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코리아 극장에서 ‘그 애’와 〈백 투 더 퓨쳐 2〉를 봤다. 영화는 무척 재미있었지만 정작 그때 영화를 보는 ‘그 애’가 더 신경 쓰였다. 영화가 끝나고 밥을 먹으러 간 경양식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듣고 ‘그 애’가 말했다.
“노래 좋다. 경쾌하고 신나는데 왠지 모르게 좀 슬픈 구석이 있네.”
노래 제목이 ‘보라빛 향기’라는 건 ‘그 애’를 집에 데려다주고 들렀던 레코드 가게에서 알았다. ‘향기에 색깔이 있다니 말이 되나?’라고 생각했지만, 카세트테이프를 두 개 사서 하나는 포장했고 하나는 돌아오는 길에 들었다. 이내 ‘그 애’의 말이 맞았다는 걸 깨닫고 불안해졌다. 가사처럼 “길을 걷다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될 것 같아서.
잠들기 전, 영화에서 봤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와 공중부양 스케이트보드(호버보드), 신발 끈이 자동으로 조절되는 운동화… 그때는 너무 아득해서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그 애’와 나의 2015년.
“미래를 기억하십니까?”
2015년의 ’그 애’
사실 위 내용은 조작한 기억이다. 〈백 투 더 퓨쳐 2 (Back to the Future Part 2,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1989)〉의 국내 개봉은 1990년 1월 13일, 강수지의 ‘보라빛 향기’의 발매는 1990년 4월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그 애’랑 영화를 본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수줍어서 이성이랑 눈도 제대로 못 맞추던 시절, 누군가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얘기할 만한 용기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더 이상 소년이 아닌 남자’의 마음속에도 아직 ‘그 시절의 소년’이 살고 있어서, ‘어떤 신호’가 수신되면 다시 고개를 내민다. 작년 러블리즈의 ‘어제처럼 굿나잇’을 들었을 때 포착된 이 신호는 ‘Candy Jelly Love’, ‘Hi~’, ‘놀이공원’을 거치며 주파수를 높이더니 ‘Ah-Choo’에 이르러 마음속을 가득 채우게 됐다. 한 번도 실재한 적 없으나 언제나 상상하곤 했던 ‘그 애’의 존재, 그리고 함께하고 싶었던 시간.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아는 것들
많은 이들이 러블리즈의 레퍼런스로 강수지를 이야기했지만, 정작 레퍼런스에서 뽑아낸 엑기스는 작곡가 윤상의 음악적인 인장과 함께 가져온 일종의 정서에 있다고 생각한다. ‘보라빛 향기’, ‘흩어진 나날들’, ‘시간 속의 향기’, ‘혼자만의 겨울’로 이어지는 일련의 윤상 작곡, 강수지 노래들에는 ‘손끝이 닿으면 깨질 것처럼 투명한 슬픔’이 녹아 있었다. 심지어 짝사랑이 아닌 서로 좋아하는 내용의 밝은 템포 곡에도 ‘지금은 행복하지만 언제까지 잘 될 수 있을까’ 하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떠다녔다.
‘어제처럼 굿나잇’은 ‘흩어진 나날들’과 이별의 체념을 공유하고, ‘놀이공원’과 ‘혼자만의 겨울’은 깨져버린 사랑의 반짝거리던 순간을 추억한다. ‘보라빛 향기’에서 ‘그대’는 ‘나’에게 “길을 걷다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사랑을 건네준 사람”이지만, ‘내 맘을 답답하고 아프게 만드는 사람’이기도 해서 불안하다. 이 불안함은 세월을 넘어 ‘Ah-Choo’에서 다시 환기되는데, 참기 힘들 만큼 좋아하지만 ‘너’에게 난 그저 “소중한 친구”일 뿐, 좋아한다고 말하면 친구조차 될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냥 재채기를 하고 만다.
‘Ah-Choo’ 뮤직비디오 세트는 영화 〈러브레터 (이와이 슌지 감독, 1995)〉에서 후지이 이츠키가 있던 도서관을 떠올리게 한다. 무심히 책을 읽고 있는 소년의 주변을 맴도는 소녀는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지만 말을 걸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실 소년도 책을 읽는 척하고 있을 뿐, 소녀의 존재를 눈치채고 먼저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소년’은 ‘소녀’ 못지않게 수줍음이 많았으니까. 소년이나 소녀나 좋아하는 설렘을 참을 수 없지만 거절의 불안을 이겨낼 용기는 없던 그 시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나서야 알게 되는 뒤늦은 후회.
‘그 애’와 함께 가고 싶었던 놀이공원
2015년 10월 21일은 〈백 투 더 퓨쳐 2〉에서 주인공들이 타임워프 해 도착한 날이다. 영화는 시리즈 30주년을 맞이해 다시 개봉하지만, 하늘을 나는 자동차와 호버보드는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득하기만 했던 미래의 시간은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지만, ‘그 시절의 소년’과 ‘그 애’는 과거로부터 돌아올 수 없다. 하지만 두근거리는 설렘과 알 수 없는 불안 위에 차곡차곡 설계된 ‘러블리즈 월드’에서라면, 왠지 용기를 내어 ‘그 애’에게 말을 걸 수도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