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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도 안 한 텅 빈 버스를 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빈 버스에 적당히 앞자리에 혼자서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밖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을 할까. 할머니는 좋은 분이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호상이라고들 말하고 누군가는 오열을 했다. 나는 모르겠다. 밖에는 멍청하게 아무 생각이 없이 사는 남자 두 명이 걸어가고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는 알까 모르겠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혼자서 철학자가 되어서 창밖의 사람들을 평가하고 있었다. 죽음을 다룰 땐 꼭 철학자가 되곤 한다. 할머니의 죽음 전의 죽음들에 관해서도 거의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나는 꼭 죽고 나서 슬그머니 잊어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잊어지지만 내가 이룬 것들은 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이름은 본질이 아니지만 그것들은 본질이니까.
사람 한 명이 탔다. 상관은 없다. 어차피 자리는 많고 시간도 많으니까. 나는 사색에 더욱더 잠기기 위해서 일부러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내 생각을 방해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씨가 추웠나 보다 창문에 김이 서리고 있다.
순간 내 사색의 세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 사람이 내 옆자리에 탔다. 그 사람은 내가 하는 생각들이 하찮은 생각이어서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리고 나를 비웃었다. 나는 그가 내 옆에 앉은 순간부터 죽음에 관해서 심도 있게 토론하는 철학자가 아닌 엄마를 잃은 아기처럼 위축되어버렸다. 손이 벌벌 떨렸다. 내 옆에 앉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몸이 굳고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졌다. 부자연스러워진 행동을 들키면 안 되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내가 그 사람에게 겁먹은 것을 깨닫고 나를 더 조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창밖을 바라보며 최대한 당황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침착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 안엔 기사와 내 옆에 앉은 승객 한 명과 나밖에 없었다. 처음보단 정신이 돌아왔다. 고개를 돌려 여기에 왜 앉았냐고 여기에 앉아서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따지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 들었다. 할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 전신이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나의 몸을 찍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도 내가 고개를 돌리지 못한 한 가지 이유였다. 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가 들고 있는 소형 카메라는 내 얼굴을 찍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내 얼굴에 관하여 평가하며 조롱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서움과 파렴치함의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서 고개를 돌리지 않기로 다짐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는 대신 그를 파악하기로 했다. 그의 냄새를 자세히 맡아보았다. 흔히들 성욕에 찌들어 사는 남자들이 풍기는 어둡고 꿉꿉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저 섬유의 냄새들만 허공에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섬유 냄새조차 나에게서 나는 냄새인지 그 옆에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촉감을 곤두세웠다. 그 사람이 일부러 나에게 붙는지 아닌지 파악하는데 애를 썼다. 내가 일부러 창문 쪽에 붙어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과 나의 접점은 하나도 없었다.
버스기사의 태연함도 너무나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버스기사는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자기와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나를 방관하고 있었다. 그가 할 일은 무엇인가. 승객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는 일이 아닌가. 그는 버스 안에서 살인이 일어나도 그저 쳐다만 볼 것 같았다. 버스기사도 한패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기선 내가 아무리 울고불고 소리치고 투쟁해도 아무도 바라볼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 버스에 타서 나를 구해주길 간절히 원했다. 내 옆에 탄 이 변태를 물리치고 버스기사에게 책임을 묻고 싶었다. 용기가 없었다. 용기란 지지하는 자가 있어야 생겨나는 법이니까.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곤욕스러운 짓을 당하는지 묻고 싶었다. 할머니 장례식에 마지막까지 있지 못한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장례식에서 빨리 돌아오라고 재촉한 회사가 원망스러웠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 옆 사람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좌지우지된다는 생각에 흘릴 뻔한 눈물을 거뒀다. 꾹 참았다.
나는 이 상황을 타개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빨리 집에 도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 사람이 먼저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굴뚝처럼 했다.
결국 내가 내릴 차례가 되었다. 떨리는 손으로 내림 버튼을 눌렀다. 온 버스 안에 있는 빨간 불들이 켜졌다. 이젠 내 자의든 타의든 옆을 바라보아야 된다. 이런 경험은 두 번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버스가 멈추기 전엔 절대로 옆을 바라보고 내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버스가 멈추는 순간 번개같이 나가서 이 사람이 찍고 있는 카메라에 내 얼굴이 최대한 나오게 하지 않기를, 이 사람이 자위하고 있는 광경을 절대로 보지 않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버스가 멈췄다. 나는 재빠르게 움직여서 자리를 일어났다. 한 발을 내디뎌서 그 사람 다리를 통과했다. 그 사람은 ‘어이쿠’하며 몸을 의자 쪽으로 붙였다. 다시 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무언가 내 다리에 닿았다. 무의식 중에 그쪽으로 바라보았다. 지팡이였다. 결코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었다. 내가 옹졸하게 느껴졌다. 온몸에 힘이 풀려 옆자리에 기대고 싶었다. 나는 왜 옆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을까. 고개를 돌려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 자리에 서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버스에서 나가는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버스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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