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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military_33063
    작성자 : aeio
    추천 : 73
    조회수 : 7947
    IP : 121.173.***.75
    댓글 : 43개
    등록시간 : 2013/10/25 05:13:06
    http://todayhumor.com/?military_33063 모바일
    보급품 이야기
     
    군대에서 보급품의 질은 짬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작게는 수통부터 시작해 탄띠며 군장 침낭까지 A급으로 도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라도 있는건지 A급 보금품에 목숨을 거는 고참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좋은게 좋은거라고 같은 물건이라면
    새거나 질좋은걸 가지고 싶은게 사람 심리라지만 1년에 한두번 쓸까말까한 반합이나 야삽조차 A급이 아니면 몸서리 치는 고참들이
    있었다. 공작새가 날개를 펼쳐 자신을 과시하듯 자기의 A급 보급품들을 펼쳐놓고 뿌듯해 하고 있는 고참들의 모습을 볼때면 저렇게
    까지 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은근히 고참들끼리의 신경전의 대상이 되는것도 바로 보급품이었다. 덕분에 죽어나는건
    후임들이었다. 혹시라도 다른소대 고참이 새 보급품을 받거나 신상을 가지고 있는걸 보게되면 어김없이 우리에게 압박이 들어오곤 했다.
    옆소대 누구는 보니까 야삽이 막 접히고 그러더라... 내껀 나문데.. 부러트리면 접히겠지? 이러면 우리는 보급계로 달려가 신형야삽을
    달라고 애원해야 했고 야 몇소대 누구는 매트리스가 쿠션이 아주 그냥 과학이더라.. 괜찮아 난 그냥 맨바닥에서 자지 뭐. 디스크나
    오고 말겠지.. 이러면 내 매트리스에서 쿠션을 빼서라도 채워놔야 했다.
     
    당연히 상태가 나쁜 보급품들은 후임들의 차지였다. 해안에 들어갈때면 방한용 보급품이 나왔는데 처음 자대배치를 받고 지급받은
    방한용품은 거의 유물 급이었다. 참전용사의 원혼이 서려있을것 같은 스키파카는 아무리 봐도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자크는
    잠기지 않았고 딸려있는 방한두건은 이미 탈모가 진행중인지 털이 3분의 1도 붙어있지 않았다. 지금껏 몇명이나 입은건지 가늠조차
    되지않는 방한복 바지와 바지 깔깔이는 이미 무릎이 다 헤져있었고 방한화 역시 굽이 다 닳아 없어진지 오래였다. 그렇게 풀셋을
    입은 나의 모습은 과거에서 시간여행을 온 6.25 참전용사 처럼 보였고 근무를 나가기 전 거울을 볼때마다 왠지 애록고지를 사수해야만
    할것같은 기분이 들게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도 어느덧 고참이 되었지만 나는 보급품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았다. 바꾸는것도 귀찮은데다 A급 보급품을 쓴다고
    군생활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기에 그냥 주면 주는대로 받아 쓸 뿐이었다. 제대를 몇달 앞두고 마지막 해안투입을 했을때였다.
    다들 내무실 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방한용품을 받아가라는 방송이 들려왔다. 따로 소대별로 나누어 주는게 아니라 창고에
    쌓여있는 보급품을 분대 인원수에 맞게 들고와야 했다. 좋은거 찾는다고 쌓여있는거 뒤지지 말고 그냥 대충 쓸만한걸로 가져오라고
    말하고 막내를 보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한참이 지나도 후임은 오지 않았고 다른 후임을 보내려는 차에 낑낑대며 들어오는 후임을
    발견했다. 왜이렇게 늦었냐고 묻자 그 후임이 하는 말은 좋은걸로 찾아온다고 늦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했던 말은 이등병의 자체 필터링에
    걸러져 쓸만한걸 가져오지 않으면 뒤진다. 라는 말로 전달되었고 그 후임은 충실히 명령을 수행한 것이었다. 보급품에 보청기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정말 열심히 뒤졌는지 그 후임이 가져온 보급품은 A급도 아닌 초A급이었다. 때깔이 남다른 신형 스키파카를 비롯해 모든 물품이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압권은 침낭이었다. 쿠션이 빵빵하다 터져나갈것 같았고 심지어는 관물대 밑으로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거 남은 군생활을 따숩게 보내다 전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놓인 보급품들을 보며 어쩌면 먼저간 고참들의
    기분이 이런것이 었구나 하고 어느정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정리가 끝나고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보급병 후임을 모습을 발견했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후임의 모습에 무슨일인지 물었더니 중대장님 드릴 보급품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이미 주기까지 다 해놨는데 아까 정신없는 사이에 없어졌다며 패닉에 빠진 후임의 모습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뭐가
    없어졌는지 물어보니 스키파카부터 침낭까지 전부 다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넌 이제 X됐구나.. 라고 생각하는 찰나에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내무실로 올라가 후임을 찾아 아까 그 보급품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물었다. 뿌듯해 하며 한쪽 구석에 누가 쌓아논걸 가져왔다는
    후임의 말에 침낭을 꺼내 펼쳐보았다. 침낭 끄트머리엔 선명하게 3co장 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리 알아챘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그대로 입고 나가기라도 했다면 남은 군생활을 따뜻하게 보내겠다는 나의 희망이 사망이 될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허겁지겁 보급품들을 챙겨서 보급병 후임에게 전해주고 다시 보급품을 받아왔다. 전의 그 유물이었다.
    후임들이 자기것과 바꿔준다고 했지만 어차피 몇달 남지 않은 군생활이고 괜히 뺏는 기분이 들어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남은 군생활을 6.25 코스프레와 함께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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