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나는 안티크리스천'이다 라고 하실만큼 마음을 돌리셨지만 님께서 하는 물음은
'만약 내가 생각했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이라는 물음과 같은 맥락인것 같아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당신께 알려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what if’라는 물음 없이 살아가는 것일까?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신성,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무작정’ 믿는 것이 바람직 한 것일까? 당연히 답은 ‘아니다’이다.
이유)
1. what if this is false란 물음은 곧 what if this is true란 물음과 통한다.
What if란 말은 다시말해 I am not sure이라는 말과 같다.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prove)할 수 도, 또 그 반대도(disprove) 할 수 없을때 솔직한 고백은 ‘확실하지 않다’이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면 ‘what if’란 물음 없이는 두 가지 경우가 있겠는데 이는 첫째로, ‘나는 하나님의 존재함이나 또는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다’와 둘째로, ‘나는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존재의 가능성에대해 관심이 없다’이다. 첫번째의 경우는 불가능하다. 만약 어떤 이가 이를 할 수 있다면, 모든 지성인들은 그 증명을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what if란 물음으로 시작이 된다라고 생각 할 수 있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기서 믿지 않는 자의 단계에서 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또 하나님의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이다. 그렇다면 지식의 근본에서의 지식은? 성경에서 ‘지식’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말은 많은 경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결론적으로, 믿지 않는 자는 what if의 물음에서 시작해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이 물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억지이다. 누구를,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2. what if란 물음은, lord help me란 외침과 통한다.
물론 what if란 물음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지는 않는다. 믿는 자의 관점에서 보는 what if란 물음은 분명 믿음충만한 상태는 아니다.
히브리서 11:1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What we hope for과 what we do not see는 하나님이라고 포괄적인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what if란 물음을 갖는 것은 being sure of와 being certain of란 부분이 없다. 그러므로 믿음이 담긴 물음은 아니다. 그러나 믿는자들이라고 해서 항상 믿음충만한 상태일까? 아니다.
첫째로, 우리는 아직 우리의 육체에 머물고 있다. 이는 원죄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원죄의 영향을 받는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다. 이런 본성과 싸우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의심하려하고, 대적하려 하고, 육신이 편하게 되는 길을 걸어가려하는 자신의 본성을 죽이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귀울이는 것이다. 때로는 이 싸움에서 이길때도 있지만, 질 때도 있다. 이 싸움에서 질 때가 바로 믿음이 충만한 상태가 아니다. 원죄의 영향으로 distort된 우리의 모습이 원래의 하나님의 창조하신 틀에 맞지 않아 삐끄덕 거리는 것이다. 삐끄덕 거리지 않으려면 원래부터 정확이 들어맞아야 한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 그리고 예수를 제외한 이세상 누구도 원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자가 없으니 그런 경우는 없다.
둘째로, 믿음의 삶은 전쟁과 같다. 어떤 상황에서는 작은 믿음이 충분할 때도 있고, 때로는 그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한 때도 있다. 삶의 핍박과 유혹, 조롱, 고난, 곤핍, 환란의 정도에 따라 믿음의 크기도 다르게 필요하다. 아브라함의 주관적인 입장은 모르겠으나, 객관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때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할 때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재산과 집, 또 익숙한 환경과 사람들을 떠나면 됬다. 하지만 그의 아들 이삭을 죽여야 할 때는 자기 자신의 친 아들, 자신의 분신, 자신 보다 더 귀한것을 떠나야 했다. 전에는 자기의 환경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어야 했지만, 후자는 자기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어야 했다. 환경의 영향에 따라 더 깊은 믿음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그때 믿음이 부족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그 이유가 자기 자신에게서 부터이던지, 환경에서 부터이던지 믿음이 부족할 때가 있다. 이때 what if란 물음이 마음에 생겨난다. 중요한 것은 이때 어떻게 하느냐 이다. 겸손히 하나님께 들고나아가야 한다. 그 물음자체를 가지고 주께 나아가야 한다. 자신이 믿음없음을 인정하고, 이를 도와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이라는 고백을 하며 주께 나아가야 한다. 이때 주께서 도와주신다. 다윗이 그러했다. 시편의 많은 부분들이 하나님께 ‘what if’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마칠때는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는 것이 많다. (시편 3편, 4편, 7편.. 무수히 많다.) 다윗은 믿지 못하는 자신을 감추고 거짓으로 믿음 행세를 하기 보다는 믿지 못할때 ‘주여 날 도와주소서’라며 주께 나아갔다. 그러했을때 주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하나님을 더 알수 있었다.
마가복음 9:22-24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immediately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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