습니다.
헨리가 그리도 바라던 아들을 낳아주었으며
헨리의 다른 자녀들을 포용하여 헨리에게 가정의 따뜻함을 알게 해준 여자였지요.
훗날 헨리는 죽으면서 자신의 시신을 제인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유언으로는 다정하게 잠든 부부인 양 합동 무덤을 만들어서
두사람의 조각상을 세울 것을 명했죠.
그러나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아 현재 무덤은 조각상이 아닌
황동패로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황동패에는 제인을 기리는 라틴어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 불사조가 잠들어 있나니
그 죽음으로 또 다른 불사조가 생명을 얻었도다.
수많은 애도가 이어지건만
세상은 그 훌륭함을 바로 알지 못했다.
제인 시모어 [Jane Seymour, 1507?1508? ~ 153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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