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 </div> <div> </div> <div> 열흘 전쯤이었나, 손녀딸아이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왔어요. 여름휴가를 내기가 쉽지 않다면서요, 추석 때는 꼭 내려올 테니 한복을 차려입고 공원으로 나가 같이 바람도 쐬고 사진도 찍자고 하더군요. 갑자기 사진이라니요, 난 썩 내키지 않았답니다. 타지에서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나를 챙기려는 손녀의 마음 씀씀이는 고마웠지만, 이제 와 사진은 찍어 무얼 하겠어요. <br> 당신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이런 내 맘을 모르겠지요. 그래요, 무심한 당신, 참 이르게도 떠났습니다. 나를 혼자 내버려 둔 채로 액자 속에서 밝게 웃고 있는 당신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사진 속 당신 얼굴은 어찌 그리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지. 나는 이제 거울 보기도 싫어졌답니다. 목욕을 갈 적마다 동네 아줌마들이 다 모여들어 피부 결이 어쩜 이리도 고우냐며 시끄럽게 떠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내 몸은 파삭하게 마른 나뭇가지 꼴이지 뭐예요. </div> <div> </div> <div> 영정 사진을 준비해두어야 한다는 것쯤이야 나도 알지요. 한 번은 복지관에서 연락도 왔었답니다. 무료로 사진을 찍어주는 행사가 있다고요. 옆집 할멈도 흰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기고 복지관으로 가 사진을 찍었을 겝니다. 사람들 참 미련도 하지. 영정 사진을 꼭 늙은 모습으로 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답니까? 나는 젊은 날에 찍어둔 사진 중에서 골라두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당신과 마주 앉아 밥을 먹던 예전의 모습으로요.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크림을 찍어 바를 때 보는 거울 속의 내 얼굴은 그저 나 혼자 보는 것으로 족합니다.</div> <div> </div> <div> 손녀딸아이에게 전화가 걸려온 그다음 날에, 장아찌를 한 통 담갔답니다.<br> 입맛은 없었지만 달걀이라도 한 판 사둘까 싶어 동네 마트에 간 것이 시작이었지요. 마트에 진열된 양파가 유독 탐스럽더군요. 갓 제철을 맞이한 햇양파는, 꼭 우리 첫째 젖먹이 시절 볼처럼 통통한 것이 윤기가 자르르 흘렀습니다. 덜컥 양파 한 망을 사서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장아찌를 담가야겠다 싶었어요. 속이 단단하게 여문 제철 양파의 맛을 손녀딸아이에게도 맛보여주려면, 장아찌가 답이었지요.</div> <div> </div> <div> 당장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한 조각만 씹어도 입맛이 확 살아나는 장아찌를 담그려면 청양고추가 필요했거든요. 이번엔 마트가 아니라 길 건너 은행 옆 골목을 따라 쭉 늘어선 난전으로 갔어요. 마트 청양고추는 어디 공장에서 찍어내기라도 하는 건지 풋내만 나고 통 맵지가 않아요. 난전 두 번째 자리의 할멈만이 내 맘에 쏙 들게 제대로 매운 고추를 팔곤 했지요. <br> 한데 여름 햇살이 어찌나 지독했던지, 고추는 쪼글쪼글 다 말라가고 있더군요. 이렇게 시들시들해서 어찌 쓰냐며 새 걸 내놓으라고 타박을 하고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거두고 이천 원을 내밀었습니다. 뜨거운 햇볕에 그을려 파삭파삭 말라가는 것이 고추만은 아니었으니까요. 양산을 든 채로 신호등을 기다리며 서 있는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등에선 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으니, 온종일 난전에 나와 있는 그 할멈은 오죽 했겠습니까.</div> <div> </div> <div> 오늘쯤에는 장아찌 국물을 다시 끓여야 해서, 장아찌가 들은 유리단지를 냉장고에서 꺼내 뚜껑을 열었습니다.</div> <div> 싱그러웠던 채소들이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보이네요. 양파와 오이의 희고 푸른 살결에 서서히 갈색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건더기를 체에 밭치고, 국물만 따라내어 불에 올렸답니다. <br> 간장물을 끓여 식히고 나면, 다시 원래 있던 용기에 부을 차례예요. 며칠 만에 세상의 빛을 만나 한숨 돌리고 있던 양파와 오이, 그리고 청양고추는 다시 어둠 속에 잠기게 될 테지요.<br> 채소들 위로 간장물을 붓고 있자니, 문득 내가 이들을 가을로 데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리단지 안에 우수수 쏟아졌던 여름의 조각들이, 이제 하나둘 낙엽이 되어가네요. 이 유리벽 안의 시간은 나를 둘러싼 공기보다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며칠 밤이 지나면 이 낙엽들은 가을에 멈춰 서서 가만히 나를 기다려주겠지요. 추석 즈음에는, 손녀딸아이와 내가 마주 앉은 밥상에 이 장아찌가 오르게 될 거예요.</div> <div> </div> <div> 국자에 남은 간장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봅니다. 시들어버린 고추가 그래도 제 역할을 톡톡히 했는지, 맵싸한 것이 입맛을 당기게 하네요. <br> 채소를 갈무리해 저장 음식을 만드는 건, 자연의 한순간을 간직하는 일이라 생각했었습니다. 자연의 열매가 반짝반짝 빛을 내뿜는 순간에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재우고 끓이고 졸여서, 두고두고 만끽하기 위함이라고요. 한데, 실은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br> 세월 앞에 시들어가는 것들을 좀 더 붙들어보려는 노력이, 이 장아찌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잖아요? 이 한 계절, 아니 당장 오늘 하루조차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마지막 숨을 토해내고 있는 작은 생명들을 다음 계절까지 붙잡아두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바지런히 손을 움직여 장아찌를 담그고 잼을 졸이는 게 아닌가 싶어요.<br> <br> 당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그날 우리는 사진관으로 향했었지요. 의자에 앉아 등을 꼿꼿이 세우고 카메라를 쳐다보는 당신의 모습을, 나는 먼발치서 바라보며 그저 눈물만 흘렸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아채고 미리 찍어둔 그 사진 덕분에 우리는 지금 이렇게 함께 있네요. 액자 속 당신의 시간은 30년 전에 멈춰 있고 야속하게 나의 시간만 흘렀지만, 그래도 사진 덕분에, 나는 당신을 생생하게 추억할 수 있어요. </div> <div> </div> <div> 장아찌에 누름돌을 얹으려다 말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서랍 속에서 옥색 저고리를 꺼내 몸에 대어봅니다. 거울에 비친 옥빛이 참 곱기도 하네요. <br> 그래요, 이 저고리를 꺼내어 입고 사진을 찍어야겠어요. 시들해졌다고 마냥 초라하게 여길 것만은 아니니까요. 더 늦기 전에, 우리 손녀딸아이가 두고두고 꺼내어볼 수 있는 사진 한 장, 만들어주어야지요.<br> 당신, 그곳에서 혼자 외롭더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손녀딸아이가 추억할 사진을 많이, 아주 많이 만들고 난 후에야 나는 맘 편히 당신 곁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div> <div> </div> <div> 나의 시간이 멈춘 후에도 사진만은 손녀딸아이의 곁에 남게 되겠지요. 하루 뒤, 또 하루 뒤, 짧은 하루가 차곡차곡 쌓인 후에 닿게 될 어느 곳에서, 우리는 똑같이 눈가에 주름이 진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 보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면, 사는 게 그리 쓸쓸한 일만은 아니다 싶네요. 오늘은 찬물에 밥 한술이라도 든든히 먹고 자야겠어요.<br> 안녕히 주무세요, 당신.<br> 많이 보고 싶습니다.</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div align="right">- written by 설탕연필 / 밤의 작가들<br></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