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그대로 퍼왔습니다.
----------------------------------------
예전에 간디카님이 올려주셨던 글 같은데 박정희에 대해 참 좋은 글이 있네요.
아래에 나온 이런저런 이야기들에 대해 답변이 될만한 좋은 글 같아서 퍼와봅니다.
-----------------------------
박근혜의 정수장학회, 어떻게 돌아가는 조직인가
밑에 글에서 정수장학회를 박정희가 강탈했다고는 하지만 장학사업이라는 좋은 일 하는 곳이 아니냐. 개인재산으로 착복한 것처럼 말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이 글을 씁니다.
많은 분들이 정수장학회가 공익재단인 데, 왜 그걸 강탈했다고 하는지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정수장학회는 일년에 30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 돈은 MBC로부터 20억을 받고, 부산일보로부터 8억을 받아 장학생들에게 재지급한 것입니다. 정수장학회에서 장학금으로 쓴 돈은 1년에 2억뿐입니다(2007년 기준).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14748.html 그런데 박근혜 대표가 정수장학회에서 봉급을 연 2억5천씩 받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16055 다른 이사들과 직원들도 봉급을 받습니다.
어떻게 돌아가는 조직인지 감이 오시죠.
결국 이건 장학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재단을 만들어 세금을 면제받고,
장학금으로 돈을 쓰는 게 아니라 박근혜와 그 밑에 사람들에게 돈 주는 걸로 쓰이는 조직입니다.
박 근혜는 이제 정수장학회 이사장에서 물러나 평이사로 있습니다. 박대통령 비서관이었던 최필립이 이사장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계속 박근혜 대표를 안믿는 것은, 정수장학회 조직같은 경우 넘어간지 30년이 넘었습니다. 이사장부터 신입까지 전부 박근혜 대표가 뽑은 사람들로 채워진 겁니다. 이사장에서 평이사로 직함을 바꿔봤자 정수장학회는 박근혜꺼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말로 정수장학회를 자기 손아귀에서 풀어주려면 쉬운 길이 있습니다. 관선이사 파견을 요청하면 됩니다. 정부에서 명망있는 제3자를 관선이사로 파견하여 재단을 운영케하면 장학사업에 매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는 그럴 생각은 없다는 거.
http://mlbpark.donga.com/bbs/view.php?bbs=mpark_bbs_bullpen&idx=419279&cpage=1&s_work=search&select=ip&keyword=gandhika 박정희는 어떻게 부정축재를 했는가
박 정희가 청렴했다 라고 믿으시는 분을 오늘 불펜에서 보았습니다. 제가 종종 느끼는 건데 많은 젊은 분들이 정말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모르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증권파동이라거나 김성곤(SK)이라거나.. 모르시니까, 박정희는 청렴했다 라는 조중동의 창작 동화를 그대로 믿습니다.
60, 70, 80년대에 뭐가 있었는지
왜 사람들이 박정희, 전두환을 욕하는지 모르니까 납득도 안되고, 쟤들은 원래 불평불만분자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박정희가 경제를 일으켰다는 게 어떻게 일으킨 것인지 잘 모르고, 독재를 했다는 데 어떻게 독재를 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억눌렀나 보다. 혼자 오래 해먹어서 독재라고 하나보다 정도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몇가지만 적어보려고 합니다.
박정희가 우리나라 경제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부 인하지 않습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박정희가 일으켰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 삼촌 세대가 땀흘려 일한 게 나라를 일으켰다고 말하는 쪽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릴께요. 이 글에서는 더도말고 딱 박정희 집권기간 중에서 초기 5년만 다루겠습니다 (1961년~65년).
이승만 정권이 4.19로 무너집니다. 그게 1960년입니다. 4월에 4.19가 일어나고, 새로 선거가 치뤄지고 8월에 장면 정부가 들어섭니다. 장면 정부는 5달뒤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는 데(1961.2), 이게 나중에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됩니다.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경제개발을 하려해도 돈이 있어야 뭘 하지요. 장면 정부는 돈 나올 곳을 찾아 고민했는 데 불과 3달뒤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끝납니다.(1961.5.16)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장면정부가 무능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서였다 라는 것은, 사실 구라가 좀 섞인 것입니다. 정부가 수립되고 9개월만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는 데, 부패할 겨를이나 있었습니까. 박정희가 말한 사회혼란은 4.19를 의미하는 거죠. 4.19터진 후에 이승만 규탄하는 집회가 열리고, 노동자들이 억눌렸던 게 풀려나면서 몇달 동안 데모가 많았었습니다. 장면 정부가 들어선 다음에 줄어들었습니다만, 그 몇달동안의 데모를 갖고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정권 잡은 다음에 사회 곳곳을 장악하는 데 2년을 보냅니다.
5.16후 이틀만에 국가재건최고회의 라는 것을 설치하고 자기는 의장이 아니라 뒤에 실세로 앉습니다. 두달뒤(7월) 의장으로 앉혔던 장도영을 숙청하고 자신이 의장이 됩니다. 이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게 어떤 곳이냐 하면,
걔네들이 발표한 국가재건최고회의법에 따르면,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재판이 필요없이 자신들이 잡아들여 사형 이라고 판정하면 사형집행 되는 겁니다.
이러이러하게 한다 라고 회의에서 결정하면 그게 법이 되는 거구요.
뭐 뭐 해 라고 말하면 행정명령이 되는 겁니다.
어떤 건지 감이 오시죠.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박 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뭘 했느냐. 부자들 잡아다 가두고 정수장학회, 영남대학교 등을 강제로 뜯어냅니다. 이걸 뜯어낸 부하인 신직수는 상으로 검찰총장을 시켜주고요, 경찰, 군대를 장악합니다. 인사명령을 내려서 싹쓸이로 사람을 갈아치우죠.
그리고 1963년 선거를 치릅니다. 박정희가 국민 선거로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뭔 가 이상한 거 못느끼십니까? 체육관 선거가 아니라 일반 국민 선거를 치른 겁니다. 전두환도 일반 선거로 하면 자신이 떨어질까봐 자신이 지정한 2,500명만 투표할 수 있다고 정해놓고 걔들을 체육관에 모아다가 99.9%득표율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에도 용자는 있었는지 반대표 1표가 있었다고 합니다. ;;)
그런데 박정희는 국민 선거를 치뤘습니다. 어떻게? 떨어지면 어쩔려구?
주 목해야될 게, 박정희는 이승만 정부의 자유당을 없애고 스스로 당을 창당했다는 점입니다. 민주공화당을 급조해서 창당하고 자신이 총재가 되어 선거가 나왔습니다. 생소한 당을 만들어 나온 군인이 바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게 민주적으로 되었으리라 믿는다면 당신은 순진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부정선거 의혹이 엄청났습니다. 쿠데타로 장악한 상태에서 선거를 치뤘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는 데, 박정희의 개혁정책에 감동받은 국민들이 밀어줘서 박빙의 차로 윤보선을 이기고 대통령이 되었다... 이걸 믿는 분들을 볼때면 저는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런 드라마 스토리를 어떻게 믿을 수가.. ^^;;;
공화당을 창당하기 위해 박정희는 돈이 필요했었습니다. 1963년 증권조작을 크게 저지릅니다.
이 것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직접 대규모 증권조작을 벌인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는 데, 실제로 이루어졌고 나중에 일이 들통나자 밑에 간부들을 잡아넣은 후, 김종필은 관여는 했으나 도의적 책임이 있을 뿐 법적으로 무죄... 라고 기소중지 처리합니다. 기소중지 처리를 한 사람은 신직수 였습니다. 공화당 4대 의혹 사건이라는 게 있는 데, 그중에 하나가 이 '증권파동' 입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4389.html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된 이후,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합니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돈.
종잣돈이 없는 데 경제개발이 될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1년만에 나선 것이 한일수교입니다(1964). 일본과 외교를 맺는 데 돈이 왜 나오는가.
일본에게 징용/징병 끌려간 사람들 월급하고 목숨값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어 떤 분들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었으니 미안해서 돈을 준거다. 내지는 단절된 외교관계를 복구하는 댓가로 돈을 받은 거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신 데,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한국 점령했던 것을 미안해 하지 않는 나라이고, 그때는 제국주의 시대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나라입니다. 일본이 했다는 사과는 '유감이다' 이지 '미안하다'가 아닙니다. 일본이 우리에게 한일수교로 준 돈은, 미안하다고 준 돈이 아니라, 끌려간 한국 사람들 월급하고 목숨값이었습니다.
일본이 징용 피해자들에게 직접 지급하겠다고 하자, 박정희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한국정부가 받아서 대신 지급하겠다고 하고 돈을 받아갔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감추고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가 미안해서 '한국 정부'에게 준 돈이라고 말했습니다..
박통은 이 돈을 징용간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채서 쓸 생각이었습니다.
이 돈이 징용 월급과 목숨값이라고 알려지면, 징용갔던 사람들에게 돈을 줘야 합니다. 박정희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경제개발계획에 쓸려고 받아낸 돈인 데, 왜 나눠줍니까.
박 정희가 한 발표를 우리 국민들은 믿었고, 이 거짓말은 이후 40년간 유지됩니다. 2005년 43년만에 공문서가 공개되자 진실이 알려졌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신 나서서 뒤집어씁니다. 국가의 잘못이니, 징용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보상금을 지급하겠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이 죽고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52&aid=0000089570& 당 시는 일본에 끌려갔다 돌아온 국민들이 생존해있던 시기입니다. 일본과 외교를 맺는다고 하자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박정희는 계엄령을 내리고 전국 학교에 휴교령을 내립니다. 이명박이 자신도 한 때 운동권이었다 라고 말하는 게 이 것으로, 학생들이 한일수교 반대 데모할 때 자신도 한 몫 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국민들의 반대는 군경으로 진압하면서, 박정희는 한일수교를 강행합니다. 다음해(1965. 8)에 협정이 맺어지고, 이에 따라 일본 차관이 들어오게 됩니다. 일본은 배상금이라는 단어를 거부하고 차관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3억 달러는 무상으로 그냥 받기로 했고, 차관으로 2억 달러가 들어왔습니다. 여기에 추가로 민간차관 1억 불이 들어옵니다.
자, 그럼 무엇이 문제인지 아실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남이 받을 채무를 가로채서 자신이 쓴 것입니다. 징용끌려간 국민이 받을 돈을 국가가 가로채서 쓰고, 그 국민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가난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수십년동안 우리 국민들은 일본법정에 가서 징용 월급 내놓으라고 숱하게 재판을 걸었습니다. 그때마다 한일협정으로 일본의 책임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누가 이미 그 돈을 받아다 써버린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반론도 있습니다.
징용간 국민들이 직접 받은 것은 아니지만, 경제개발에 쓰인 돈이다. 나라를 위해 쓰인 돈이고, 경제개발의 혜택을 전 국민이 받았으니 간접적으로 돌려받은 것이다.
죄송하지만, 이 논리를 타파하는 증거가 있습니다. 박통이 이 돈을 재벌들에게 나눠주고, 뇌물을 받아먹었던 것입니다. =_=
1965년 우리나라 1년 예산이 3.5억달러이던 시절에 6억 달라가 들어왔습니다. (무상 3억, 차관 2억, 민간차관 1억)
엄청난 돈입니다.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가 9억달라 였다고 하는 데, 일본으로서도 자신의 외환보유고를 탈탈 털어 우리나라에 징용값을 치른 것입니다.
당 시 우리나라의 은행금리는 매우 높았습니다. 지금도 동남아 국가들 가보면 은행금리가 우리나라보다 쎄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일년에 대출 금리가 17~25%하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일본에게 이자 3.5%로 돈을 빌려와 7~8%에 기업들에게 빌려줬습니다. 은행, 재벌, 기업 할 것 없이 이 차관만 받으면 은행이자와 차익만도 엄청났기 때문에 미친듯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열풍 속에서 박정희는 기업들에게 누구 누구 에게 이 차관을 빌려줄지 뇌물을 먹고 결정했던 것입니다. 커미션으로 4~10%씩 뗐습니다. 대일차관은 10년에 걸쳐 들어왔기 때문에, 두고두고 우려먹을 수 있었습니다.
http://mahru.servebbs.com/zbxe/Board_Free/7403 http://www.coo2.net/bbs/zboard.php?id=bo_5&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39 이 업무를 맡았던 것이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입니다. SK로 불리며 공화당 실세 4인방으로 꼽히던 김성곤은 기업들에게 차관을 배정하고 커미션을 떼어 박정희의 정치자금을 마련했습니다. 박정희가 밑에 국회의원들에게 나눠주는 돈, 공화당 지부에 내려보는 돈,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뿌리는 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김성곤은 나중에 박대통령이 2인자 만들지 않기 위해 숙청작업할 때 숙청되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차관은 경부고속도로를 만드는 데에도 쓰였고, 포항제철 만드는 데에도 쓰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대일차관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하 지만 제가 적은 이 모든 것들을 아신다면 박정희의 공이라 해 주기 뭣합니다. 그 돈은징용끌려갔던 국민들이 받았어야 하는 돈인 데 박정희가 가로챈 것이었고, 국가 경제개발에 투입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는 기업들에게 커미션을 받아 자신이 썼기 때문입니다. 정치자금으로 썼을 뿐, 개인이 축재를 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에게 넘겨준 정수장학회나 육영재단 등은 엄연히 부정축재한 것입니다. 민간인을 잡아다 짜내어 강제헌납받고 자신의 가족에게 넘긴 것입니다. 박근혜의 재산은 얼마인지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MBC의 자산을 약 3조원으로 잡고, 정수장학회가 그 30%지분을 갖고 있으므로 1조원이라 칩시다.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1/16/2009011601181.html 정 수장학회 자체 기금은 200억 정도라고 합니다. 이것만 해도 1조를 넘습니다 (정수장학회는 장학재단이지 개인축재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제가 어제 쓴 정수장학회는 어떻게 돌아가는가 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포브스 지에 등재된 한국의 부자들 순위를 보면, 이 금액은 10위 정도에 해당합니다. 삼성 이건희, 현대 정몽구 보다는 적고, LG 구본무 회장(1.45billion)과 SK최태원 회장(0.99billion)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니 박정희는 청렴했다는 소리는 제발 안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강탈해서 딸에게 물려준 게 LG 재벌 급인 데, 어떻게 개인축재는 안했다. 청렴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증권조작 벌여서 창당 자금 마련한 사람입니다.
징용 목숨값을 받아와, 기업들에게 나눠주면서 뽀찌를 뜯은 사람입니다.
저 는 일본 차관이 우리나라 경제개발에 공헌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박정희가 결정한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우리 산업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은 우리 할아버지들이 일본끌려가서 목숨을 바친 징용 목숨값이었고, 그걸 키워서 경제개발을 이룩한 것은 우리 아버지들이 70년대 땀흘려 일해서 이뤄낸 결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얘기는 여기서 끊을까 합니다.
맑은 하루 되세요.
http://mlbpark.donga.com/bbs/view.php?bbs=mpark_bbs_bullpen&idx=419445&cpage=1&s_work=search&select=ip&keyword=gandhika 박정희는 99.9%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었다.
박정희가 독재를 했던 것은 당시 시대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 얘기를 참 많이 듣습니다.
그 런데 저는 젊은 사람들이 이 얘기를 하는 걸 들으면서, 과연 그 분들이 박대통령이 뭘 했는지 아는 것일까 궁금한 적이 많았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72년 선거나 78년 선거가 어떻게 치뤄졌는지, 유정회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
우리는 학교에서 북한의 김일성이 거짓 선거를 하고, 99.9% 득표율로 매번 수령에 당선된다고 배웠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남한에도 있습니다.
박대통령은 1972년 99.9%의 득표율로 대통령이 되었고, 78년에 또다시 99.9%득표율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박통이 죽자 전두환이 99,9%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대한민국은 99.9% 득표로 매번 대통령이 당선되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오늘의 얘기는 박대통령 말년 5년을 배경으로 합니다 (1974~1998)
박대통령의 독재 얘기를 할 때 늘 언급되는 것이 유신체제입니다. 유신이 도대체 뭐길래 그러느냐.
1972년, 박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발표합니다.
이에 따르면, 국회의원은 선거로 뽑히는 게 아니라, 박대통령이 지명하면 국회의원이 됩니다.
이렇게 뽑힌 국회의원들을 유정회(유신정우회) 라고 부르는 데, 박대통령은 국회의원의 1/3을 유정회가 차지하도록 합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대통령이 임명해버리면 선거고 뭐고 없이 그냥 국회의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통일주체 국민회의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1972년 국민이 직접선거로 2,359명을 뽑았습니다 (이게 사실 조작선거인 데.. 밑에 내용 보시면 감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박대통령이 의장을 맡습니다.
통일주체 국민회의는 자체 투표로 다음 대통령을 뽑습니다.
통일주체 국민회의는 국회의원 총원의 1/3까지 차지할 수 있으며, 국회에서 통과된 헌법개정안에 대한 최종 결재권을 갖습니다.
의장은 2,359여명 중에서 누가 국회의원이 될 것인지(73명) 결정할 수 있습니다.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i=198992 이제 감이 오시죠?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박대통령에게 충성경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2400명중 오직 3%만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이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해서 99.9%의 득표율로 8대 대통령이 됩니다 (투표 2,359명, 찬성 2,357표, 무효 2표) . 6년뒤인 1978년 또 통일주체 국민회의로부터 99.9% 득표를 얻어 9대 대통령이 됩니다 (투표 2,578명, 찬성 2,577표, 무효 1표).
우리가 익히 아는 전두환의 체육관 선거역시 이 통일주체 국민회의 이름으로 치뤄져, 99.9%득표율로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이 됩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D%86%B5%EC%9D%BC%EC%A3%BC%EC%B2%B4%EA%B5%AD%EB%AF%BC%ED%9A%8C%EC%9D%98 우리는 박대통령이 말년에 미국과 사이가 안좋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박대통령을 북한의 김일성과 차이가 전혀 없다고 봤습니다.
선거를 해서 99.9% 득표율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데 이걸 믿으라는 거냐. 김일성과 차이가 뭐냐는 거지요.
우리가 익히 아는 박대통령의 자주국방 정신, 핵개발 의지 등은 사실 미국으로부터 김일성과 동급 취급을 당하게 되자 박통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을 상황을 대비해서 추진한 것이었습니다. 미군이 철수해렸을 때 살아남을려고.
무슨 애국애족, 자주국방 이런 게 아닙니다. 김일성과 동급으로 취급받게 되자,
미국에게 버림받아 미군이 철수해도 나는 계속해먹을 것이다 라고 추진한 것이었습니다.
1965~73년, 우리 젊은이들이 월남땅에 가서 피흘린 댓가로 미국에게 점수를 땄었던 박정희는, 장기독재 때문에 그 점수를 날려버렸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박대통령의 자주국방과 노무현 대통령의 자주국방이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자주국방은 수십년 축적된 국력성장에 따라 스스로 일어설 때가 되었다는 국방의지의 표현이라면, 당시의 그것은 북한보다 군사력이 뒤쳐졌지만 박대통령의 독재때문에 미군이 철수할지도 모른다 는 공포때문이었습니다.
우 리나라의 군사력이 북한과 비슷해진 것은 1975년 전후로 여겨지는 데, 그 이전까지는 북한이 우리보다 강했습니다. 우리가 북한보다 월등히 군사력이 강하게 되서 자주국방하겠다고 나섰던 게 아니라, 1972년 아직 북한보다 열세인 데도 미국에게 버림받을 것 같아 자주국방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북한이 지금 우리보다 군사력이 열세이자 핵무기를 개발하죠? 박통도 그랬습니다. 북한보다 군사력이 뒤지는 상황에서 미군이 떠나버리면 살 길은 핵뿐이다 라고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습니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4/08/005000000200408020947001.html 어떤 분은 절대빈곤에서 허덕이던 시절 강력한 리더쉽이 필요했고, 박정희덕분에 보릿고개를 탈출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김일성을 욕할 수 없습니다.
6.25전쟁은 남쪽으로 북쪽으로 전선이 끝에서 끝까지 오가면서, 우리 뿐만 아니라 북한에 있던 산업기반도 파괴해버렸습니다.
잿 더미로 폐허가 된 상황에서 김일성은 공산주의 경제 특유의 빠른 초기 경제성장을 통해서 보릿고개를 극복해냈습니다. 북한은 1960년대까지 우리보다 잘 살았으며, 우리 경제와 군사력이 북한을 따라잡은 것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입니다. 그래서인지 북한 주민들은 세습과 김일성 말년의 추태에도 불구하고 항일 독립운동을 했고, 건국을 했으며, 보릿고개를 없앤 영웅으로 김일성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한도 99.9%득표로 독재. 북한도 99.9%득표로 독재.
강력한 독재로 경제성장시켜 보릿고개 극복한 영웅.
박정희와 김일성이 똑같다면, 우리가 뭘 위해서 경쟁하고 싸웠습니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체제에 대한 신념은 독재 리더쉽이나 보릿고개 극복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간의 가치, 자유와 경쟁에 있습니다. 독재가 우리 경제를 풍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자유경쟁이 우리 경제를 부유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독재와 소수 특권층에게 자원이 집중되는 체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공정하게 시장에서 경쟁하는 체제를 지지합니다. 그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입니다.
출처 :
http://mlbpark.donga.com/bbs/view.php?bbs=mpark_bbs_bullpen09&idx=1083038&cpage=1&s_work=search&select=stt&keyword=박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