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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 사는 한국분이 쓴 글인데, 스웨덴 상황에 대해 잘 쓴 글인 것 같네요.
“코로나19 바이러스야, 네가 가장 살기 좋은 나라는 어디니?” “스웨덴이야!” “뭐라고? 스웨덴은 사람 살기 좋은 나라 아니었나?”
나는 온 방을 환히 비추는 형광등이 좋은데, 유럽 사람들은 부분조명이나 은은한 간접조명을 좋아한다. 참 답답하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선언된 ‘코로나19’가 환한 형광등처럼 지구 곳곳을 비추자, 은은한 간접조명 속에 있던 세계 여러 나라들이 그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냈다. 스웨덴 역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저편’의 모습을 드러냈다.
코로나19에 맞서 강력한 봉쇄정책을 선언한 유럽 국가들과 달리, 스웨덴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택했다. 요즘 매체에는 스웨덴 사람들이 길거리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밝게 웃고 떠드는 모습의 사진들이 자주 등장한다. 사진들은 ‘이 시국에 제정신인가?’라는 뜻으로 읽히는데, 코로나19의 위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스웨덴의 이런 모습에 많은 나라들이 비난과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진정 스웨덴은 ‘집단면역’을 실험하고 있는가? 집단면역은 인구의 60% 이상이 항체가 형성되어, 코로나19가 더 이상 전파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아니다. 스웨덴은 집단면역을 전략으로 선택한 적이 없고, 전략적 목표도 다른 유럽 국가와 같다. 즉 치료제나 백신이 나오지 않는 한 코로나19 완전 퇴치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의료체계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감염확산을 최대한 늦추는 것인데, 이를 봉쇄 없이 국민들의 책임감과 자발적인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현재는 50인 이상 모임과 노인시설 방문을 금지하고 레스토랑 규제를 강화하는 한편 감염병 예방 생활수칙 준수를 권고하고 있다. 웬만한 공공편의시설은 다 열려 있는 상태이고, 고등학교 이상 교육기관은 온라인수업을 하지만 중학교 이하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간다.
이런 느슨한 전략에는 스웨덴의 사회문화적 특성도 고려됐을 것이다. 스웨덴은 인구밀도가 대단히 낮고, 1인 가구가 절반이 넘는다. 개인의 자유와 독립을 중시하는 사회라, 이미 사회적(물리적) 거리 두기가 생활화되어 있다. 버스 정류장이든, 마트 계산대에서든 모르는 사람들끼리는 한참 떨어져 서 있다. 노동환경도 자유로워서 재택근무도 흔하다. 이 때문에 겉보기에는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의 풍경에 큰 차이가 없는데, 여론조사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하고, 대중교통 이용자는 50% 이상 줄었다고 한다. 친구들도 생활이 달라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구비율을 감안해도, 봉쇄정책을 시행한 이웃 나라들과 비교해서 스웨덴의 감염자와 사망자 수가 지나치게 많다. 인구 1000만명인 나라에서 5월4일 현재 감염자 2만2721명, 사망자 2769명이다. 실제 감염자는 훨씬 많을 거고 앞으로도 많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스웨덴이 홀로 가는 이 길의 끝이 혹시 벼랑이 아닐까, 하는 우려는 국내에서도 제기된다. 2000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정부정책에 반대서명을 했고, 공개 항의서한도 보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를 총괄 지휘하는 공공보건청 수장인 감염병학자 안데르스 테그넬은 “아직 정책의 성공 실패를 말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보통 스웨덴 하면,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사람 살기 좋은 ‘복지국가’를 떠올릴 것이다. 스웨덴에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라곰(Lagom)’이란 단어도 떠오를지 모른다. 라곰은 ‘적당한’ ‘딱 알맞은’ ‘균형 잡힌’의 의미를 지닌, 스웨덴 사람들의 정서를 나타내는 독특한 개념이다. 스웨덴 사람들은 ‘최고를 추구하느라 스트레스 받지 말고, 알맞게 딱 필요한 만큼 재량껏 하라’는 라곰의 삶을 선호한다. 그래서 스웨덴에는 숨차게 사는 사람이 없다. 라곰에는 무엇이든 적당한 선에서 멈추고 소박하게 만족할 줄 아는 삶의 지혜와 행복 철학이 들어있다.
스웨덴은 복지와 라곰이란 두 단어로 소개하자면 아주 눈부신 나라이다. 나는 이 눈부신 나라에서 아들 셋을 키웠다. 자식 교육이 부모의 역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을 생각하면, 나는 스웨덴의 ‘복지’ 혜택 속에서 ‘라곰’의 지혜로 교육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아이들을 수월하게 키웠으니, 스웨덴에서 살게 된 것은 이만저만한 행운이 아니다.
이런 복지와 라곰의 나라 스웨덴에 ‘아시아에만 머물다 사라질 줄 알았던’ 코로나19가 산 넘고 바다 건너 들어온 것이다. 솔직히 나는 평소 의료체계가 부실한 스웨덴이 이 까다로운 적에게 어떤 대응을 할까 아주 궁금했다.
스웨덴 병원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공기관으로, 암이든 치질이든 누구나 거의 무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반면 국가의 한정된 예산으로 운영되므로 의료재정이 넉넉하지 않다. 그러니 발생 가능성이 낮은 이런 감염병까지 대비할 여력이 없다. 평소 스웨덴 병원은 38도 이상 고열 환자도 가급적이면 집에서 처치하도록 ‘친절하고 냉정하게’ 안내한다. 그래서 가벼운 증상으로는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 병원 문턱이 높기 때문에, 초기 증상이 거의 없는 암 같은 무서운 질병은 조기 발견이 어려울 수 있다. 병원은 병이 있을지 모른다고 검사를 하는 곳이 아니라, 병이 난 사람을 치료하는 곳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코로나19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
지난 3월9일, 스톡홀름에서 처음으로 감염원을 알 수 없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자, 공공보건청은 노인과 입원 환자에게만 감염테스트를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정된 의료자원을 가장 필요한 곳에,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제 웬만한 증상으로는 검사를 받을 수도 없게 되었다. 코로나19 의심 증상자는 ‘코로나 핫라인’ 1177 번호로 전화를 걸어 통보한 뒤, 자가격리하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기침이나 열 증상이 코로나19 때문인지, 일반 감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마 영영 모를 것이다.
코로나19라는 환한 조명은 한국의 모습도 드러냈다. 한국은 최고의 방역선진국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고, 세계보건기구(WHO)는 검사, 격리, 접촉자 추적, 치료 등의 종합적 억제책을 공격적으로 사용한 “교과서 같은 우수사례”라고 평가했다.
스웨덴에서 사는 한국인으로서 한국 정부와 스웨덴 정부를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도 스웨덴처럼 봉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런데 스웨덴 정부는? 집중치료실을 두 배로 늘렸다고 하는데, 테스트도 많이 하지 않고 웬만한 증상의 환자는 집에서 견디라는 정책을 펴고 있다. 한국 의료진과 스웨덴 의료진의 노동 강도는 비교할 수가 없다. 한국 의료진이 경이적인 속도로 엄청난 양의 테스트를 해낼 수 있었던 저력은 평소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열악한 진료환경에서 나왔으며, 이번 긴급 상황에서 연속근무가 가능했던 이유는 수련의 시절 100일 연속당직 경험 때문이라는 마음 짠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강도 높은 노동은 복지와 라곰으로 눈부신 나라 스웨덴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스웨덴은 최선을 다하는 사회가 아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느리게 사는 삶’ ‘저녁이 있는 삶’ ‘워라밸의 삶’을 사는 스웨덴 사람들에겐 저런 전투력이 없다. 얼마 전부터 스톡홀름 병원 집중치료실 의료진의 근무시간이 일주일에 최대 60시간까지 늘어났는데, 초과근무 시간에는 두 배 이상의 급여가 책정되었다. 그런데도 집중치료실의 한 간호사는 자기 근무시간이 하루에 12시간30분에 달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며칠씩 집에도 못 가고 일한 한국의 의료진은 급여를 얼마나 더 받았을까.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사회에는 반드시 ‘희생이 요구되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WHO의 칭찬 속에는 한국 정부와 의료진, 공무원들의 헌신적 노력과 큰 희생이 깔려있다. 스웨덴은 적극적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가 아니다. 영국은 의료진의 개인보호장비 부족으로 1회용 가운을 한 번 더 사용하라고 해서 공분을 샀고, 어떤 나라에서는 쓰레기봉지로 의료용 가운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스웨덴에선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이다. 의료가운이 100개 있다면 의료진을 100명만 투입할 테니까! 보호장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의료진에게 생명을 거는 희생을 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이 스웨덴에는 없다.
하지만 왜 위기상황이겠는가? 희생을 요구할 수 없지만, ‘희생되는’ 사람들은 반드시 생긴다. 현재 스웨덴은 이웃나라와 비교해 사망자가 너무 많다. 이 위기상황에서 희생되는 사람은 치료를 빨리 받지 못해 사망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사망자 대다수는 기저질환이 있는 요양시설 노인들이라지만, 이웃나라에도 이런 노인들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노인 사망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4월6일부터 12일 사이 코로나19 사망자를 포함, 스웨덴의 총 사망자 수가 2505명인데 이는 21세기 들어 스웨덴 최고의 사망률이다. 증상이 심해지기 전에 빨리 병원 치료를 받으면 사망자 수가 줄지 않을까. 사망자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데도 집중치료실은 항상 여유가 있고, 의료체계가 잘 돌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복지와 라곰으로 눈부신 스웨덴에 예상치 못한 이런 위기가 닥치니 ‘저편’에 있는 맹점을 보게 된다. 코로나19 정국에서 느낀 점 중 가장 의아한 것은 대다수의 스웨덴 국민들이 정부의 이 느슨한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이다.
지난 3월 뢰벤 총리가 담담한 어조로 개인의 자발적인 책임감과 성숙한 시민의식에 호소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스웨덴에 사는 외국인들은 “들으나 마나 한 얘기”라고 거세게 비난한 반면, 스웨덴 국민은 80% 이상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부가 보건전문가들과 함께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상황에서는 야당도 정부와 여당에 초당적으로 협력한다. 내 스웨덴 친구들은 국민과 정부 사이의 신뢰에 기반을 둔 정부의 독자적인 정책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코로나19 덕분에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을 알게 된 것처럼, 스웨덴 사람들은 안데르스 테그넬을 알게 되었다. 요즘 테그넬의 인기가 어찌나 높은지 그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와 머그컵이 등장했고, 심지어 그의 얼굴을 자신의 팔에 문신으로 새긴 사람도 있다. 정책 결정에 임하는 그의 확고하고도 자신감 있는 태도가 스웨덴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스웨덴 사람은 스웨덴이 최고이고 항상 옳은 결정을 내린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집단면역’을 공식 전략으로 택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대로 가면 천천히 인구의 60% 이상이 감염되어 내용적으로는 집단면역이 실현되게 생겼다. 스웨덴은 사람뿐 아니라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살기 좋은 나라인 것이다. 봉쇄정책을 실시하는 호주에서 바텐더로 일하다가 얼마 전 돌아온 한 젊은이는 스웨덴에 오니 살맛이 난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이 입에서 저 입으로, 이 코에서 저 코로 바이러스가 둥실둥실 즐겁게 떠다니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빨리 인구의 60% 안에 들어야 하나? 아니면 기를 쓰고 40% 안에 머물러야 하나….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081626005&code=940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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