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할게요. 수고들 했어요.”
“고생하셨습니다!”
후우…오늘 강의는 이걸로 끝이지….
“오빠 애들이랑 같이 저녁 먹으러 갈래요?”
“아니~오늘은 그냥 갈래. 왠지 좀 피곤하네.”
“그래요? 지금 애들 거의 다 간다는데 오빠도 같이 가요.”
“오늘은 패스! 너네끼리 재미나게 놀아. 내일 보자~”
“에이…알겠어요. 내일 봐요, 오빠~”
“응, 그래. 미안해.”
동기들한텐 미안하지만 오늘은 좀 쉬고 싶다. 조별 과제 발표하느라 지쳤나? 개강한지 2주 만에 발표라니…너무했어. 뭐, 일찍 하는 게 편하기도 하지만.
“배고파….”
거기다가 토론도 했고…힘을 너무 많이 썼나? 오늘은 후딱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
지하철을 타고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최소희, 새 예능 프로그램에 합류. 좋은 활약을 다짐.’ 요즘 잘 나가네. 아니지. 이런 말을 새삼스레 할 필요도 없나. 데뷔 초엔 주목도 받지 못했지만 2년 전부터 유명세를 얻기 시작하여 지금은 톱 아이돌이 되었다. 본업인 노래도 잘하고, 얼마 전부터 숨겨져 있던 예능감이 폭발하기 시작해서 예능에서도 자주 보였는데 이젠 고정인가. 대단하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시트콤도 찍었고. TV는 점령인가.
흠,…다른 뉴스는 별게 없군. 뉴스와 커뮤니티를 보며 지하철을 갈아탔다. 으으…역시 고속터미널은 사람이 너무 많아……. 지하철도 겨우 탔다. 이래서는 핸드폰으로 뭘 할 수도 없겠네. 그나마 급행이니까 조금만 참으면 된다. 이거 9호선 차량 늘려야 돼…너무 좁잖아. 전부터 4칸 밖에 안 되는 건 너무 적다고 생각 했어…. 강남 쪽도 가고 김포공항까지 가면서 4칸은 너무하잖아. 출퇴근 시간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9호선에 대해 구시렁거리고 있으니 금방 도착했다. 역시 뒷담화가 시간이 잘 간다니까.
마을버스를 타고 집 앞에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보니…아버지는 아직 안 돌아오신 것 같고…동생은 벌써 왔네.
“다녀왔습니다.”
“왔니? 일찍 왔구나.”
“네. 조금 피곤해서요.”
“그럼 조금만 기다리렴. 아버지 곧 오신다니까 아버지 오시면 저녁 먹자.”
“네.”
“아참, 점심쯤에 소희가 왔었단다.”
“네?”
소희가?
“연락 못 받았니? 소희가 연락한 줄 알았더니.”
“아뇨, 못 받았는데.”
뭐 하러 왔대, 바쁘면서.
“너 있는 줄 알고 왔었나 보더라. 얼마 후에 콘서트 있다고 티켓도 주고 갔단다.”
“나 그런 거에 관심 없는 거 알면서 왜 자꾸 주고 가나 몰라. 거기다가 우리 집에 오는 걸 기자나 팬들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엄청 큰 일일 텐데 왜 자꾸 오는 거야 쓸 데 없이.”
“어머, 야박하네, 우리 아들. 여자가 굳이 시간 내서 찾아 왔었는데 아쉬워해도 모자랄 판에.”
“귀찮잖아요. 왜 굳이 찾아오는 거야.”
“오빠 진짜 멍청한 거 아냐?”
“…….”
내 동생아…오빠한테 어떻게 멍청하단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가 있니…….
“원래 네 오빠가 좀 멍청하지 않니. 네가 이해 좀 해주렴.”
“…….”
어머니…. 나 멍청한 거야? 진짜로?
“그런데 오빠는 그런 톱 아이돌이 소꿉친군데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어? 소희가 아이돌이 된 거랑 나랑 소꿉친구인거랑 무슨 상관이야?”
“뭐, 나도 오빠 덕에 어릴 때부터 소희 언니랑 알게 되기도 했고, 지금도 카톡으로 연락하고 하니까 불만은 없는데…아니지. 불만은 있어.”
“…뭔 불만이 있는데 대체.”
“말해봤자 오빠가 알아듣겠어? 언니가 와서 그렇게 티켓 놓고 갔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안 가봤지?”
“응. 나 그런 쪽에 관심 없는 거 너도 알잖아.”
“하아……. 뭐 그래 그런 건 관심 없다고 하자.”
“없다고 하는 게 아니고 관심이 없다고….”
그런 데를 억지로 가봤자 재미도 없잖아. 안 그래?
“그래…더 얘기 해봤자 소용없겠다.”
“알겠다….”
저것도 동생이라고…너무하잖아 오빠한테.
소희랑은 5살 때부터 알게 된 사이이다. 유치원 다닐 적에 알게 되었고, 초등학교도 같이 다녔다. 고등학교는 내가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오는 바람에 같이 다니지 못했지만, 중학교까지 같이 다녔고 그 때부터 노래라던가 그런 쪽에 재능이 있기는 했었다. 물론 예쁘기도 했고.
그 후엔 내가 반수도 하고 하면서 연락이 뜸했는데 어느 날 보니 TV 가요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하고 있는 소희를 본 것이다. 그 기분이 얼마나 당황스러운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거야 아마. 저녁 먹고 TV를 켰는데 갑자기 자기 소꿉친구가 나와서 노래를 하며 춤추고 있으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흠…….”
콘서트에 한 번 가볼까? 이렇게 티켓만 가져다 준게 벌써 네 번째인가 그럴 텐데. 언제 하는 거지?
“보자…내일?”
야이 빨리도 가져다준다. 얼마 후라며? 그 얼마 후가 내일이냐?
일단 내일은 강의도 점심 전에 끝나고 딱히 할 과제도 약속도 없으니 갈 수는 있겠네.
“규형아~아버지 오셨다~”
“아, 네! 나갈게요!”
“아빠! 다녀오셨어요!”
“음. 그래.”
“아버지, 오셨어요.”
“그래, 규형이도 일찍 왔구나. 학교는 다닐 만 하고?”
“네, 뭐. 똑같죠.”
“이제 군대도 다녀오고 했는데, 사회에 불만 좀 그만 가지고 여자라도 만나보는 건 어때?”
“네?!”
여자는 무슨…
“어머,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안 그래도 오늘 소희가 왔다 갔어요.”
“어머니!!”
“그래? 소희가 아직도 규형이를 아는 척 해주는구나. 그건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에요, 아버지! 우리 집에 오다가 기자들한테 사진이라도 찍혀서 스캔들 기사 나기라도 하면 걔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
“어머, 벌써 걱정이라도 해주는 거니?”
“아니 그게 아니고…아무튼…!”
“그래, 밥 먹자꾸나.”
“아니 아버지! 밥이 중요한 게 아니고!!”
“오빠! 그만하고 밥 먹자! 나 배고파!!”
“그래, 수연이도 배고프다고 하니 밥부터 먹자꾸나.”
넌 도대체가 도움이 안 되는구나 동생아!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할게요.”
“고생하셨습니다!”
정확하게 끝났군. 11시 45분이니까…점심 대충 먹고 잠실 운동장으로 가면 시간은 넉넉하겠네. 그런데 점심을 뭘 먹지? 학교 근처가 죄다 변호사니 법무사니 하는 사무실들과 아파트 단지, 주택가이다. 학교가 강남에 있어서 부지도 좁고 주변에 흔히들 말하는 대학문화를 즐길만한 가게들이 전혀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갈만한 식당도 없어서 매일 점심 때 마다 고민이다. 거기다 얼마 없는 가게마저 가격이 학생들을 위한 가격이 아니다보니…….
“에이 뭐 먹지? 편의점에서 사먹기는 싫은데…….”
그냥 골목에 있는 분식집이나 갈까? 쩝…. 어쩔 수 없지…
“응?”
저건…. 많이 쳐줘봐야 15~16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 아이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
길이라도 잃어버린 건가? 거기다 한국인도 아니네?
어깨를 살짝 넘는 퓨어 화이트 블론드. 서양인답지 않은 아담한 신체 사이즈. 작은 얼굴에 오뚝한 코, 똘망똘망한 눈, 앵두 같은 입술. 귀엽긴 하네. 일단 계속 당황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을 걸어야겠지…? 아, 그런데…무슨 언어로 말을 걸어야하지? 영어…? 아니, 서양인일 뿐이지 영미권 사람이라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할 줄 아는 말이 영어 밖에 없는데…에이 모르겠다.
“저기….”
휙- 소녀가 돌아봤다.
“E…Excuse me?”
그렁그렁-
“엥?!”
우…우는 거야?!
그렁그렁- 훌쩍.
“흑…….”
“우…울지마! 아니지, Please don't cry!”
“흐…흐흑….”
또로롱-
“자, 차…착하지? 울지마!”
“으아앙!!”
“히익!!”
“우아아아아아앙-!!”
소녀는 진주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이…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우에에에에에엥-!!”
주변에서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시…싫어!! 일단 이 곳에서 벗어나야겠다.
“잠깐 실례할게…!”
“히끅!!”
나는 울고 있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이 없는 조용한 곳을 찾아서…아니 조금 말이 이상한데?!
다행인건 학교 주변에 주택가가 있어 골목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는 쉬웠다.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오고 나는 손을 놓고 숨을 돌렸다. 이쯤 왔으면 학교 친구들도 없을 테니까 보일 일도 없다.
“후우…저기 괜찮아요? 미안해요 갑자기 달리기 시작해서.”
“훌쩍…히끅!”
소녀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나.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걸더니 갑자기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한다면 나라도 무서워서 주저앉을 것 같다.
“저기,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갑자기 울기 시작해서 당황하는 바람에….”
“우우…우아아앙!”
히익!! 또 울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내가 고민하는 동안에도 소녀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옛날에 어렸을 때 수연이가 울 때처럼 달래줘야하나?! 으으…내 앞에서 우는 걸 보인 여자는 지금까지 동생이 전부였고, 그 때마다 그렇게 해서 울음을 그치긴 했었는데…….
일단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없지?! 아무도?!
꼬옥-
나는 소녀를 가볍게 안고 다독였다.
움찔-!
“그…울지 말아요.”
소녀는 당황해서 인지 진정이 된 것인지 목 놓아 우는 것은 멈춘 것 같았지만, 울음을 완전히 멈추진 않았다.
“흑…우에엥….”
그렇게 한 2~3분 정도가 지났을까, 소녀는 울음을 완전히 멈추었다.
“저…좀 진정됐나요?”
“훌쩍…….”
일단 울음은 그친 것 같은데…아니 그런데 한국말은 알아듣는 건가?
“혹시 한국말…할 줄 알아요?”
끄덕-
“아, 그래요? 다행이네. 영어를 잘 못해서 걱정이었는데.”
하아…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훌쩍…”
“저기 일단 전 무서운 사람이 아니고, 대학생이에요, 대학생. 아까 저 옆에 있던 작은 대학교 있죠? 그 대학교 학생이에요.”
“…….”
당연하지만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
“흠…아 여기요.”
나는 지갑에서 학생증을 꺼내 소녀에게 내밀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믿기 힘들겠지만, 일단 저도 교육대학교 학생이고, 이상한 짓은 절대 하지 않아요.”
“…정말인가요?”
오오, 목소리 처음 들었다! 진짜 한국어 할 줄 아네?
“그럼요.”
“…….”
또 입을 다물어버렸다.
“진정이 좀 됐으면 뭐라도 마시러 갈래요? 목마르죠?”
끄덕-
“저 쪽에 카페가 있으니까 거기로 가요.”
“…….”
“괜찮아요. 정말 이상한 짓 안 한다니까요? 아니, 그것보다 얼굴부터 닦아야겠네요.”
펑펑 울어서 그런지 눈도 조금 부은 상태이다.
“근처에 수도가…아!”
저번에 사둔 물티슈가 가방에 있을 거야, 아마.
“어디보자…여기 있네.”
“……?”
소녀는 내가 뭘 하는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물티슈로 얼굴 닦아 줄게요. 펑펑 울어서 눈가랑 볼 좀 닦아야겠네요.”
“괘…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이리 와봐요.”
나는 물티슈로 소녀의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움찔!
“차…차가워요….”
“그래도 참아요. 지금 그 예쁜 얼굴이 말도 아니니까.”
“…….”
조심스럽게 소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자, 다 됐어요.”
“…….”
“아참 카페로 가기 전에 뭐 먹을래요? 지금 점심때라 저도 아까 밥을 먹으러 가던 길이었는데. 밥 아직 안 먹었죠?”
끄덕-
“그럼 저기 샌드위치 가게가 있으니까, 거기 가서 점심부터 먹어요. 알겠죠?”
소녀는 멈칫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빨리 안 오고 뭐해요?”
나는 앞서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아…!”
소녀는 금세 쫓아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고 따라왔다.
샌드위치 가게에 자리를 잡고 주문한 후 샌드위치를 받아 자리에 돌아갔다. 사실 샌드위치는 비싸기만 하고 양은 적어서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외국인을 데리고 순대 같은걸 먹으러 갈 수도 없고, 당장 서양인이 먹을 만한 게 샌드위치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이거 먹어요. 학교 여자애들한테도 인기 많아요, 맛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나는 먹기 시작했지만, 소녀는 머뭇거리기만 하고 먹지 않았다.
“왜 안 먹어요? 맛있는데. 돈은 신경 안 써도 되니까 먹어요.”
포장지를 열어 먹기 좋게 해주었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이런 거 가지고 뭘.”
소녀는 나를 쳐다보며 조심조심 먹기 시작했다. 역시나 배고팠는지 샌드위치 하나를 금방 다 먹고는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입가를 닦았다. 마침 가게에 사람도 별로 없었기에 커피도 시켜와 앉았다.
자, 이제 이것저것 물어봐야겠지? 그리고 배도 부르고 해서 그런지 나를 경계하는게 조금 느슨해진 것 같기도 하고….
“저기, 맛있게 먹었나요?”
“네, 덕분에.”
“다행이네요. 그런데 이제 슬슬…….”
“네?”
“그…길을 왜 잃어버렸어요?”
“저…저는 길을 잃어버린게 아니에요!”
“그…그래요?”
“네!”
“그럼 왜 혼자 있었어요? 아, 그리고 어디서 왔나요? 이 쪽 지리를 거의 모르는 것 같던데….”
“저는 덴마크의 공주 릴리아나 제인 마르그레테(Lilyana Jane Margrethe)라고 해요.”
“네……?”
“그…그리고 제가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니고 가신들이 잃어버린 거예요!!”
“헤……?”
나는 내 귀를 의심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