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기차역 한 복판에서, 이은결은 자신의 주머니 무언가를 꺼내어 홍진호에게 주었다.
지하비밀모임에서 자주 쓰던 노란색 쪽지와 얼마간의 돈이었다.
돈을 보고 홍진호가 의아해하자 이은결은,
"기차 값을 주고도 돈은 남습니다. 이 기차는 왕복이 아니고 편도가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순간 홍진호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라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려 플랫폼을 나서는 이은결의 뒷모습을 보며 비장하고 애끓는 마음에 눈물만 흘릴 뿐 이었다.
2.
이두희는 아침나절부터 바깥을 쏘다니더니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어디를 다녀왔냐는 질문에 찔끔 놀라기만 한다.
"그냥 좀, 분위기 좀 보러."
다들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홀로 떠난 이은결의 빈자리가 의외로 커서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 침묵은 거사가 있을 다음 날 점심 무렵까지도 이어졌다.
"호외요! 호외! 광장에서 누군가가 폭탄을 던졌답니다!"
그러나 폭탄이 불발로 끝났다는 소식에 홍진호는 잘근잘근 물던 연필을 떨어뜨렸다. 임요환은 골방을 나가버렸고, 구석에 선 이두희만 새파래진 얼굴을 양 손으로 감쌌다.
"은결……."
3.
믿을 수 없는 지금의 사태에 홍진호는 물고 있던 연필을 떨어뜨렸다.
여러 가지로 어지럽던 머릿속에 한 가지 이름이 떠올랐다. 이두희의 소개로 잠시 그 들의 골방에 들렀던 여자. 신식학교의 학생이라고 했던,
"조유영…!"
자리를 박치고 일어선 그는 골방을 나와 찻집을 향해 달렸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오라고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엔 그녀가 유정현과 함께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이오?!"
홍진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정현은 의아한 눈으로 홍진호와 조유영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조유영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찻잔을 들었다.
"당신이잖아. 당신이 그 놈에게 알린 거야."
"누가 알리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무엇보다 중요한건……,"
조유영이 비웃는 표정으로 홍진호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그 사람 생사까지 책임져 주는 거였나요? 솔직히 저는 그건 아니라고 봤거든요."
4.
홍진호는 이를 악물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곳에서 싸울 수는 없었다.
"저뿐만의 생각도 아닌걸요?"
"그게 무슨."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고-"
"누가 그런 말을 하답디까?"
"여기 찻집보이 미스터 노가요. 왜 지원 씨를 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 이게 옳다고 생각해요. 독립을 한다 어쩐다 하지만, 전 그 사람의 폭력적인 행동이 독립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기어이 홍진호는 소리쳤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은 통용되는 겁니다! 조선인으로써 그걸 척결하자고 몰아세우는 거,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뒤돌아 나가는 홍진호의 앞에서 찻집 보이가 쪼르르 달려와 문을 열었다.
"아하하하, 좋은 시간 보내셨습니까? 미스터 홍, 또 오세요!"
눈치 없는 인사에 홍진호는 대꾸도 없이 나갔고 보이는 히죽이며 문을 닫았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이두희는 홍진호가 나오자마자 그 뒤를 따라갔다.
"뭐, 뭐랍니까?"
"미스 조가 한 짓이다. 저기 미스터 노도 관련된 거 같고."
"미스터 노라면?"
"찻집 보이로 일하지만, 사실은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정보통으로 유명하지. 아마도 그 둘이……."
이두희는 그저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한편 골방을 나온 임요환은 근방 소식을 담당하던 소년을 찾아갔다.
"폭탄을 던진 놈은 그 자리에서 붙잡혔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려주지 않으니 모르겠지만요, 이젠 틀렸습니다. 임요환씨는 어쩔 겁니까?"
"이런 폭력으로는 더 이상 수가 없다."
"그럼 홍진호씨에게는 안 갈 겁니까?"
"난 이제 나 혼자 움직이겠다. 네가 좀 전해다오."
임요환은 소년에게 동전 한 닢 쥐어주고는 떠났다.
한편 임요환이 떠났다는 말을 들은 홍진호는 예상했던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희, 이젠 우리뿐인 것 같다."
이두희 또한 알았다는 듯 눈을 마주쳤지만 눈동자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홍진호는 그 눈빛을 애써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두희는 골방을 나와 이상민이 기다리는 마천루의 노름장으로 향했다.
5.
이두희가 찾아오기 전, 이상민을 먼저 만난 것은 임요환이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이상민이 일어서며 임요환에게 악수를 청했다. 임요환은 이상민이 내민 손을 잡으며 그의 눈을 보았다.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눈빛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차가운ㅡ 그래서 더욱더 무섭게만 느껴지는 사람이다. 문득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그에게 현 상황을 타개할 비책이 있으니 그것을 구해야만 한다.
"들리는 말에 이 선생께서 소중한 것을 가지고 계신다고…."
"아, 그것 말입니까? 있지요. 있고 말구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이상민이 말했다. 아내가 말했던 그것일까. 만약 그것이라면 '일연회'와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홍진호의 도움 없이, 나 자신의 실력으로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일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임요환은 나름대로 자기가 생각했던 무기를 꺼내들었다.
"헌데 말입니다, 이 선생.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그 단서 말입니다."
"어이쿠, 단서라는 것 까지 알고 계시다니, 역시 임씨 집안 자제다우십니다요."
"나 역시 홍진호에게 들은 단서가 있습니다."
홍진호라는 이름 석 자에 이상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자신이 벌이고 있는 위대한 과업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그 홍진호였다. 홍진호가 이상민의 목을 조르기 위해 숨겨 두었던 그 결정적인 단서를 이 열등감에 사로잡힌 불쌍한 남자가 스스로 들고 찾아 온 것이었다.
"그래요? 어디, 협상을 시작 해 보도록 합시다."
"나에게 필요한 건 비밀번호뿐입니다."
임요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상민의 눈이 번뜩였다.
"그 말은, 계좌번호는 알고 있다는 말인데. 잘 됐구만. 서로 필요하겠어. 어서, 알려주시오."
"비밀번호가 있습니까?"
"물론. 하지만 계좌번호가 먼저지요."
"아니, 비밀번호 먼저."
의외로 임요환은 단호했다. 그러나 이상민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계좌만 안다면, 그곳의 금은 모두 자신이 차지할 수 있었다.
"비밀번호를 그대가 알면 끝이니 장소 먼저-"
결국, 품에서 봉투를 꺼내는 임요환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는 기어이 내민 손아귀의 봉투를 이상민이 잽싸게 낚아챘다.
"잠깐!"
임요환이 다급하게 손목을 붙들었다.
"비밀번호는."
이상민이 슬쩍 웃는다.
"실은 나도 반밖에 모른다오. **00"
"그런!"
그러나 이미 계좌번호는 이상민에게 넘어간 후였다. 임요환은 간신히 표정을 진정시켰다.
"정확히 반으로 나눠야 합니다! 반으로!"
그러나 이상민은, 방을 나선 후였다.
6.
이상민은 방을 나오자마자 대지주의 아들인 은지원을 불렀다. 은지원은 만주에서도 유력한 세력가 집안으로 사람들에게 노려지곤 했다. 며칠 전만해도, 모종의 연락이 없었더라면 그들의 결탁은 끝이 나버렸을 것이다. 은지원에게 계좌번호를 알리고 급히 돈을 옮기니 벌써 밤이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구지?"
"이두희라고……."
"아, 알겠어."
그러나 이상민은 나갈 마음이 없었다. 조유영에게 연락해 이두희를 상대하라고 한 뒤, 느긋하게 밤을 보냈다.
조유영을 만나고 온 이두희는 골방 앞에서 한동안 망설였다. 아침이 되어 방을 나서던 홍진호가 놀라 그를 불렀다.
"왜 그래, 두희?"
"진호형, 나 고백할 게 있어."
이두희는 진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진호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이두희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종종 서신을 빼돌렸고, 자신을 이기겠다며 조유영과 함께 있던 걸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은결이 사라지고, 임요환이 떠나고 둘이 남은 지금은 이두희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두희야, 이젠 너랑 둘이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제 와서 과거를 고백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두희는 금방이라도 울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형, 나 신분증이랑 총을 잃어버렸어. 이젠 아무데도 갈 수 없어."
언제라도 검열이 나오면 이두희는 끌려가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