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도 힘이 됩니다
작성날짜 2004.03.12 조회수 157
의장석 등받이를 잡고 버티다 끌려나갔습니다. 몸이 번쩍 들려지고, 다리만 붙잡힌 채 뒷머리를 바닥에 끌리다가, 몇 번인가 바닥에 떨어진 끝에 본회의장 출입구 밖 수백 개의 구두가 보이는 대리석 바닥에 팽개쳐졌습니다. 윗도리가 벗겨지고 허리띠는 끊어지고 바지와 셔츠가 다 찢어져, 그렇게 구겨진 휴지처럼 내던져졌습니다.
본회의장 안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는 순간 저는 잠시 정신을 놓은 채 의료진의 응급처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어제 MBC 100분 토론을 다녀와 눈 붙일 틈도 없이 야당과 의장석 쟁탈전을 벌였고, 사흘 동안 여덟 시간 남짓밖에 자지 못해 체력이 바닥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디선가 탄핵 성공이라는 외침과 박수소리, 그리고 민주당 만세라는 고함소리가 들렸을 때 정신을 차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의회 쿠데타가 일어난 것입니다. 영남당과 호남당, 그리고 충청도당, 잔명이 다한 수구 기득권 지역주의 정치세력이 손잡고,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전대미문의 폭거를 일으킨 것입니다. 눈물이 강물처럼 흘렀고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비통한 신음이 밀려올라 왔습니다.
지금 시간이 오후 6시 24분입니다. 이제야 겨우 정신을 수습했습니다. 우리당 의원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썼고 향후 당의 진로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그 와중에 SBS 긴급토론에 나와 달라는 요청에 응했습니다. 국민들에게 이 쿠데타의 부당성을 호소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다 활용해야 하겠기에 그랬습니다.
3.12 의회 쿠테타에 분노와 당혹감을 느끼는 모든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차분하게 대응합시다. 특히 분신이나 자해와 같은 극단적인 행위는 절대 안됩니다. 우리는 이 쿠테타를 좌절시킬 수 있으며 지역주의 3당의 수구 기득권 연합은 오늘의 만행에 대해 엄중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우선 쿠데타를 주동한 민주당은 오늘 부로 사망선고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민주당,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와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던 그 민주당은 죽었습니다. 국민들은 오는 4월 15일 민주당의 정치적 사망을 최종 확인해줄 것입니다. 한나라당 역시 국민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킨 다음 총리를 흔들어 내각을 무력화하려 할 것입니다. 자민련까지 끌어들여 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추진할 것이며, 심지어는 총선 일정을 연기시키려는 책동까지도 서슴지 않으리라 봅니다.
자세한 말씀은 다음 기회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쿠데타를 한 것은 탐욕과 공포를 제어하지 못한 탓입니다. 어떻게든 빼앗긴 권력을 되찾겠다는 끝 모를 탐욕, 그리고 이대로 가면 총선에서 패배하고 말 것이라는 공포감에 휩싸여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본 것입니다. 머지 않아 이 무모하고 방자한 헌정 파괴행위의 죄 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리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 처리를 막지 못한 데 대해 깊이 사죄드립니다.
오늘은 슬픈 날이지만, 슬픔도 때로는 힘이 됩니다.
흩어진 마음을 추스르고 각자의 힘과 지혜를 모아 새로운 희망을 열어 갑시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깊고 세찬 물결보다는 얕으나 넓은 강물을 이룹시다.
울지도 말고 굶지도 말고 죽지도 말고 또박또박 한 걸음씩 나아갑시다.
2004년 3월 12일
열린우리당 유시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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