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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출발해 XX공원으로 향했다. 무의식적으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걸었다 뛰었다를 반복하는 것이 참으로 꼴사나웠다. 마치 소풍가는 날의 초등학교 1학년처럼 말이다. 그리고 작가선생은 독자들이 자기처럼 문해력이 떨어지는 줄 아는지, 나한테 일일이 설명하라고 강요한다. 어이, 사랑에 빠진 남고생의 입장도 고려해달라고. 그렇게 부끄러운 말들을 일일히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 그리고 사랑이라고 했는데, 좋아하는 거 아니거든. 그저 애들이랑 같이 노는 게 신나서 그러는 거야. 이거이거 내가 서술자 그만두고 싶구만.
조금 걸어 도착한 공원은 지하철 역 근처에 있다. 시계를 쳐다봤다. 11시 55분. 거의 딱 맞춰왔다. 다른 애들이 왔는지 공원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이곳을 둘러봐도 저곳을 둘러봐도 초록색 덤불숲과 구불한 등산로뿐. 어 저기! 나무 벤치에 현진이가 있었다. 이거 나름 정형 시조의 형식을 맞췄는데 시처럼 보이진 않네. 라노벨도 제대로 못쓰는 주제에...
"어? 왔네?" 현진이가 손을 흔들었다. 중천에 뜬 햇빛이 풍성한 머릿결에 반사되었는지, 그녀는 분명히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빛보다 더 밝게 미소짓고 있었다.
"빨리 왔구나. 안녕." 나도 인사를 해본다.
"뭔 소리야. 11시 30분까진데?" 뭐라고? 분명히 12시까지라고 했지? 1인칭 서술이기 때문에 내가 잘못들으면 어쩔 수 없는 법이다. 뭐, 1)모 라이트노벨 주인공은 1인칭 서술이라면서 고백대사를 전부 다 듣고도 '응? 뭐라고?' 따위를 하기도 한다만. 내가 잘못들었겠지.
"뭐? 그럼 애들은?"
"먼저 갔을껄?" 현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녀석 천연캐릭터였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 당황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오호라, 혹시 의도적으로 우리 둘이서만 오게 만든건가? 이 친구들 정말 착하잖아. 그런데 현진이는 왜 거기에 동의했지? 설마 그 동안 나한테 한 게 어장관리가 아닌거야? 그렇다면!...일리가 없다. 그냥 두 명 전부 실수한 거겠지.
"그럼 빨리 애들 밥먹는데 가야겠네. 어디서 먹는다더냐?"
"아... 그렇네. ABC레스토랑이라던데?" 현진이는 뭔가 갑자기 차분하게 말했다.
"빨리 가자."
"그래."
지하철을 탔다. 오늘 한화 경기를 보러가는 사람이 많은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기... 앉아." 자리가 하나밖에 없었다. 딱히 양보해드릴 분은 없었기에 그냥 현진이에게 양보해주기로 한다.
"고...마워."
지금 여자애랑 단둘이 지하철 타고 오고 있어서 부럽다는 분도 많을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 지하철에서 뭔가 대화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서로 무시하고 폰을 할 수도 없는 법이다. 음악은 더더욱 안 된다. 일단 종류가 종류인지라... 할 수 없다. 갑자기 지하철에 테러리스트가 쳐들어와서 내가 한 명을 제압한 뒤 무기를 빼앗아 싸우는 상상 따위를 하면서 갈 수 밖에. 교실이었다면 바리케이드로 쓸만한 책상이 있었을텐데 지하철에는 그것도 없다. 그냥 총을 연사하는 게 낫겠다.
한화이글스 구장 근처에 도착했다. ABC레스토랑도 아마 이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말은 레스토랑이지만 분식점 느낌이다. 이런 걸 경양식이라고 하던가? 아마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에서 엑셀러레이터가 라스트 오더에게 사준 식당 정도일 것이다. 우연히도, 나는 예전에 여기서 행복하게 밥을 먹었던 적이 있다. 기분이 묘했다.
"안녕?"
"먼저 시키지 그랬어?"
"에~이. 그럴 수가 있나." 예의상 겉치례 인사가 오고간다.
"너네 뭐 먹을꺼야?"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뭔가 어디서 많이 먹은듯한 소스가 뿌려진 돈가스가 나왔다.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음. 맛있네." 나는 내 앞에 있던 콜라를 빨아먹으며 말했다.
"저... 저기. 그거... 내꺼.." 앞에 앉은 현진이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확실히 내 껀 내 옆에 있었다.
"그 빨대.." 그제서야 나는 상황을 인지했다. 수명이 끝나서 적색거성이 된 태양마냥,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 미안!" 필사적으로 나는 사죄했다.
"하늘이 얘, 일부러 그런거 아냐?” 애들이 나를 놀렸다.
“아, 아니거든. 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지만 그 뒤부터 나와 현진이는 음료수를 마시지 않았다.
경기장에 도착했다. 벌써 여기 몇번째야. 이제 지겨울 지경이다. 애들이랑 놀러온 거니까 일단 즐거운 척은 해야될 것 같은데 큰일이다. 우리는 먼저 표를 물어보기 위해 소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라야, 어디야?”
“오빠, 왔구나. 표 판매대에 있어. 내가 금방갈게.”
그러고 나서, 어찌어찌 표를 구했다. 내가 좋아하는 1루수 쪽 3층이다. 앞줄에 5명, 뒷줄에 4명이 앉는 듯했다. 아마 앞줄은 자기 자신이 앉아있을 곳임이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하늘이 오빠 동생, 소라에요.” 그러더니 소라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공을 꺼냈다. 사인볼이었다.
“우와~ 고마워~.”
“소라는 대단하구나~”
그럭저럭 인사를 하고는 경기장에 들어갔다. 경기 10분 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있었다. 한화가 여러 번 이긴 탓에, 헛된 희망을 갖게 된 것일까. 하지만 소라가 있는 한, 그것은 헛된 희망이 아닐지도 모른다.
“와~ 사람이 많네~”
“저기 얘, 오늘 몇 대 몇으로 이길 것 같니?” 친구들 중 누군가가 물었다.
“7대 3이요.” 소라는 자신있게 말했다.
“도대체 맞추는 원리가 뭐야?” 수한이가 말했다.
“글쎄요~. 어쩌면 배트를 2)열팽창시켜서 공에 맞을 확률을 높일지도 모르죠.” 아니, 어떻게 이기느냐고 물은게 아닌 거 같은데. 게다가 어마금 팬으로써 그런 드립을 자제 좀 해주라.
경기가 시작되었다. 1회, 2회, 3회. 양 팀은 아무런 소득없이 타자만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이거 묘하게 야하잖아? 미안하다. 4회 초, 한화는 1사 3루 상황에서 희생플라이를 허용해 1-0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5회 초가 되었을 때, 상대는 2사 2,3루 상황에서 안타를 기록해 2점을 추가, 한화는 3-0으로 뒤지고 있었다.
“이거 뭐야…”
“이러다 지겠네…”
하지만 소라는 확고한 표정에 변화가 없는 듯 했다. 시간이 난 틈을 이용해,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를 먹었다. 그리고 6회가 시작되었다. 6회 초는 무사히 방어에 성공했다. 그리고 6회 말, 첫번째 타자가 몸에 데드 볼을 맞았다. 두 번째 타자는 투수 키를 살짝 넘기는 안타를 뿜어내, 무사 주자 1,2루의 상황을 만들었다.
3번째 타자가 들어섰다. 첫번째 공은 스트라이크였다. 두번째 공은 유인구였지만, 속지 않았다. 세번째 공은 제구가 안되었는지 높은 볼이었다. 2볼 1스트라이크. 타자가 유리했다. 그리고 4번째 공, 투수는 다급한 나머지 스트라이크를 넣으려고 했으나 약간 높았고, 우리 타자는 배트를 크게 휘둘렀다. 공은 마치 y는 마이너스 2분의 1 엑스의 제곱의 그래프같은 높은 포물선을 그렸다.
“저거저거 넘어가는 거 아냐?” 이름없는 친구, 줄여서 3)노네임드 2명 중 한명이 말했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였다.
“와~~~~~~~”
“동점이다, 동점!” 우리는 무심결에 소리를 질렀다.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갑자기 현진이의 반응이 신경쓰였다. 뒤돌아봤다. 다행히 그녀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 했다.
7회와 8회는 모두 아무런 점수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9회 초. 한화는 무사 주자 1루의 위기를 병살타로 처리하고는, 남은 타자 한명을 싱겁게 삼진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9회 말. 무사 주자 1,2루의 기회를 맞았으나, 뒤이은 2명의 타자가 모두 삼진아웃 당해버렸다. 그리고 다음으로 들어온 김태균 선수는 배트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볼넷으로 만루가 되었다. 9회 말 2아웃 주자 만루. 뭔가 영화같다. 다음 타자가 어떻게 할지에 오늘의 경기가 달려있다. 아마 소라의 예측이 맞다면, 저 타자는 만루홈런이다.
땅! 말도 안된다. 공은 담장이 아니라, 경기장 전체를 넘어서 그 밖에 떨어졌다. 장외홈런이라는 거다.
“까양캐다갇오와다가아아아악!”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괴성을 지르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방방 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에도 왠지 모르게 뒤돌아봤다. 4)저, 신경쓰여요! 부끄럽지만 여러분도 이런 경험, 한번쯤은 한 적 있잖아?
“오빠. 그렇게 좋아?” 소라가 나를 보며 말했다. 분명 웃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슬픔이 보였다. 이 녀석, 질투하는 건가. 혹시 ‘그렇게 좋아’의 주어는 현진이? ...그럴 리가 없는 게 당연하다. 소라와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나도 소라의 남자친구를 본다면 진심으로 기뻐해줄 수 있다.
“데가 갤가 맞췄됴?” 소라가 혀를 깨물고 말했다. 게다가 이상한 가방까지 매고 있다. 이건 뭔 5)카미마시타인가.
“그래, 너 정말 대단하다, 얘” 여자애 1이 말했다.
“진짜 어떻게 한거야?” 이건 불특정 다수다.
“글쎄요~” 소라는 애교를 떨었다. 어딘가 슬퍼보였지만, 요즘 항상 이 표정이다. 그냥 얘 표정이 이런 것 같다. 왜 15년동안 살면서도 몰랐을까.
“에이, 그러지말고~” 애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면서 소란스러워졌다.
“자 그럼, 오늘 이만 집에 갈까?” 내가 말했다.
“아직 5시인데? 어디 안갈래? 노래방이라던가.” 5시였구나.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어서 몰랐다니까. 그보다 사과폰이 배터리를 못가는 건 참 불편하단 말이지.
“그러자, 그러자.” 이 불량 청소년들. 내일은 월요일이야. 하지만, 이상하게 가고 싶어졌다. 이성이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게 이런 건가보다.
“노래방 좋네.” 현진이마저 동의했다. 한참을 애들끼리 떠드는 것을 듣고 있기도 뭐하고, 나도 결단을 내렸다. 뭐, 나도 현진이랑 더 노는 게 딱히 싫지는 않았다.
“저기 소라야, 그럼 오빠는 친구들이랑 놀테니까 먼저 들어가 있을래?”
그렇게 말하고는, 나는 친구들과 같이 지하철 역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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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친구가 적다
2)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의 대표적인 과학적 오류. 권총을 커피에 넣어 열팽창시켜서 못 쏘게 만든다는 것인데, 탄환의 화약이 폭발할 때 온도는 커피 따위는 아득히 넘는다.
3) 네이버웹툰 <노 네임드>
4) <빙과>의 치탄다 에루가 자주 하는 대사.
5) <이야기 시리즈>의 하치쿠치 마요이.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