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현리전투에 대해서는 사실 다들 뭐 다양한 말이 많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군단장인 유재흥이 적전 도주를 해버렸고 군단장이 사라지자 군단 이하 병력들은 모두 패닉에 빠져 도망쳐버렸다! 뭐 이런 이야기죠. 일단 하나 사실인 것은 유재흥이 군단을 통제하는 것을 실패한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종의 패닉에 빠져 국군이 우루루 붕괴된 것도 어느정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유재흥 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문제인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현리전투 이전의 상황을 보도록 합시다
현리전투의 핵심이 된 오마치고개의 위치 국군 3,9사단이 3군단, 국군 5,7사단 미해병1사단, 미 2사단으로 구성된 쪽이 미 10군단이다. 아래 표시된 하진부리는 3군단은 보급소로 3군단 지휘소의 위치이기도 하다.
오마치 고개는 이 전투에서 가장 핵심된 지역이라 볼 수 있었습니다. 국군 3군단의 보급로는 상당히 열악했는데, 지도만 보셔도 알겠지만, 저 오마치 고개가 접수될 경우 3군단의 보급은 그대로 바이바이 3군단은 바로 포위될 위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3군단은 오마치 고개에 9사단 27연대 1개대대를 예비대로 배치하여 고지를 보호코자 했으나, 여기서 다소 트러블이 생겨납니다. 작전 구역에 개편하는 과정에서 오마치 고개가 미 10군단쪽으로 넘어가 버린 것이죠. 뭐 이정도야, 높으신분들이 책상에 앉아 자로 지도를 열심히 자르다보면 으레 있는 일이죠. 그러나 이 알몬드 중장이 다소 까칠하게 나오게 됩니다. 자신의 작전구역에서 나가달라고 요청한 것이죠.
어디서 감히 우리 작전구역에서 굴러다니는거야!
3군단은 이에 국군 7사단의 병력을 오마치에 주둔시키고 보호해준다면 물러나가겠다고 버텼으나, 알몬드는 미 8군에 쫓아가서 항의한 끝에 결국 국군 3군단은 오마치 고개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게 됩니다. 7사단이 병력을 주둔해줬냐고요? 그럴리가. 뭐 그래도 국군 5,7사단이 뚫리지만 않는다면 별일없는 문제죠! 그쵸!
어차피 전선은 촘촘하자나? 어예!
문젠 중공군이 노리는 놈들이 이 국군 5,7사단이란 것정도 뿐이었을 겁니다. 당시 중공군은 국군을 집요하게 공략했습니다. 전선에서 약한 부분을 공격하여 돌파하는 것은 제파식 전술의 기본 중에 기본이죠. 전선 돌파 후 포위 섬멸은 이미 소련이 독일과 일본에게 멋지게 선사한 전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돌파 후 포위 섬멸전으로만 유엔군은 쩌어기 개마고원에서부터 여기까지 이미 내려온 상황이기도 했고요. 따라서 전선을 최대한 촘촘하고 견고하게 짜는 것만이 해답이었겠습니다만, 당시 국군은 기껏해야 한국전쟁으로 경험이나 쌓고 있던 애송이들이었고 중공군은 항일전쟁-국공내전이라는 전쟁과 전쟁을 거듭한 베테랑들인데 비교를 당연히 거부합죠.
중공군의 목표는 5,7사단을 돌파하여 오마치 고개를 비롯한 3군단의 후방 주요고지를 점령하여 포위-섬멸한다는 계책을 구상합니다. 즉 이 한방에 3,5,7,9사단을 모조리 쓸어버릴 계책을 구상하게 된 것이죠. 굉장히 대담한 전략이었습니다만, 어설프지 않게 준비는 착실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5월 16일 대규모 공세를 감행합니다.
인해전술 아니라고!!
그러나 중공군의 의도와는 다소 몇가지가 빗나가게 되는데, 일단 우리의 국군 5,7사단은 말그대로 고속도로 뚫리듯이 돌파당해버립니다. 이때의 패배 때문에 아직도 7사단 책들 중 하나를 잘 살펴보면 현리전투에서 부들부들거리던 것을 상세히 적은 책이 있습니다만, 뭐 현역분들 아니면 찾기도 어려울 겁니다. 어찌됬던 중공군은 공격준비포격으로 5,7사단의 통신망들을 죄다 작살내버린 뒤 빠르게 공세를 가했는데, 이로 인해 5,7사단은 광탈 본인들도 정신을 못차린체 무질서하게 후퇴하게 됩니다. 이로서 중공군 12,27병단은 그 목적을 달성했으나 미 2사단을 돌파 더 후방으로 침투하기로 했던 60병단은 미 2사단의 괴랄한 저항에 막혀 공세에 실패하게 되죠. 따라서 5,7사단도 미 2사단마저 뚫렸다면 말그대로 전멸 위기였을 겁니다만, 연대 하나가 작살나면서까지도 결국엔 다시 전열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여 전멸만은 피합니다.
그리고 3군단 우측으로 가해진 공세 역시 수도사단을 비롯한 국군의 저항으로 인민군 2,5군단도 돌파에 실패하게 됩니다(인민군한테까진 안진다!!) 이로 인해 3중 포위망은 실패가 될 뻔 하지만 아주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습니다.
'오마치 고개'가 적의 손에 넘어간 것이죠.
이해가 안가는 점은 국군 7사단은 붕괴되는 과정에서 국군 7사단 예하 5연대가 무너지면서 오마치 고개가 노출되었고, 이를 수색대를 통해 확인까지 했습니다만(17일 00:30), 3군단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오마치 고개는 적의 소수의 선발대가 우선 점령한 상태였는데 이미 적에게 개털리고 있던 7사단이 이를 다시 회복할 엄두를 낼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3군단에게 통보는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한편 3군단도 바보는 아닌지라 7사단의 붕괴 소식을 알게되자, 9사단은 전방의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는데 우선 야포를 비롯한 중장비와 병력을 사단 지휘부가 위치한 용포로 철수시키고 상황을 지켜보는데, 문제는 이 한 곳에 옆동네에서 처발리고 도망쳐온 7사단 5연대 병력들부터 해서 3사단 병력들까지 죄다 이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버리게 됩니다. 지휘계통도 없이 엉망으로 모여든 이 곳은 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만, 아직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멸망의 전주곡이 시작된 것은, 적의 공세가 시작된 16일에서 하루가 지난 시점인 17일 오마치 고개에서 총격이 날아오고 확인을 위해 보낸 정찰대가 돌아오지 않자, 오마치고개가 함락당한 사실을 알게됩니다.(17일 06시 무렵)
좆되버린 3군단. .
오마치 고개가 빼앗긴 사실을 알자, 9사단장은 29연대 예하 3대대에게 탈환지시를 내렸으나, 어쩐지 실패하게 되었고 3사단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3사단은 예하 연대에 다 임무가 있음을 들어 거부하게 됩니다. 그동안 7사단 3연대 2대대가 다시금 오마치 탈환을 위해 공세를 가했으나 실패하고 되려 중공군 2개연대가 오마치 남쪽 고사리재를 공격하면서 빼앗기게 되는데, 이 쯤을 기해서 이미 오마치 고개엔 적 1개사단 정도의 병력이 위치한 것으로 판단하게 됩니다.(17일 16:00)
그러나 의문이 남는 것은 분명 17일 오전을 기해서 3,9사단 즉 3군단 대부분 병력이 이미 한군데 집결했고 위에서도 언급되었다 싶이 7사단 함락 소식을 듣고 적의 공격이 있기도 전에 후퇴한 것이기 때문에 전력이 온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3,9사단은 오마치 고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너무나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29연대 3대대의 공격의 실패하자 그냥 방치해버린 수준이 되었죠. 오마치 고개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면 점령 사실을 알자마자 정찰을 통해 적의 규모를 파악하고 탈환에 나섰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정찰도, 공격도 하지 않은 체 시간만 보내다가 거의 하루가 지나서야 진짜 좆된거 같은데? 하고 있었으니... 만약 06시에 점령사실을 알자마자 9사단장이 아예 29연대에게 탈환 지시를 내렸다면 그때는 중공군이 겨우 중대급 정도 밖에 위치하지 않았던 것으로 예상된 것을 감안하면 말그대로 골든타임을 통채로 쓰레기 통에 던져버린 셈이 되버린 것이었습니다.
당시 3,9사단의 행동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천지였다. 놀랍지만, 이 후엔 더 이유를 알수없는 짓을 한참 더 하게 된다.
여튼 여기서 가장 궁금해할 의문의 인물 '유재흥'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 유재흥은 17일 14:00경에 군단 지휘소(위에 지도에서 하진부리에 위치함)에서 연락기를 타고와서 3,9사단장을 비롯한 연대장들을 소집하여 작전회의에 들어갑니다. 작정회의 내용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작전이었는데, 우선 7사단이 붕괴되었으니 후퇴작전을 위해 시작된 작전회의에서 유재흥은 3,9사단장에게 각 1개연대를 차출하여 오마치 고개를 탈환하고 그동안 3사단장 통솔 아래 3군단 병력을 하진부리로 철수시킬 계획을 짜게 됩니다. 이에 3사단장에게 군단 지휘권을 이양하고 자신은 인근 군단에 후퇴작전에 대한 지원과 보급을 요청하기로 하고 떠난 것이 15:30 경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유재흥이 적전도주를 했다는 썰의 원인인데, 뭐 어찌보면 적전도주가 맞고 자신의 책임을 3사단장에게 넘긴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여기서 연락기 타고 나가는 모습은 군단장이 적전도주를 했다!라는 썰이 자자하게 퍼지면서 사기에 악영향을 준 것은 맞는 건 확실합니다. 그러나 유재흥이 달리 멀리간 것도 아니고 군단 지휘소로 다시 돌아갔으며, 이후 그 전설적인 밴플리트와의 대화록이 나오는 건 이후의 이야지만... 뭐 어찌되었던 일단 명령은 던져주고 나왔으니 실행은 해야겠지요.
근데 여기서 말도 안돼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우선 3사단장과 9사단장은 각 사단에서 가장 전투력이 강하다고 평가한 18연대와 30연대에 오마치 탈환을 명령하기로 하고 17일 밤 9시경 탈환작전이 시작되는데...
도망을 가네?
아직도 먼저 대규모로 후퇴를 시작한 범인은 나오지 않았지만, 확실한건 공격을 시작하기로 한 18연대와 30연대가 우선 도망을 치기 시작합니다. 후퇴사연은 뭐 다들 기구한데,
18연대 측의 주장은 '우린 공격준비 중이었는데 30연대가 째더라. 그래서 우리도 쨋다.'
30연대 측은 '우린 공격명령 받은 적도 없고 후퇴하는 사단 엄호가 우리 임무였다. 근데 나중에 연대 본부랑 무전도 안돼서 후퇴했다.' 근데 또 연대장은 '휘하 대대에 공격명령을 내렸는데, 갑자기 무전 불통이 되었다. 사단 지휘부를 찾으려했는데 찾지도 못했고 그래서 후퇴했다.'
즉, 결과적으로 보면, 서로 저새끼가 먼저 째서 나도 쩃다. 라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러한 혼란이 가중된 이유 중 몇가진 일단 3군단이라는 대 병력이 현리라는 좁은 지형에 밀집되면서 대규모 무전 혼선이 일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무전이 먹통이 되어버린 건데 이로 인해 예하 지휘관들은 자의적으로 장비를 파기하고 병력들만을 이끌고 무작정 후퇴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때 3군단이 보유했던 모든 장비들은 사실상 파기되고 너나 할거 없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도망을 치기 시작합니다. 꽤나 한심한 이야기입니다만 이게 당시 국군의 현실이었습니다. 아니 애초에 제대로 된 군대라고 굴려본 경력이 6년 아니 한국전쟁 이전엔 대대급 훈련도 제대로 못했으니 꼴랑 1년도 안된 군단장 사단장들의 현실이기도 했고요. 뭐 도망칠땐 사단장들이고 연대장들이고 너나 할거 없이 계급장 떼고 몰래 도망치던 낙오병이었으니...
국군의 똥별의 역사는 국군의 태초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시원하게 말아먹은 3군단은 5월 20일경까지 병력의 약 37프로만이 군단 지휘소가 위치한 하진부리로 재수습하게 됩니다. 장비따윈 당연히 다 날라갔고요. 이 과정에서 밴플리트는 자신의 예비대를 동원해서 포위된 병력들을 구조해내고 구멍난 부분을 억지로 틀어막아냈고, 국군 1군단이 대관령 축선을 방어해내는데 성공하면서 다행히 완전 붕괴는 면했습니다. 그리고 밴플리트는 3군단에게 하진부리를 절대 사수할 것을 명령합니다만...
예, 뭐 당연히 박살났죠. 20일 수습된 3군단 병력들은 자연스럽게 21일 무너지게 됩니다. 이때는 유재흥도 있었습니다. 이땐 뭐 변명도 못하죠. 현리때야 지휘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유재흥의 역량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때만큼은 유재흥이 실력발휘를 할 찬스였지만 뭐 자연스레 실패했습니다. 뭐 어찌보면 병력을 수습할 시간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니냐는 변명을 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이때의 대화록이 너무 전설적인지라.
밴 플리트 :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밴 플리트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밴 플리트 :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
예, 뭐 이 대화록이 유재흥이 적전도주를 했다는 증거로 자주 나오는 대화인데 이 대화는 하진부리에서 유재흥이 병력을 지휘했음에도 결국 방어선이 무너지자 한 대화였습니다. 뭐 일썰처럼 육군본부로 도망을 쳐서 밴플리트가 쫓아왔네 어쩌네 하는 것과는 조금은 다르죠. 적전도주만 빼고 나머진 전부 진실이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이로 인해 3군단은 해체되고 국군은 1군단만이 군단편제로 남게 되는데, 1군단마저도 미 8군 예하로 편성되면서 육군본부는 사실상 단 1개 군도 보유하지 못한 보급지원 담당이 되고맙니다.
한번 박살난 것까진 참았지만 두번 박살나면서 인내심의 한계가 폭팔한 밴플리트는 3군단을 해체시켜버린다.
뭐 특이한 점은 이후 23일 반격작전을 통해 다시 전선을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국군의 낙오병들을 수습했는데, 병력의 70프로가 다시 귀환하게 됩니다... 다들 산속에서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죠. 또한 아주아주 굉장히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오마치 고개로 만약 18연대 30연대가 공격을 가했다 하더라도 이미 중공군의 포위망은 거의 완성 단계에 가까웠기 때문에 개털렸을 것이란 것이 최근의 관점이죠. 모든 지휘계통이 붕괴되어 우왕좌왕하며 도망을 친 것이 되려 중공군이 미쳐 촘촘하게 구성하지 못한 포위망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게 만들었고, 너무나도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우왕좌왕 도망친 것이 생존율을 더 높여줬다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실제 전쟁에서 이따위로 도망치다간 적에게 뒤통수 맞고 다 골로간다. 그러나 당시 현리전투의 상황은 중공군은 설마 이렇게 막 빠져나가겠어? 하는 마음과 더불어 완성되지 못한 포위망 덕분에 함부로 포위를 풀 수 없으므로 빠져나가는 적의 뒤통수를 쫓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생존율이 높았을지도..
뭐 어찌되었던 현리전투는 국군의 치욕의 역사인 것은 부정할 것은 없습니다. 단지 병력의 80프로가 전멸했네 유재흥이 육본으로 도망을 갔네 하는 구라가 간간히 섞여서 나오는 글들이 문제일 뿐이죠. 국군도 평소같았으면 이러한 패전에 대해 정신승리를 시전하며 졌잘싸를 시전했겠으나,
정신승리만큼은 전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현리전투에서만큼은 별로 변명할 것도 없이 그대로 인정하는 부분이 많죠. 책 제목만 보면 졌잘싸로 밖에 보이지 않는 '중공군 공세 의지를 꺾은 현리-한계전투'란 도서는 차단선 나가서 할일 없는 제가 읽었던 책이지만 내용은 의외로 담담하게 국군이 좆털린 사실을 그대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7사단이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갈려나간 것부터해서 유재흥에 대해서도 저 위에 언급된 지시를 내린 것 외엔 어떠한 다른 변명도 넣지 않았죠. 정신교육시간에도 간간히 언급되면서 현리전투는 국군의 치부 중 한 부분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타 현리전투를 까면서 주범으로 모는 유재흥도 문제였으나, 군단장 하나 뿅 사라진다고 군단 지휘계통이 마비되는 것 자체가 군단 수뇌부에 아주 큰 문제가 있다는 반증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군단장이 없다면, 부군단장이던 군단장 참모던 작전 지휘를 하는 것이 정상이고 군단 지휘부가 사라지면 예하 사단장 중 선임 사단장이 나머지를 이끌어야 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또한 현리전투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였던 이유 모를 3사단 9사단의 단체 도주의 책임은 아직도 누가 시작했는지를 밝혀내지 못했는데, 밝혀내지 못한 것인지 묻은 것인지는 뭐.. 단지 유재흥이 가장 윗대가리니 유재흥 때문에 3군단 작살난거임! 하고 정신승리 해버리기엔 당시 국군의 문젠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어찌되었던, 이때의 중공군의 공세는 매우 거세었지만. 이후 중공군은 다시는 이러한 대규모 공세를 벌이지 못하게 되는데, 중공군이 벌인 5월공세동안 중공군-인민군 사상자만 8만 5천명이며 이것마저도 중공군 측 주장임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인파가 죽거나 다친 것은 확실합니다. 사실 이는 밴플리트가 영혼을 끌어올린 신명나는 방어전 덕분이긴 하지만요. 이 전투 이후로 소련에서는 휴전제의가 시작되고 아주 길고 긴 휴전협정 논의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