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04-03-25 17:57:00]
“정치인들이죽어라고 싸움만 하니 나라가 이 꼴 아닙니까. 그 바람에 우리 서민들만다 죽겠어요. 손님 중 열에 아홉은 이대로는 못 살겠다고 아우성 칩디다.
이런 현실을 아시긴 합니까.”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가 25일 아침 민생현장 탐방 일환으로 택시를 탔다가 ‘길거리 민심’에 혼쭐이 났다. 개인택시 기사 최금철(58)씨가박 대표와 정치권을 향해 거침없는 독설을 퍼부었기 때문. 최씨에게선 원내 제1당의 당수를 어려워하는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최씨는 오히려 좋은 기회가 왔다는 듯 그 동안 쌓인 정치권을 향한 분노와 섭섭함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는 “내 얘기가 바로 성난 민심의 목소리”라고 주장했다.박 대표가 이날 서울 중구 S호텔에서 열린 행사를 마치고 여의도 ‘천막당사’ 행 택시에 오른 것은 오전 9시께. 승용차에 문제가 생겨 차편을 구하던 중 “민생을 살필 좋은 기회”라며 호텔 현관 앞에 있던 택시를 불러세워 앞좌석에 성큼 올랐다.
택시가 출발하자마자 박 대표는 “운전은 오래 하셨습니까”라고 조심스레최씨에게 말을 붙였다. “좀 됐습니다”라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불경기가 심한 데 기사님도 힘드시죠”라고 박 대표가 말을 건네자 최씨는 작심한 듯 “힘든 건 힘든 거고, 주제 넘지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라며 독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표님이 잘 모르시나 본데, 국민들이 탄핵 자체를 싫어해서 이 난리를피우는 게 아닙니다. 정치인들이 빚어낸 끔찍한 혼란을 못 견디는 겁니다. 촛불시위에 몇 만명 씩 모인다고 하지만 그게 진짜 민심도 아니예요. 탄핵을 놓고 아버지와 아들, 어른과 청년이 서로를 비난하면서 핏대를 세우고 싸우는 상황이 싫은 겁니다.”정치권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최씨의 목소리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자박 대표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박 대표는 차분한 목소리로 ‘탄핵의 정당성’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최씨는 박 대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탄핵안은 당연히 부결될겁니다”라고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택시 안에 일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최씨는 “잘되던 회사가 망해서 1년전에 이일을 시작했는데 제가 요새 정치인들 때문에 혈압이 무섭게 오릅니다”라고 목청을 높인 뒤 “요새 시골행사에 국회의원이 나타나도 아무도 자리에서 안 일어날 정도로 국회가 국민의 신뢰를 잃었어요”라고 쏘아붙였다.“그래서 제가 대표가 되면서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챙기는 데 당력을 집중하자고 한 것 아닙니까”라고 박 대표가 ‘이해’를 구했지만 최씨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택시가 20여분만에 여의도 천막당사 입구에 들어서자 박 대표는 “참회하고 거듭나려고 이렇게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천막을 가리켰다. 최씨는하지만 “한나라당이나 열린당이나 당사 가지고 쇼하는 것을 다 알아요”라고 말을 잘랐다.
박 대표가 택시비 9,500원을 건네며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으나 최씨는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짧게 답한 뒤 서둘러 출발했다. 박대표는 동승한 기자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은 뒤 당사로 들어섰다.최문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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