떳떳하게 '집안 말아먹을 짓' 했습니다
[오마이뉴스 임윤수 기자]새내기 대학생이 된 큰딸과 고등학교 2학년인 작은딸을 데리고 촛불집회엘 다녀왔습니다. 5개월이 모자라 이번 총선엔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지만 민심이 뭐고 사람들이 어떻게 자아를 표현하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한마디로 데모를 체험시켜주고 싶었던 겁니다. 촛불집회를 두고 문화행사니 뭐니 하지만 제 딸에겐 분명 '데모'라고 정의를 해 주었습니다. 너희들은 시위를 하러 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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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딸과 촛불 집회에 가다
옛날 어른들 같으면 아비가 딸들에게 데모를 가르치고 권장한다고 '집안 말아먹을 짓'이라고 노발대발 하셨을 겁니다. 사실 20여 년 전만 해도 자식이 데모대에 참석한 게 들통나면 집안이 들썩거리도록 큰일이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대도 바뀌었고 가치관도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전 딸들에게 체험적으로 데모를 보여주고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군중심리에 휩싸여 책임감 없는 데모를 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되기에 스스로 책임지고 떳떳한 명분을 축적해 성숙한 의사표현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데모란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집회 장소로 가기 전 왜 촛불집회에 참가하는지를 나름대로 설명하고 탄핵정국에 대해 토론하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특목고를 나와 선생님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사범대학을 진학한 큰딸이기에 폭넓은 사고와 사리분별의 근간이 될 수 있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교육발전에 기여한 것도 분명하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부 선생님들처럼 되지 말라고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하기야 어느 집단이든 도움이 안 되는 무리는 있게 마련입니다. 제가 듣는 일부 선생님들은 자기 할 일은 않고 목소리만 키운다는 부정적인 이야기도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생님, 집단에 누가 되고 누군가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는 당당한 선생님으로 성장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무책임한 행동과 잘못된 권리주장이 어떻게 비판받고 어떤 원성을 듣는지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어 촛불집회에 참가를 권했고 동행을 하였습니다.
딸아이에게 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떻든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역사가 오늘의 대통령 노무현님을 평가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헌정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이길 바라는 '탄핵안 가결'이라는 것이 가능하도록 민주의 장을 펼쳤다는 그 자체가 평가를 받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대통령 중에 탄핵을 받을 만한 대통령이 정말 없었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권을 찬탈하고 인권을 유린하다 못해 난도질을 한 대통령도 있었고 수 천억 재산을 축적한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국론을 농락하고 여론을 농간한 대통령도 있었으며 그때도 헌법에 탄핵조항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탄핵안 가결'은커녕 '상정'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헌법에도 이번에 야당의원들이 들고 나온 탄핵조항이 있었다면 그들은 스스로 극치의 비겁함을 보여준 것이라 했습니다. 독재가 되었든 폭력이 되었든 힘있는 권력 앞에선 꼬리 내린 개처럼 살랑거리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천하려 이것저것 다 풀어놓으니 걸신들린 승냥이처럼 달려드는 저들이 말하는 작금의 상황이, 그들이 말하는 의회주의며 다수의 원칙이라면 너무 웃기는 얘기라고 말입니다. 정말 자유와 방종을 구분 못하는 하류급 인간들이 정치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숙사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는 큰딸을 집으로 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곤 작은딸과 함께 시내로 나갔습니다. 주차장 근처에선 전경들이 시멘트 바닥에 식판을 벌려놓고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도 공권력에 동원된 탄핵정국의 희생자입니다. 시내에 들려 선물을 한가지씩 사주고 춘천닭갈비 집엘 들려 이른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녁을 먹으며 딸들도 알고 있는 아빠의 금주이야길 꺼냈습니다. 손에 술잔을 잡아본 게 어느덧 2년하고도 20일이 지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20년이 훨씬 넘게 즐겨 마시던 술을 금주한 게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술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좋아하기만 한 게 아니라 많이도 마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고 손이 떨린다는 수전증이나 건강상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대개 저녁에 술을 많이 마시면 다음날은 물론 며칠 동안은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지고, 술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2년 전 2월 28일 새벽까지 술을 폭주를 했는데 잠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을 때 또 술이 먹고싶어지는 비정상적 자각증상이 발생했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오전 내내 속 쓰려 빌빌거릴 판에 또 술이라니, 이게 중독으로 들어선 증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금주를 생각했습니다. 술잔만 손에 들지 않으면 술은 끊게 되는 거라고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한 결과 지금껏 술잔은 한번도 손에 잡아보질 않았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 생리란 게 그렇습니다.
술을 끊었다고 하면 '그냥 받아 놓기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받아 놓으면 '이왕 받은 거 입에만 대라'고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왕 입댄 거 딱 한잔만 마시라'하고.... 그러다 보면 술을 끊는다는 게 요원할 것 같아 처음부터 술 잔 자체를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임을 거르거나 회피하는 일은 없습니다. 남들이 술 마실 때 전 맹물을 마시거나 음료수를 마십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며 술 마시는 모임에 끝까지 앉아있다 보니 솔직히 좀 지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술 마실 때 보지 못했던 제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판 넘는 LP판처럼 한 얘기 또 하는 친구,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아닐 사실을 고집으로 밀어대는 친구, 뭐가 그리 당당한지 무조건 큰소리부터 쳐보는 친구....
술 마시는 대개의 사람들은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겁니다. 잘못된 술버릇이 주사(酒肆)를 늘려 주정꾼이 될까봐 그랬을 겁니다. 술은 마시되 조금 긴장된 분위기에서 절제하는 마음도 함께 키워가라는 현명한 가르침인 듯 합니다. 그런 마음, 어른 앞에서 술을 배우라는 그런 마음으로 촛불집회엘 동행했다고 딸들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꽤나 짓궂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친구랑 싸워 이긴 적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있습니다. 덩치가 훨씬 큰 선배나 친구에게 흠씬 얻어맞아 식식거리면 엄마는 '지는 게 이기는 거'라 했습니다. '맞은 사람은 두 발 펴고 편히 자지만 때린 사람은 두발 오그리고 잔다'고도 했습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란 말엔 도저히 동의 할 수 없었지만 '맞은 사람이 두 발 뻗고 잔다'는 말엔 금방 동의가 갔습니다.
'지는 게 이기는 거'
코피라도 터뜨려 상대방을 무너트리면 잠시는 승자로서 의기양양해 질 수 있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근심덩어리를 가슴에 안아야 했습니다. 얻어맞은 애가 괜찮은지? 그 집 어른들이 찾아와 야단을 하는 것은 아닌지? 학교에라도 알려져 선생님들에게 꾸중을 듣거나 벌을 서는 것은 아닌지? 하여튼 이런저런 걱정거리로 꺼낼 수 없는 가슴앓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재수 없게 얻어맞은 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얻어맞았다는 그 사실이 억울하고 울화통이 치밀어 오를 뿐 불안하거나 근심해야 할 일은 없었습니다. 가끔은 맞은 자리가 시퍼렇게 멍들어 다른 사람들 보기에 좀 민망할 뿐 별다른 불편도 없었습니다. 하여튼 겉으로 보이는 몸뚱이야 조금 그랬지만 마음만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상대가 나보다 작은 친구에게 졌다면 맞았다는 사실보다 덩치 값도 못했다는 사실에 더 신경이 쓰였을 텐데 다행스럽게 제 기억엔 작은 덩치의 친구에겐 진 적이 없는 듯 합니다. 상대가 선배거나 덩치가 큰 친구였다면 그렇게 쪽팔릴 일도 없었습니다. 더더구나 상대가 큰 덩치에 쌈꾼으로 소문난 문제아였다면 맞은 자체가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덩치가 비슷하거나 아무리 작아도 상대가 집안 촌수로 나보다 높을 때는 절 때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촌수를 무시하고 때리기라도 하면 '인륜을 모르는 호래자식'이라고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집성촌에서 자랐기에 웬만하면 다 일가고 친척입니다.
그때 엄마가 들려주던 '지는 게 이기는 것'이란 말과 '이긴 놈 다리 오므리고 잔다'는 말 그리고 '인륜을 무시한 호래자식'이란 말을 똑같이 딸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 3월 12일 여의도에서 탄핵안을 가결시켰다고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며 천방지축 오만을 떨던 그 나리들 어떤 잠을 자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엄마가 들려주던 말 대로라면 다리를 쪼그리고 불편한 잠을 잘거라 생각됩니다. 거대한 쪽수로 몸집 작은 최고통치권자인 대통령을 짓밟듯 억누르고 자행한 그들만의 승리에 어떤 의미가 있나 모르겠습니다. 내심 이런 행동이야말로 '인륜을 모르는 호래자식 이 저지르는 패륜적 행동'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매일 시비만 일삼던 덩치 큰 그들이 얻어낸 그날의 승리(?)는 소위 '이기고도 졌다'는 싸움 일 거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큰 덩치도 모자라 패거리까지 동원하는 비겁한 싸움으로 쟁취한 졸렬한 승리에 도취되어 만세를 부르던 그들이 왠지 측은해 보이기까지 하다고 하니 딸들도 고개를 끄덕여 줍니다.
딸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깨우쳐주고 싶었습니다. 장기적 안목으로 보면 '지는 게 이기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론 이겼다는 자체가 비겁한 행동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집회라고 하니 한 바탕 밀고 당기는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던 딸들이 너무 차분하고 질서정연한 집회가 의외인 모양입니다. 어린 마음에 조금은 싱겁다는 생각도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행사 내내 호흡하듯 맞춰 가는 주변사람들과의 이런저런 행동이 알게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도 해소시켜주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빠와 똑같은 소릴 하니 실감이 나는 모양입니다.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극복되어야 하는 지를 조금은 알겠다고 합니다. 큰 아이가 한 마디 합니다. '아빠! 각기 다른 입으로 같은 말을 하면 그것은 곧 진리래'하고 말입니다. 딸들에게 진리를 보여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구시대적 구호가 된 듯 하지만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였습니다. 아직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좀더 많은 수혈을 필요로 하는 모양입니다. 개개인이 밝혀드는 촛불하나가 민주주의를 키워 가는 피 한 방울, 양분 한 술이 될 것을 확신하기에 제 딸의 손에 촛불을 들게 하였던 것입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을 때 딸아이 앞에서 떳떳한 아빠로 기억되고 싶어 촛불 하나 밝혀들고 두 딸을 데리고 흐르는 민심에 동참했습니다. 어른 앞에서 술을 배우라고 했듯 제 딸에게 민주시민으로 의사표시 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체험시켜 주는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방관하지 않고 침묵하지 않는 아빠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촛불집회의 동참 경험이 딸들이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집안 말아먹을 짓'이라고 했을 집회엘 두 딸 데리고 참가하니 모처럼 떳떳한 아빠가 된 듯합니다./임윤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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