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이름은 구루시마 미치후사. 구루시마 미치야스의 아들로 가문의 후계자이자 1만석 영주이다.
군기가 드높이 휘날리고 내 용맹한 부하들은 출정 준비를 마쳤다. 척후에 의하면 적선은 고작 13척! 지난 수 년간 우리를 괴롭힌 이순신이지만 이제는 독 안에 든 쥐 신세이다.
도도 다카토라님께서 친히 술을 따라주시며 내게 선봉을 맡겨주셨을 때의 감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반드시 내 손으로 이순신을 잡아 당포에서 흉시에 맞아 쓰러진 형의 원수를 갚고 우리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것이다.
우리 쪽의 함선은 300여척! 지형이 좁고 물살이 험하여 빠른 기동이 가능한 세키부네로만 진을 편성했다. 마침 물살도 우리에게 유리하다. 바람보다 빠르게 적을 향해 달려가 단숨에 그 목을 쳐내리라!
전 함대에게 진군을 지시한다. 북소리가 나의 심장을 울린다. 저 멀리 적함이 눈에 들어온다. 겁쟁이 조선놈들은 단 한 척을 제외하고는 모두 뒤로 물러나 형세를 관망하고 있다. 이제 몇 시진이 지나면......
멀리서 포성이 들려온다. 물기둥이 높게 이는가 싶더니 선봉의 함선 한 척이 산산히 부서진다. 적의 포탄에 맞은 것이다. 갑자기 물살이 빨라진다. 강한 물살 속에서 방향을 잃은 우리 배들이 이리저리 부딪히기 시작한다.
적의 대장선은 여전히 굳건히 서서 우리 배들을 향해 포화를 날리고 있다. 겁먹지 말라! 적은 고작 한 척이다! 나는 소리친다. 쐐 하는 소리가 하늘을 가르는가 싶더니 귀를 찢는 비명소리와 함께 또 다른 배 한 척이 부서진다.
몇 척의 세키부네가 적함 근처로 접근한다. 그러나 어떤 배는 거센 물살에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적의 배에 부딪혀 좌초되고, 어떤 배는 적의 우현 근처에서 우왕좌왕하다 적의 총탄과 화살을 몽땅 뒤집어쓴다.
주위의 병사들을 둘러본다. 눈가에 두려움이 서려있다. 나는 더욱 거세게 고함을 지른다. 북을 울려라! 적의 배에 올라라! 후미의 배들은 철포로 선두를 엄호하라!
적의 대장선에서 깃발이 오르는가 싶더니 두 척의 적함이 다가온다. 이미 우리쪽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부서진 배의 조각을 부여잡은 채 울부짖다 방향을 잃은 노에 치여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시선을 돌리자 우리 배들이 적선 중 한 척을 악착같이 포위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적의 대선에 비해 우리의 세키부네는 너무나도 초라하다. 바다 위의 성처럼 버티고 선 적함 위로 우리 병사들이 악착같이 기어오르려다 적의 창에 찔리고, 총탄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다로 떨어진다.
부장들이 일제히 내 앞에 엎드려 울며 퇴각 명령을 청한다. 그러나 이런 격류, 이런 혼란 속에서 배를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무사답게 죽자! 나는 일갈한다. 그 사이에도 우리 배, 우리 병사들은 적함 앞에 무참히 부서진다.
갑자기 귀를 찢는 철포 소리가 들려온다. 적이 포탄을 일제히 발사한 것이다. 단발마의 비명이 들리는가 싶더니 우리 배의 선수가 부서진다. 얼굴에 적의 화포에 맞은 우리 병사들의 살조각과 나뭇조각들이 튀어오른다. 나의 배가 가라앉고 있다. 허망하구나! 나,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이렇게 허망하게......
2.
나는 후지타카. 내 머리 위로는 투구 위, 드높이 솟은 다테가 태양빛을 받아 번쩍이고 있다. 조선 출병 전, 공훈을 세울 때 누구나 나를 알아볼 수 있도록 어머님께서 정성스레 손질해주신 것이다.
오늘 영광스럽게도 나는 선봉에서 구루시마 장군과 함께 싸운다. 비록 우리 집안은 관백의 적 편에 선 죄로 가세가 기울었지만 오늘 나는 전장에서 용맹을 떨쳐 우리 가문을 번듯한 천하인의 가문으로 올려놓고야 말 것이다.
물살은 시원하다. 내가 탄 배는 제비가 물 위를 가르듯 쉼 없이 나아가고 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내가 탄 배는 적선에 돌입하여 사다리를 걸 것이다. 그 때 마땅히 내가 제일 앞에 나설 것이다. 저 아시가루들에게 진정한 무사 가문의 용기를 보여주리라!
갑자기 물살이 거세진다. 오다와라 출신의 키잡이가 무언가 고함을 치는가 싶더니 배가 심하게 요동친다. 어딘가에서 천둥같은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적이 철포를 일제히 쏜 것일까.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우군의 배들 몇 척이 이리저리 부딛히고 있고, 몇 척은 적의 포격을 받아 선체에 큰 구멍이 난 채 산자와 죽은자를 바다로 토해내고 있다.
곳곳이 아수라장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내 카타나를 움켜쥔 채 무사로서의 굳은 결의를 다진다. 나이가 많은 우리 배의 키잡이는 비교적 능숙하게 곳곳에 부서진 배들을 헤치고 나아간다. 내가 공을 세워 영지를 얻으면 그에게도 반드시 포상하리라.
매캐한 화약 연기가 걷히나 싶더니 갑자기 적함의 거대한 형상이 눈앞에 나타난다. 우리 배 외의 몇 척이 근접해 갈고리를 걸고 사다리를 올리려 한다. 바로 옆의 배에서 한 무사가 사다리를 오르나 싶더니 작은 쇠구슬 수십개를 발사하는 적의 철포에 온 몸이 찢겨진다.
철포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우리 배에서 일제히 적함을 향해 총탄과 화살을 날리나 싶더니 어느새 적의 반격으로 반 수 이상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다. 그러나 두려움을 느낄 시간이 없다. 적전에서 죽는 것은 무사의 영광. 나는 칼을 빼들고 눈 앞에 성벽처럼 버티어 선 적함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적은 도선을 시도하는 병사들을 창으로 찌르고 낫으로 베어낸다.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소리가 낭자하고, 바다는 이미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따르라! 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적선을 오른다.
문득 어깨에 타는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적의 창이 내 어깨 갑옷을 꿰뚫은 것이다. 나는 외마디 기합과 함께 칼을 휘둘러 창을 쳐내려 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이미 저 핏빛 바다 위로 떨어지고 있다. 아아,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시야가 점점 흐릿해진다.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려 떠내려가는 군기가 보인다. 나는 점점 물에 잠겨간다. 갑옷이 무겁다. 투구의 다테는 더 이상 햇빛 아래 반짝일 수 없으리......
3.
나는 이요국 출신의 아시가루. 아시가루 따위에게 이름이 무엇이랴. 오늘은 모두가 들떠있다. 적은 고작 13척이라 한다. 도도 장군과 그 휘하의 여러 장군들은 모두 승리를 확신했다. 믿기지가 않는다. 우리들 사이에서 도깨비처럼 무시무시한 대상이었던 이순신이 정말 오늘 끝장나는 것일까?
형형색색의 깃발이 오르고 우리는 승선한다. 이름 깨나 있는 가문의 무사들은 서로 자기가 앞서 공훈을 세우겠다고 핏대를 세운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맑다. 저 빛나는 태양은 우리 고향 집 위에도 드리워져 있겠지. 문득 도우마키 속에 넣어놓았던 물건이 생각난다. 흰 종이 위에 알 수 없는 글 들이 몇 자 적혀있다. 조선 정벌에 나서기 전 어머님이 쌀 열 되를 시주하고 절에서 받아온 부적이다. 요즘도 매일 아침에 절에 나가 이 못난 아들을 위해 기원하실까. 내가 무사히 돌아오면 시집 오겠다던 미치코는 잘 있을까.
어느새 저 멀리 적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 척이다. 저 배에 이순신이 타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한 척 뿐일까? 그 때 귀를 찢는 철포 소리가 울려퍼진다. 외마디 외침이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비명소리와 함께 우측의 배가 우지끈하며 부서진다. 갑판 위는 이미 피로 물들어있고 머리 위로는 적들이 쏘는 철탄이 어지럽게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두려움에 빠진 동료 몇몇이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철포를 쏘기 시작한다. 거센 물살에 배가 크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제는 머리 위로 화살이 어지럽게 날아오기 시작한다. 동료들이 화살에 맞고 총탄에 맞아 하나씩 쓰러지기 시작한다. 대부분은 마지막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진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자들이 갑판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어느새 눈 앞에 거대한 적함의 모습이 드러난다. 철포를 쥔 손이 떨려온다. 나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나 총탄은 적의 두터운 선체에 작은 흠집을 냈을 뿐이다. 손이 떨려 재장전 할 수가 없다. 그 와중에도 함께 배에 탄 동료들은 하나둘씩 쓰러진다. 화살이 볼을 관통한 아시가루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물 속으로 뛰어든다. 다리에 화살이 박힌 한 무사는 피를 흘리면서도 적함을 향해 오오즈츠를 발사한다. 그러나 오오즈츠에서 발사된 총탄은 적함을 뚫지 못했다. 오오즈츠를 쏜 무사가 그 모습을 보고 허탈한 표정을 짓는 순간 그의 가슴과 어깨에 화살이 박혔다.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배가 크게 요동친다. 적의 포탄이 배를 직격한 것이다. 노를 젓던 수부들이 먼저 물 위로 뛰어든다. 살아야한다. 어떻게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진가사를 벗어 던지고 나도 물 속으로 뛰어든다. 물 위는 이미 시신들로 가득하다. 나는 무엇이라도 붙잡을 것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해 헤엄친다. 그러나 물살이 너무 거세다. 물이 흘러들어 입과 코가 아프다. 문득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다. 길 잃은 총탄에 맞은 것일까. 피가 새어나온다. 점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다시 하늘을 본다. 매캐한 화약 연기가 시야를 흐리지만 날은 여전히 맑다. 어머니가 보고싶다...... 미치코가 보고싶다......
제목은 <명량 : 피눈물 바다>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