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 모처에서 사설경비분야에 근무중인 공익근무요원이다.
야간근무중 새벽에 심심하기도 하고 모기와 싸우다 지쳐서 초소를 나와
잠시 밖을 서성이고 있는데, 저쪽 구석에 책 몇 권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중학교용 참고서 몇권이 있었다.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 몇 권 들고와서 그 옛날 기억을 되살리며
책장을 넘기는데....!
98년 과정대비 두X동X에서 나온 한달음 사회자습서 중1 견본책에서
반으로 접힌 편지가 한장 나왔다. ^_^
참고서 주인은 여자아이였으며 견본인걸로 보아 선생님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단정한 아이로 추측된다.
자, 우선 편지의 전문을 읽어보자.
to. 영주. ♥♥♥♥♥♥
안녕? 영주야. 나야. 세규. 너의 편지 잘 받았어
혜원이라고 했던가? 솔직히 좀 서운했어.
너의 답장이 와서 굉장히 좋아했었는데....
난 굉장히 용기를 내서 너한테 고백했는데.
영주야. 다시한번 생각해보겠니? 사귀지는 않아도 돼.
가끔 만나는 친한 친구라도 좋으니까 날 만나줄 수 있겠니?
참! 우리 언제 한번 만나자. 음.... 언제쯤이 좋을까?
11월 20일. 요번주 토요일 2시에 만나자.
알았지? 꼭 나와. 장소는 육교앞. 괜찮지?
그럼 그 때 만나는 것으로 하고.
맞아! 이것 너가 초등학교때 좋아하던 편지지였지?
언제 내가 이 편지지 사주었잖아. 기억 나니?
누나꺼 몰래 쓰는거야.
내 정성 봐서라도 요번 토요일에 꼭 나와.
그럼 안녕 ― ♥
1999. 11. 16.
영주와 친해지고 싶은 세규로부터.
P.S - 미안. 봉투가 없어서....
감동의 소름이 온몸을 휘감아 돌지 않는가.
맞춤법에 충실하며 원본의 글씨체는 굉장히 단정한 글씨체였다.
고쳐쓴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초안 작성 후 옮겨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평이한 문장이며, 간단히 추측할 수 있는 내용으론 이들은 초등학교 동창,
중1, 세규가 영주를 좋아한다는 것. 이 정도이다.
이제, 한문장 한문장 살펴보기로 하자.
▶ to. 영주. ♥♥♥♥♥♥
원본엔 하트가 찐한 빨강색이다. 사랑하는 영주에게 마음을 차마 표현하지
못한 완곡한 표현으로 보인다.
▶ 안녕? 영주야. 나야. 세규. 너의 편지 잘 받았어
주목할 것은 '너의 편지 잘 받았어'이다. 문어체의 문장으로서, 영주를
대하기 껄끄러운 세규의 입장이 드러나있다.
부담없는 사이에서 너의 편지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세규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대목이다.
▶ 혜원이라고 했던가?
혜원이. 제3의 인물이 등장했다. 어제 밤새도록 혜원이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느라 한잠도 못 잤다.
과연 혜원이는 누구일까? 이후로도 혜원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우선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혜원이가 세규에게 부끄러워하는
영주를 대신해 편지를 전해준 메신저의 역할을 했을 경우이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경우도 있다. 혜원이가 남자일 가능성....
영주는 혜원이를 좋아하는 것이다.
세규에게 보낸 답장에 '미안해.... 난 혜원이를 좋아해....' 라고 세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말했으며, 세규는 애써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혜원이라고 했던가?'로 혜원이의 존재를 은연중에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편지만으로는 혜원이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 솔직히 좀 서운했어. 너의 답장이 와서 굉장히 좋아했었는데....
난 굉장히 용기를 내서 너한테 고백했는데.
주목할 단어는 '굉장히'이다. 세규는 굉장히를 두번씩이나 연거푸
남발하며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출하고 있다.
맘이 아프다.
▶ 영주야. 다시한번 생각해보겠니? 사귀지는 않아도 돼.
세규도 나름대로 성격이 있을 것이다. 애써 그의 성격을 자제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 '~ 니?' 로 끝나는 의문어미다.
이를 뽀드득 갈며 애써 상냥하게 무엇인가를 질문할때 주로 사용된다.
'~냐?' 또는 '~어?' 는 이를 갈며 발음하기가 꽤 힘들다.
함 해보시라.
▶ 가끔 만나는 친한 친구라도 좋으니까 날 만나줄 수 있겠니?
역시 '~니?' 로 끝난다. 일반적으로는 여자쪽에서 이런 말을 하는게
보통인데, 세규는 영주를 대단히 좋아하는 것 같다.
세규, 정말 많이 굽히고 들어간다. 그러나, 친구사이라도 영주와의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싶어하는 그 맘.... 충분히 이해한다. 힘내라.
그런데, 가끔 만나서는 친한 친구사이가 되기 힘들텐데.... -_-a
▶ 참! 우리 언제 한번 만나자. 음.... 언제쯤이 좋을까?
어쨌든 만나서 친하게 지내보자는 저 자세. 본받을만 하다.
언제가 좋을지 애써 생각하는 척하지만 이미 모든것은 정해져있다.
다음을 보자.
▶ 11월 20일. 요번주 토요일 2시에 만나자.
알았지? 꼭 나와. 장소는 육교앞. 괜찮지?
거침없다. 11월 20일 오후2시.
또 하나. 감동의 물결.... 장소는 육교앞! 아! 육교앞....!
근래에 육교앞에서 이성을 만난적이 있었던가?
'건전하다'라는 표현으로는 무언가 허전할 정도로 순수한 세규와 영주!
이 편지를 이해하기 위한 코드는 '육교앞'이었던 것이다.
▶그럼 그 때 만나는 것으로 하고.
은근슬쩍 물 흐르듯 약속성립을 기정사실화 해버렸다.
나이에 비해 노련함이 엿보이는 문장이다.
▶ 맞아! 이것 너가 초등학교때 좋아하던 편지지였지?
여기서 공감대 형성기술 들어간다. 얄팍하지만 그런대로 효과가 좋은 기술.
육교앞 약속에 대해 고민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편지지를 통해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언제 내가 이 편지지 사주었잖아. 기억 나니?
공감대 형성기술에 이어 바로 생색내기 기술로 연속 안타!
▶ 누나꺼 몰래 쓰는거야.
됐다. 이제 그만 생색내라.
▶ 내 정성봐서라도 요번 토요일에 꼭 나와.
보통 이런 표현은 제3자가 쓰는 것이 보통이다.
(예) 얘, 영주야, 세규 정성봐서라도 한번 나가줘라~
세규.... 멋진 중학생이다.
평이한 문장과 완곡한 표현이지만 할 말 다 한다.
▶ 그럼 안녕 ― ♥ 1999. 11. 16.
역시 하트 그림을 통해 가슴속의 응어리를 표출하고 있다. 슬프다.
▶ 영주와 친해지고 싶은 세규로부터.
아직도 약속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지 모를 영주에게 쐐기를 박는 문장이다. 나이스!
▶ P.S - 미안. 봉투가 없어서....
허걱~ 이 편지의 옥에 티가 아닐까 싶다. 이건 쪽지가 아니다.
편지의 형식을 띄고 있는 이상 기본은 해주어야 한다.
'편지 = 봉투 + 편지지'이다.
하지만 아직 어린 세규다.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이상 세규가 영주에게 보낸 편지를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너무도 순수한 그들의 애정행각에 입가에 흐르는 미소를 막을 수가 없었다. ^_^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주의 마음을 아직 얻지 못한 세규의 마음을 생각하며
맘이 아파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편지는 1999년에 작성된 것으로 지금 그들은 고등학교 2학년일 것이다.
지금 이 때의 느낌, 순수함 잊지 않고 살아가길 바란다.
* 생각해 볼 문제
1. 과연 혜원이는 누구일까? 친구들과 이야기해 보자.
2. 영주의 입장이 되어 세규의 맘이 다치지 않게 거절하는 편지를 써보자.
3. 이 편지에 대해 다른 시각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함께 토론해보자.
< marginWidth=0 marginHeight=0 src="http://style.damoim.net/istyle/main/istylemain.asp?fpnum=10620135" frameBorder=0 width=0 scrolling=yes height=0 leftmargin="0" topmargin="0">>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