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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장 아들, 독립군의 딸 | 2004.03.14 23:31:34
by 펜더
에피소드 1
대외적으로 시나리오 작가라는 타이틀로 살아가는 내가 몇 년 전부터 골몰하는 주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한국 최고의 느와르]에 관한 이야기 였다. 2000년 장동건, 이범수, 정준호 주연 유영식 감독이 만든 [아나키스트]란 작품을 보고 나서 난 이 [한국 최고의 느와르]에 대한 갈증은 증폭 되었다...그리고 이어지는 자료조사와 취재...그 와중에 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느와르로 재탄생할 수 있는 [최고의 소재]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특경대의 해산]이었다. 한국 근대사에 대해 어두우신 분들이라면 잘 모르시겠지만, 이 특경대의 해산만큼 우리나라의 굴곡진 역사를 대변하는 사건도 없을 것이다. 1948년 9월 22일 법률 제3호 반민법에 의해 구성된 [반민족행위자 특별 조사위원회]...그리고 그 법에 의해 10월12일에 구성된 반민특위... 제대로 된 사무실 개소식은 이듬해 1월 5일날 중앙청 205호실에서 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친일파들을 숙청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와 조직을 갖추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주었던 얼마간이었다.
특경대...특경대는 바로 이 반민특위의 핵심 행동대였다. 친일파를 색출 검거, 체포해 반민특위 법정에 올려세우는 가장 기초적이며 중요한 임무를 띈 조직체였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는 지금 명동 한켠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비석 [반민특위터]라 불리는 비석 위에서만 존재하는 묻혀진 역사가 되어야 했다. 질곡진 대한민국 역사속에 피어난 두개의 거대한 로망스(1940년대 후반 보혁 갈등 구조속에 이승만은 백의사의 힘을 빌어 대한민국이란 틀거리를 유지하였고, 특경대로 대변되는 친일 반민족 행위 숙청 행동세력의 존재에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문제는 이 두개의 조직체가 대한민국 역사를 통털어 가장 낭만적인 “무력세력”이었다는 점이다...적어도 내 시각에 의하면 말이다)로 자리잡은 특경대와 백의사...백의사가 김두환의 영광(?)에 의해 수차에 걸친 드라마화가 되어지면서 회자되는 와중에 (야인시대에 등장한 염동진 장군을 기억하시는가?) 맹인장군 염동진의 전설이 회자되고, 보수 우익단체의 뿌리로 역사에 자리잡는 상황에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 했던 특경대는 소리소문 없이 잊혀져 갔다.
(백의사의 경우 역사의 전면에 나섰던 “영광된 순간”도 있었는데, 바로 김일성 암살미수 사건이었다. 그 덕분인지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할 당시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서울대 의대로 진격하는 것이었다...염동진 장군이 입원하고 있는 그곳을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바로 얼마전 5억이란 예산을 국회에서 거부 당한 뒤 네티즌들의 열화와 같은 성금 러쉬에 의해 다시 힘을 얻게 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 속개의 에피소드를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분들이 명동에서 촛불을 흔들며 반민특위터에서 눈물을 흘리실 때 난 특경대의 그 비참한 최후를 회상하며 분루를 흘려야 했다.
반민특위...제대로 사무실을 열고 반년을 채울까 말까 활동하던 반민특위는 1949년 6월6일 국회 프락치 사건에 의해 반민특위의 든든한 후원자 였던 국회의 소장파 의원들이 제거되면서 그 운명을 같이 하여야 했다...친일 경찰들의 반민특위 습격...그리고 특경대의 해산...이 특경대의 해산은 바로 [친일경찰 노덕술]의 존재 덕분이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독립군 고문에 있어선 따라갈 자가 없었던 친일 고등경찰 노덕술을 잡겠다고 나선 특경대는 역풍을 맞아 그렇게 한조각 비석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친일 경찰들이 트럭에 올라타 반민특위를 습격하던 그때 우리 민족의 정기를 세울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이자, 희망이었던 반민특위의 특경대는 그렇게 개끌려가듯 끌려가 친일 경찰들에게 짓밟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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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2
이번 16대 국회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짓눌렀던 한가지 법안이 있었다.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 규명 특별법]...독립군의 딸이었던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이 들고 나온 이 법...그녀가 2002년 2월 김원웅 의원등과 함께 친일파 708인의 명단을 발표했을때의 그 감동이 지금도 생생한데, 그녀는 그렇게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특별법]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김희선의원...그녀의 할아버지는 바로 독립금 자금책인 김성범 선생님이었다... 그녀의 작은 할아버지는 광복군 제3지대장이었던 김학규 선생이다...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인 김일련 선생은 바로 김구 선생의 명을 받들어 활동중에 일본군에 붙잡혀 옥고를 치루었던, 한마디로 [독립군 집안]의 딸이었던 것이다....그녀가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 규명 특별법]을 들고 나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수도 있지만, 나는 [정말 재수가 좋았다]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었다...독립군의 후손들 10에 6,7명은 생활보호대상자 보더 더 못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 못배우고, 못살며, 힘들게 이 대한민국에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희선 의원은 “성공한 독립군 후손”이라 볼 수 있겠다.
그녀는 국회에 들어가고 나서 다시 한번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겪었던 “울분”과 “비애”를 느껴야 했을 것이다...법사위에서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 규명 특별법]을 통과 시킬때 노브레인 서바이버를 재방송 하는 김용균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의 땡깡들 “나 안해!!” “나 못해!!” “기분 나빠!!”라며 이 친일 청산법의 존재 자체를 무시해야 했다...행정부 차관까지 나서서 이 법의 존재 자체를 불편해 하는 상황...
김용균 의원은 "친일파로 모함해서 정치적 이득 취하고, 못된 짓을 계속해서 재미를 보려는 자들이 있다, 상대를 헐뜯는 도구가 될 수 없도록 정리돼야 한다"면서 이 법의 이면에는 정치적 목적이 있고,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김용균 의원...그의 아버지는 누구였던가...일제말기 경남 합천군 용주면 면장을 하시던...그렇다. 그는 면장의 아들이었다. 면장...일본인 군수가 대충 뽑아서 올리는 그런 존재라 말하는 김용균을 대신해 보훈처 직원은 아주 간단명료하게 면장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말했다.
- 면장이요? 아유...친일파의 대표적인 케이스죠...일제말기때 공출이나 정신대 차출, 징병, 징용을 할때 실질적으로 행정의 최일선에서 진두지휘한게 이들이었죠. 일제말기요? 일제 말기...일제의 수탈이 정점에 올랐던 시점이 언제인줄 아시죠?
김용균 의원의 부친은 합천에서 10년간 면장을 지냈던 분이었다...해방과 동시에 그의 부친은 합천에서 사라져야 했었다.
통탄할 일이었다. 독립군의 딸이 면장의 아들에게 허리 굽혀 사과하며 애걸을 하며 만신창이 가 된 이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 규명 특별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거드름 피며, 큰소리 치며, 법사위 회의실 뒤편에 앉아 있는 독립군 후손들을 친북좌파이며 불순한 세력이라 규정하는 김용균 의원을 붙잡으며 김희선 의원은 빌고 또 빌어야 했다. 면장의 아들에게 말이다....
나중에 언론에 의해 김용균 의원의 부친 되시는 분이 일제시대 때 합천군에서 [면장]으로 지내셨다는 과거가 드러나게 되었다. 김용균 의원은 다시 한번 발끈 하였다. 자신의 부친이 면장을 한 것은 다 주민들이 자신의 부친을 옹립해서 그랬다는 주장이었다....그렇다고 해두자...정말 그렇다고 해두자.
김용균 의원...이분 부친이 면장을 했던 하지 않았던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보자. 만신창이 가 된 친일청산법의 탄생에 일조한 분이기에 이런 오해를 받으셨는지도 모른다.
이창동 문화부 장관에게
-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이런 용공 빨갱이 영화가 버젓이 상영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문화부 장관이 이래도 되는 거요??
그렇다...이분은 우리나라 국민의 1/4이 본 영화를 용공 빨갱이 영화라 매도하며 자신의 부친이 면장을 했던 것에 대해선 “주민들의 옹립”이라 포장하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다른건 다 모르겠다...독립군의 딸이 면장의 아들에게 굽신거리며 법안의 통과를 위해 눈물짓는 가운데, 면장의 아들은 삿대질 하며 이 법의 배후세력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이 법의 통과를 강행 한다고 주장하였다. 씁쓸하였다...나는 이때 이법의 배후엔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길 열망하는 4천5백만 국민들이 있을뿐이라 중얼거리며 TV리모컨을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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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3
2004년 3월 12일 오전 11시...사무실에서 TV를 바라보던 내 눈은 시공을 거슬러 올라가 55년전 명동의 반민특위터에서 벌어지던 백주대낮의...친일 경찰들이 특경대들을 끌고 나와 패대기 치던 그때 그 시절의 스냅 사진이 오버랩 되었다.
의회권력의 쿠데타, 의회민주주의 폭거 라는 언론들의 표현들과 국민들이 외치는 “국회자폭”이란 구호 사이에서 난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이며,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이 나라의 한계라고 중얼거렸다...그랬다 난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개 끌려나오듯이 국회 무술경위들에게 끌려나오는 모습을 보며, 지난 55년전 대한민국의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겠다며 맨주먹으로 일어섰던 특경대가 친일고등경찰 노덕술과 그 패거리들에게 의해 와해되어지고 짓밟혔던 1949년 6월 6일의 하루를 떠올렸던 것이다....
독립군의 딸이었던 김희선 의원은 국회 경위들에게 끌려나왔다...울부짖던 김희선 의원을 무참하게 몰아세우는 국회 경위들과 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 의원들...그때 그 자리에서 김용균 의원은 싱긋이 웃으며 기표소로 향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특경대가 쓰러지는 역사의 한 순간이었다.
면장의 아들은 그렇게 대한민국의 역사를 뒤로 후퇴시키는데 그 힘을 보탰던 것이다.
독립군의 딸이 국회 본 회의장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체로 오열하는 가운데 그녀를 비웃으며 자리에 앉아있는 그들의 모습...그게 바로 우리나라의 현실이다...난 무서웠다. 그녀는 독립군의 딸이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나오게 했던 이들...아니 그녀에게 고개 숙이길 강요했던 김용균 의원은 면장의 아들이다.
그 날 저녁...나는 다시 한번 면장의 아들이 TV에 나와 하는 말에 귀를 의심하여야 했다. 유시민 의원과 전여옥 대표의 설전에 집중하는 가운데 들려온 김용균의원...면장의 아들이 하는 말에 난 충격을 먹었다.
- 변태적인 일이다...
국민들이 의회폭거에 항거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나온 것이 변택적인 일이란 것이다. 그는 계속 어눌한 말투...주제를 흐리는 말로, 토론과 상관없는 자신의 선전을 하기에 바빴다...이미 공천에서 떨어진 이가 왜 그런말을 하는지 난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렇다 공천에서도 떨어졌고, 이제 임기가 한달 남짓 남은 그가...(5월까지이니 좀 더 남았나??) 임기가 4년이나 남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탄핵하는 와중에 그는 국민들이 의회폭거에 항의 하는 정당한 집회를 [변태적인 행위]라 규정하였던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50여년 가까이 우리나라의 기득권 세력은 변하지 않았다...아니 을사오적이 나라를 팔아먹었던 경술국치 이례로 이 나라의 기득권 세력은 변화하지 않았다. 경술국치 이례로 그때의 기득권 세력은 일본에 붙었고, 미국에 붙었으며 그들의 기득권을 사수 하기 위해 권력자들과 손을 잡고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었고, 국민들의 등골을 빼먹으며 살아왔던 것이다...우리가 그 기득권 세력에 맞설수 있었던 지난 1949년의 반민특위는 그렇게 그 기득권 세력의 첨병이었던 친일 경찰들에 의해 짓밟혀야 했다...4.19 의거 뒤의 민주세력의 등장 역시 미완의 혁명으로 남았다...1980년 5월의 봄 역시 탱크를 끌고 온 전두환 군부 독재에 의해 짓밟혀야 했다...그리고 1987년 6월 항쟁...혁명은 성공 했으나, 민주주의는 요원 하였다...양김이 분열하며 이 나라의 역사가 또다시 5년뒤로 후퇴하게 되었다.
2002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은 건국 54년만에 “진보세력”이라 자처하는 노무현에게 나라를 맡기게 되었다...48.5%라는 지지율로 대통령이 된 노무현...그랬다 시대가 그를 원했던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그가 당선되었단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역사에서 보여주어야 할 일의 95%를 달성하였다 말했다...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도 하였지만, 이만한 성과에 만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이 거셀것이란 것도 우리는 예감하고 있었다...대통령 취임 2주만에 탄핵이란 말이 나왔고, 1년동안 무려 114회의 탄핵발언을 들어야 했던 노무현 대통령...난 그에 대한 기대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던지며 민주노동당을 위해 내 투표권을 던지겠노라 다짐하였다.
그리고 2004년 3월 12일이 되었다...대한민국의 건국 이례로 한번도 기득권을 놓지 않았던 친일 수구세력이 마지막 반격을 가했다...사람들은 눈물 흘리며 이 의회 폭거 앞에 항거하겠다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그랬다. 내눈에 보인 임종석의 눈물과 김희선의 눈물...그리고 그 뒤에서 웃으며 동그라미를 그렸던 이재오 의원의 모습과 무던히도 독립군의 딸을 핍박했던 면장의 아들...김용균 의원의 모습을 보며 난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하여야 했다...친일수구세력...우리는 대통령은 바꿨지만, 대한민국의 진정한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해선 생각하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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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4
조순형 대표가 MBC, KBS를 방문하여 항의를 하였다 한다...방송의 편파보도 때문이라고 말한다...16명의 시민 인터뷰 중에서 1명만이 탄핵 찬성이고 나머지 15명이 탄핵반대란 입장을 보인 것이 바로 [편파보도의 증거]라며 화를 내셨다 한다.
최병렬 대표는 언론이 국민을 불안에 빠뜨리는 보도를 계속해 양산해 낸다고 말씀하셨다...어젯저녁 KBS의 쟁점토론에서 민주당 박상희 의원은 젊은이들이 “말잘하는...입만 살아있는 사람들 한테 속아서 중구난방 휘둘린다”란 발언을 하였다. 젊은이들이 괜히 바람에 휩쓸려 탄핵 반대를 한다며 생각 없는 젊은이들을 질타하였다.
난 그들의 발언을 들으면서 5공시절 방송사와 각 언론사의 파란색 칠판이 생각났다. 파란 바탕에 흰 분필로 쓴 [보도지침]에서 “5.18 광주 폭도...보도 불가” 라며 어지럽게 흘려쓴 군부 세력들이 내려보낸 “보도지침”대로 기사를 받아쓰던 기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난 이해 한다...권력을 쥐었던 이들...지난 50여년간 한번도 그 권력을 놓지 않았던 이들의 상식선에서 이번 탄핵에 대해 보이는 국민들의 반응과 언론들의 반응을 그들이 이해 못하는 것을 난 이해한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건 그들이 [탄핵안]을 발의 한 것 자체가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었단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만이 그때 그시절의 국민들로 남아있다고 믿는 그들의 생각이다....
푸념이다....
다른건 다 이해 할 수 있다...그러려니 하고 말이다. 그렇다...그들로선 충분히 그럴수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들이 가진 마지막 온 힘을 쥐어짜내 반격을 했어야 했다. 맞는 말이다. 한식에 죽나 청명에 죽나 그들은 버티면 버틸수록 점차적으로 죽어갈 것이었다. 그들은 장렬히 이 시대의 역사에 길이길이 기록될 한편의 모반을 꿈꿀만 하였다.
그.러.나 내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한가지가 있다.
대한민국의 법통...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었다고 자랑스레 명문화한 대한민국 헌법 앞에서 친일파의 아들이자, 친일세력의 후신인 그들이 독립군의 딸을 민의의 전당인 대한민국 국회 본 회의장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는 것이다.
국회...대한민국 국민들의 민의가 담겨져 있는 곳이 아니던가...아무리 국회의원에 대한 욕을 하여도 국회라는 이름이 가진 그 권능과 명예를 우리 국민들은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존재 근거이기 때문이다...그 권능이 지금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독립군의 딸에게 눈물 흘리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면장의 아들이 웃으며 기표소를 향했고, 웃으며 방송에 나와 촛불을 든 국민들을 [변태]로 매도하는 이때 우리 국민들은 어디에 가 있었던가?
2004년 3월 12일...11시 42분 박관용 국회의장은 이렇게 말을 하였다.
- 대한민국은 전진하여야 합니다!!
그렇다 대한민국 전진해야 한다. 1949년. 대한민국 국민들은 전신주에 붙어있는 “악질적 친일행위 투서함”에 친일파들을 신고하기 위해 그들의 소망과 희망을 담아 하얀 종이에 빽빽이 친일파의 죄상을 적어 집어넣었다.... 55년이 지난 지금 그 투서함이 다시 한번 열리려 하고 있다... 30여일 지난 4월 15일이 되면 그 투서함이 다시한번 세상에 나오게 된다. 면장의 아들이 다시 한번 세상에 나와 면장질이 바로 국민을 위한 일이라 말하며 국민을 “변태”로 몰아붙히는 세상이 돌아오지 않게 다시 한번 힘을 모아야 한다. 다시 50여년이 흐른뒤 우리의 아들딸들이 이런 분노와 허탈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