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권이 1997년 10월 일본측에서 제시한 잠정공동수역안(잠정조치수역은 독도 중간수역)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공동수역이 된 것에 대해 박정희 정권의 독도밀약뿐만 아니라 이또한 독도영유권 훼손이라고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136]
한일어업협정은 김대중 정권에서 최종 타결됐지만 문제의 조항을 수용한 것은 김영삼 정권이였다.[136]
1995년 11월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장쩌민 중국국가주석과 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독도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간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그야말로 ‘감정 그대로의 표출’이었다.[136]
이로인해 일본이 1965년 체결된 한일어업협정의 ‘일방적 종료’를 통보해온 것은 그로부터 약 2년 2개월 후인 1998년 1월이다. 당시 김영삼 정부당국자는 일본의 어업협정 파기가 치밀하게 계획된 수순이며, YS발언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단언했다. ‘버르장머리’ 발언 자체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한·일간 갈등이 수면위로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약 1년반 뒤, 일본이 이른바 ‘직선영해기선’을 적용, 한국 어선들을 나포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에 앞서 일본은 19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에 근거해 근해의 작은 섬들을 직선으로 연결, 영해기선을 새롭게 설정하고, 1997년 1월1일을 기해 시행에 들어갔다. 1997년 5월 당시 유종하 외무장관도 미국방문 길에 수행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어업문제에 대한 일본의 요구가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러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일간 신어업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은 이런 상황에서 시작됐다.[136]
새 유엔해양법조약에 따른 양국간 배타적경제수역 경계획정 문제가 맞물려 기본적으로 복잡한 구조인데다, 한국으로서는 나포된 선박과 선원 처리에 있어서 ‘명분’까지 확보해야 하는 힘든 상황이었다. 칼자루를 쥔 쪽은 명백히 일본이었고, 한국은 “한일간 어업문제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로 맞서는 것이 고작이었다.[136]
한일간 동시에 판을 깰 경우 우리 어민들이 입게 될 경제적 손실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YS의 양보로 한국은 종래의 기본입장을 수정하여 1997년 3월 6일부터는 경계획정 문제와 어업문제를 분리 협상하자는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YS정권은 이어서 같은 해 1997년 10월 8일 동경에서 열린 제6차 한일 어업실무자 회의에서, 동해의 독도를 포함한 수역에 잠정조치수역을 설정하는 안에도 결국 동의하였다.[136]
김영삼 정권 당시의 한일 어업협정
1996년 5월 9일부터 열린 한일(韓日)간 어업협정 개정을 위한 실무자 회의에서까지도 이러한 한국의 기본입장은 재확인되었으나 이미 이러한 어려운 입장이 흐지부지 와해(瓦解)될 수 있는 소지는 3월부터 대통령 자신에 의해서 마련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국내용(國內用)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김영삼 한국 대통령의 대일(對日) 초강경(超强硬) 발언은, 신중하게 검토되지 않은 감정적(感情的) 발언으로서, 대일관계(對日關係)에서 한국 정부에게 결과적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외교적 부담(負擔)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한국 대통령의 초강경 발언이 있은 지 한 달도 못된 3월 2일부터 태국 방콕에서 열린 ASEM 회의에서 하시모도 일본 수상은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자마자, “신 해양법 협약상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 제도의 도입과 관련해서 필연적으로 제기될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김영삼 대통령은 하시모도 일본 수상에게 특별한 언질(言質)을 주지는 않은 것 같다.
하시모도 일본 수상과 김영삼 한국 대통령은 동년 6월 23일 제주 정상회담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하시모도 일본 수상은 똑 같은 의제(議題)로 다시 김영삼 대통령을 압박하였다. 이에 대해 김대통령은 “영유권 문제와 어업협정은 별개의 문제로 하여 해결하자”라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김동조 전 주일대사(駐日大使)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 한일(韓日) 정상회담에서 일본 총리의 발언에 김영삼 한국(韓國) 대통령이 말려들은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김대통령의 이 발언은, “한일간에 독도에 관한 영유권 문제가 현안으로 존재한다”는 일본의 주장을 묵살하지 않고 인정한 셈이 되는 것이다. 김동조 전 주일대사는 “일본 언론까지 나서서 김대통령과 한국 정부의 태도 변화를 “유연한 자세...” 운운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사실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회고(回顧)하고 있다.
이어서 1997년 1월, 일본 규슈 벳뿌에서 열린 한일(韓日)간 정상(김영삼-하시모도)회담과 외무장관회담에서 1996년 초부터 경색되어온 한일관계(韓日關係)를 개선한다는 원칙적 합의가 있었다. 즉 한국 대통령의 결정적인 양보(讓步)가 확인된 것이다.
대통령의 양보(讓步)로 한국은 종래의 기본입장을 수정하여, 1997년 3월 6일부터는 경계획정 문제(영유권 문제를 전제로 하는)와 어업문제(漁業問題)를 분리(分離) 협상하자는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한국은 이어서 같은 해 10월 8일 동경에서 열린 제6차 한일 어업실무자 회의에서, 동해(東海)의 독도(獨島)를 포함한 수역에 잠정조치수역(暫定措置水域)(잠정조치수역은 독도 중간수역)을 설정하는 안에도 결국 동의하였다.
IMF 터지고 난 이후 그 여파로 인하여 경제의 후유증이 사회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게 되었고, 노무현 정부 당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의 메이저 언론계는 진보 측의 김대중과 노무현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실상 IMF 사건은 신한국당(현재 한나라당)의 김영삼 정부 중기부터 이미 이상 징후가 감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굴욕적 어업협정을 가지게 되는 원인은 신한국당(현재 한나라당)의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있었으나, 아무런 상관이 없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손에 행한것처럼 꾸며내어 자신의 잘못을 되려 남탓으로 돌리는 소위 메이저 언론의 말장난을 그대로 믿는 어리석음을 범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며 슬픈 현실이지 않은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항상 거짓말을 해왔던 자칭 보수계의 모습은 마치 자신들의 잘못을 운동가들에게 뒤짚어 씌워 폭도로 매도하였고 자신들의 잘못을 미화하는 등의 거짓말을 해왔던 것처럼 절묘하게 겹쳐져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