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사소한 게 문제다. 사소한 것. 작고 별것 아닌 것. 그런것이 보통 사람을 뒤흔들고는 한다. 위로, 혹은 아래로. 문제는, 떠오를 때도 떨어질 때에도 임계점이 없다는 것이다. 물처럼 끓는 점과 어는 점이 없이, 위로도 아래로도 흔들림의 범위는 커진다. 이것은 관성의 법칙과도 맞아떨어져서, 위로 높게 올라갈 수록 아래로 깊게 떨어지고는 한다. 이럴때마다, 감정이라는 것은 어딘가에 구슬처럼 놓여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 삶은 핀볼의 볼일지도 몰라- 라며.
"나도 누가 차려준 밥이 먹고싶다.."
발단은 이 한 줄의 문장이었다.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은 문자메세지 몇 건 사이에 섞인 저 문장. 사람을 위로 붕 뜨게 하는 저 문장이 발단이었던 것이다. 밥 먹었어요? 난 목이 부어서 커피도 잘 안넘어가네. 메일 진짜 재밌게 썼더라. 지금 아침 겸 점심? 완전 점심인데? 그리고 이어지는 아아 나도 누가 차려준 밥이 먹고싶다. 그 순간, 나는 다음주가 시험이건 말건, 읽던 책을 내팽겨치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온수가 나올때까지 습습 - 후후. 습습 - 후후. 침착하자. 침착하자. 일단 메뉴를 생각했다. 감기걸리고 목아픈데 양식이나 일식같은건 그럴거야. 애시당초 혼자사는 집에서 요리의 '요'도 모르는 내가 그런걸 해 줄 수가 있을리가 없다. 그래, 한식이야!
샤워를 하며 곰곰히 생각한 메뉴는 된장찌개와 그 친구들. 야채계란찜과 된장찌개, 그리고 잘 익은 김치와 양파절임. 어묵볶음과 소세지야채볶음. 요정도면 될거야. 나는 샤워를 후다닥 마치고 문자를 보냈다. "오늘 출장요리사 나갑니다. 지금 누나 집 근처로 갈게요." 바보같이. 그 누나는 내게 사는 곳이라고는 행정구역을 말해주었을 뿐이다. '의정부'라고. 의정부어딘데? 그런거 없다. 일단 거절같은거 없게 행동해야했다. 무조건. 일단 의정부 행정구역내로 들어가는거다. 가자 의정부역! 평소라면 절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내가 이렇게 과감해지는 것은. 근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달랐어.
혼자 사는 여자의 집에 친구도 애인도 아닌 남자가 방문하는건 얼토당토 않은 일이다. 그것도 대낮에 점심차려주러. 내가 남자친구도아닌데! 그렇지만 달린다. 인생 뭐 있어? 일단 집에서 나가기전에 김치, 양파절임, 된장찌개용 된장과 육수용 멸치는 엄선해서 포장했다. 그리고 마트에가서 어묵과 소세지와 케찹과 야채정도를 재빨리 샀다. 맨날 우물쭈물하면서 상대의 응답을 기다리는것도 질렸다. 찬스는 지금밖에없다. 가을의 시원한 바람에도 걸음을 빨리 옮기니 등이 땀에 젖어간다. 아, 샤워 바로했는데 땀냄새 나면 안되는데! 금세 걸음이 느려진다.
"헐...밥차려주러오게? 나 집 장난아닌데;;"
"그리고 우리집이 어딘줄알구..."
"그냥 해본 말인데.. 안 그래도 되~"
이거다! 평소에는 답장도 잘 안해주는 사람이 문자가 세통씩이나 온다. 이거지 그래. 지금 누나는 혼란에 빠져있다. 워낙에 성실하고 착한 사람인데다, 받는것도 너무 미안해하는 사람이라 뻔히 예상이 되었던 반응. 나는 3통의 문자가 올 때까지 정말 필사적으로 답장을 참다가, 마지막에 짤막한 한마디를 보냈다. "이미 지하철 탔어요. 차려준달때 드세요." 아 이 쿨한느낌 좋다. 물론, 지금 마이 하트는 하늘을 뚫을 정도로 강렬하게 박동치고 있다고! Yeah ROck N Roll!!!!!!!!!!!!!!!!! 누나 내가갑니다!! 아다다다다다!
장장 1시간여를 소비해서 의정부역에 도착했다. 누나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를 않는다. 설마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머리카락 끝부터 신경이 곤두선다. 그렇지만 다시 침착해지기로했다. 그럴 사람은 아냐. 의정부까지 왔으면 밖에서라도 만날 수 있을거다. 약 15분정도 그렇게 역 앞에서 X마려운 사람마냥 허둥지둥 대며 왔다갔다를 반복하는 도중, 전화기가 위이이이잉 하고 울렸다. 동시에 나도 으아아악 하고 소리를 질렀지. 주변에서 사람들이 죄다 쳐다봤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야 어디냐?" 아 빌어먹을 친구의 메세지였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하고 재빨리 삭제버튼의 위치를 터치하려는데 전화가걸려왔다. 그리고 나는 멍청하게도 '어?'하며 삭제버튼으로 가는 손가락을 막지 못했다. 통화가 종료되었습니다. asfdloafgjwiotrmoiqwfmoia!!!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왜 끊었어요?" "아니 그게.." "진짜 왔어요?" "저 지금 의정부역앞이에요.." "헐 대박..진짜왔네;;;;" "배안고파요? 빨리 밥차려줄테니까 나 좀 데려가요" "우리집 역에서 걸어서 가까워요. 내가 나갈게요."
전화를 끊고 심호흡을 다시 했다. 습습- 후후-. 땀냄새는 나지 않겠지. 신발을 벗어 발냄새가 나는지도 맡아보고싶었지만 참았다. 공공장소니까. 아 왠지 화장실이 가고싶어졌다. 금방온다는데 어떡하지. 머리속에서 30번쯤 갈까말까 고민하다 참았다. 이미 가기엔 너무 늦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 멀리 시야 끝에서 보이는 회색 후드 차림의 누나가 눈에 띄였다. 으악-! 심박수가 올라가고있습니다 대장님! 진정해라 침착함만이 살길이다! 대장님 혈압 맥박 전부 상승하고 있습니다! 얼굴이 빨개지기 직전입니다! 냉각부대! 냉각부대!
"진짜 오면 어떡해요... 나 감기걸렸는데 집 청소까지 했잖아요!"
"아.. 청소 안해도 되는데.."
"그게 말이 되요? 아 진짜..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완전 과감하네 오늘.."
"하하 그게 .."
"맛 없으면 쫒아낼거에요!^___^"
"네..넵!"
혼자사는 집까지 짧은 거리를 걸으며, 누나가 던지는 말을 받아주고 있었지만, 사실은 머릿속에 들어있는 외운 레시피를 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나는 약간 긴장된 웃음을 짓고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심장이 터지기 직전.. 안되, 일단 레시피를 다시 생각해보자. 물 큰컵으로 7잔, 된장은 4큰술 잘 풀어서, 먼저 멸치 똥 빼고 8마리정도로 육수를 낸다.. 감자랑 호박 두부는 세모썰기.. 두부와 파를 맨 마지막에 넣고 감자 호박 양파순으로 넣는다.. 간을 보며 된장을 더 풀어도 된다.. 소세지는 끝에 칼집을 내고 야채를 먼저 볶은뒤에 케찹과 함께 볶는다..
"다왔어요!"
한 작은 빌라의 입구를 지나 계단을 열개정도 오르자 나타난 귀여운 문. 음, 아니 귀엽지는 않았다. 그냥 철문. 누나가 열쇠로 문을 따며 여는 동안의 시간은 엄청나게 길었다. 두근 두근 두근. 어릴 적 숲에서 발견한 보물찾기 놀이에서, 보물상자를 열때의 설레임 세제곱정도이려나. 별로 대단한 설레임 아니네-하실수도 있지만 천만에! 보물찾기 놀이 난 완전 좋아했어요! 아무튼, 문이 열리고 누나를 따라 들어갔을 때에는, 자그마한 거실에 베이지 색 쇼파와, 흰 벽지가 눈에 띄였다. 누나는 내게 "부엌은 저쪽, 뭐 만들거에요? 나도 도와줄게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괜찮다며 기어코 누나를 쇼파에 앉혔다.
"오늘은 제가 출장요리사로 온 거니까, 누나는 컴퓨터라도 하고 계세요."
기세좋게 외친뒤에, 나는 주섬주섬 재료를 꺼냈다. 부엌을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도마와 칼, 국자, 냄비등을 찾았다. 가스레인지 점화스위치를 찾고, 요리기구들을 전부 준비하는데만 한 10분 걸린것같다. 뒤에서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들린것 같지만 모른 체 했다. 왠지 귀가 뜨끈뜨끈해진 것 같은 기분이다.
감자와 호박을 씻고 도마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레시피대로 냄비에 불을 붙이고, 멸치를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감자는 껍질이 벗겨진 걸로 사왔고, 호박은 씻었으니까 괜찮고.. 두부! 두부도 준비하고.. 일단 썰자. 식당에서 본 듯이 조금 큼직하게 썰었다. 그리고 양파는 조금 잘게 썰고.. 소세지, 소세지에 칼집을 내고 파프리카와 양파, 당근도 씻고 썰 때쯤, 멸치가 물위로 둥실둥실 떠올라서 활기차게 헤엄치고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가져온 된장을 꺼내서 숟가락으로 열심히 꾹꾹 눌러가며 된장을 풀었다. 정신없이 요리를 하고 있었는데, 누나가 뒤에서 웃으면서 말했다. "우와.. 생각보다 진짜 본격적으로 하는구나? 잘한다..."
다시한번 둥실 뜨는 기분. 으아, 이거 큰일이다. 나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며 "에이 이정도는 해 드려야죠. 출장요린데. 저 꽤 비싼거 아시죠?"라고 대답했다. 으으으으. 어쨌거나 된장찌개 냄새는 엄청 좋네. "근데.. 왜 이렇게까지 잘해줘요?"
"네?"
"그렇잖아요. 사실 우리 일주일에 딱 한번보는 사이고.. 누구누구씨랑 나는 그냥 아는 누나동생? 관계인데.. 나한테 너무 잘해준다. 설레게."
"아...하하하하하;"
뭐야 이거 타이밍인가? 어떡하지? 아 큰일났네. 일단 일단 지금은 그럴듯하게 넘어가자. "아 된장찌개 냄새 진짜좋다. 그쵸?" 재빨리 도마에 손질해 둔 호박과 양파 감자 두부를 넣었다. 소세지랑 야채는 아직 불도 못 붙였는데. 된장찌개가 재료가 들어가니 더욱 냄새가 좋아졌다. 아! 두부는 늦게 넣었어야 하는데! 넣는 순서는 틀렸지만 구수한 향이 코를 자극한다.
"....야!!"
"......철수야!!"
"으..."
"밥먹어 이것아!! 된장찌개 끓여놨어! 해가 중천이다."
뭐지.. 된장찌개는 어디가고 눈 앞에는 찌그러진 녹색 배게와.. 이상하다. 된장찌개 냄새가 나는데.. 뒤척거리며 핸드폰을 찾아 열어봤다. 그리고 그때서야 알았다. AM 11시... 아........xx 꿈.... 혹시나 싶어 문자를 확인했다.
"누가 차려준 밥이 먹고싶다.."
어 뭐지? 진짜 와있는데? 순간 혼란을 느껴서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맞다. 어젯 밤에 문자한거였지........
후.......................
아침부터 아랫배에서 뜨끈한게 욱 하고 올라오는구나..
"철수야 밥먹으랑께!!!!!!"
울고싶은 마음을 꾹 눌러두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 오늘은 정말 ............이건 아니잖아. 씁쓸한 마음으로 수건한장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누나는 꿈속에서 맛있게 된장찌개를 드셨으려나? 휴. 정말 어이가 없어서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세수하고 식탁에 앉자, 보골보골 하며 끓고있는 된장찌개가 구수한 향기를 풍겼다. 한 숟갈 듬뿍 퍼서 입에 담으니 아..맛있다. 그렇게 나는 오늘 아침을 맞이했다.
후........................... 감정이 오르는 것 만큼 떨어지는 법이다. 관성의 법칙은 감정에도 존재한다. 젠장.
그럼그렇지, 내가 그렇게 막 달려가고 저돌적으로 그런 사람 아닌데.
뭔가 이상하다 했어 뭔가.
꿈도 이런 꿈은 좀 너무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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