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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istory_29996
    작성자 : DireK
    추천 : 0/11
    조회수 : 1736
    IP : 58.231.***.153
    댓글 : 6개
    등록시간 : 2020/06/12 04:56:46
    http://todayhumor.com/?history_29996 모바일
    고구려가 한국사인가? 한민족의 기원
    애초에 한국인에 고구려는 없다. 그러한 것이 참칭된 것은 실상은 정치중심이 현대의 개성과 서울지역으로 옮겨간 뒤에 서울지역의 구체제적인 기득권이 가졌던 선민사상이 고구려에 대한 낭만주의로 실상은 잔존하였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결과들은 오늘날의 서울지역은 명백하게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지역이었음을 증거한다.

    그러하다면 정작 서울로부터 단지 100킬로도 되지 않는 지역인 개성일대의 것들이 고구려를 참칭한 것 또한 실상은 실제의 고대사와는 전혀 다르다는 문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고구려가 팽창하였을 때에는 백제지역을 영유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중원고구려비의 존재를 고구려의 팽창으로 봐야하는 근거는 지금은 없다고 봐야 하는 상태이다. 중원고구려비는 단지 고구려와 신라의 제휴관계를 시사하는 외교적인 비석일 뿐이다.
    되려 마운령비와 함초령비가 신라의 팽창의 결과물이다.

    마운령비.jpg

    마운령비의 내용이다. 문제는 이 짓을 고구려의 전영토에 해놨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심히 빡치지 않았을 것 같은가?

    고구려가 끝까지 한민족인줄 착각하는 부류들에게는 빡칠 일이지만 애초에 신라의 한민족들에게 고구려라는 것은 영토나 슬금슬금 우려먹을 한갖 야인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신라의 고구려에 대한 열위론자들은 실상은 만주국계열의 정권이 존재하던 시기의 친일파들이고, 정작 중원고구려비는 신라의 이사금이 외교와 경제를 통해서 고구려왕을 제어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애초에 그들의 관계가 그러한 것이다. 고구려는 정복을 위해서 신라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이라는 놈은 대왕이라는 칭호가 무색하게 신라내에서 일어난 영주들과 왕권의 다툼에서 용병을 뛰러 온 것이다. 그러한 영주세력을 아마도 가야 혹은 왜로 표시하였다.

    광개토가 그간 한국인인 것처럼 나치의 레벤슬라움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강역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진영논거에 의해서 한국사로 비정된 것은 모두 친일파들의 작품이고, 완전한 역사에 대한 왜곡이다.

    되려 광개토와 가장 비교될 수 있는 사례는 정작 조선조 전기에 존재한다.

    맹가 첩목아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태조 4년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회령 지방에 살던 여진 추장 맹가 첩목아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서울로 와서 숙위하기도 하고, 이후 때마다 자기가 다스리던 여진족의 상태를 보고하고 지방 정사를 논했다.

    이 맹가 첩목아가 바로 청나라를 세운 아이신교로 누르하치의 6대조다. 그러므로 누르하치가 세운 청나라는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과장해 말하자면 한반도의 조선은 제1조선 또는 동조선이고, 청나라는 중국 대륙에 세워진 제2조선 또는 서조선이라고 할 수 있다. 


    뭐 약간 본인이 싫어하는 국뽕이 가미된 것이지만 내용만 보자.

    맹가첩목아는 회령 지방에 살던 여진 추장으로써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서울로 와서 숙위하기도 하고, 여진족의 상태를 보고하고 지방 정사를 논할 뿐 아니라 그가 지배하던 부락의 구성원들을 이끌고 조선조 전기에는 이성계를 위해서 참전하기도 하던 집안인 여진족이다.

    맹가첩목아.jpg

    를 보면 맹가첩목아는 조선의 말 잘 듣는 똘마니일 뿐이다. 그러나 위의 그림의 15. 번 기사에서는 맹가첩목아를 명 황제가 회유하려는 외교전이 개시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신라조부터 조선조 중기까지 한국인의 문명은 여진족들은 꽉 붙들어두고 있었다. 광개토가 한민족이라는 개소리는 만약에 조선이 약체화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도 않을 논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논조 자체가 20세기의 친일파들의 시대에 프레임이 형성된 것이다.

    다만 조선은 유교적인 관습에 따라서 그간 한반도에 존재했던 모든 왕국들의 개국조들의 신위에는 특별히 제사를 지내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동명성왕이라는 존재를 넣어줬던 것이다.

    그렇나 부분이 조선이 마치 고구려를 같은 민족의 나라로 인정했다는 낭설로 퍼진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던 14세기에는 민족주의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는 점을 이해하자.

    허조세종.jpg

    이미 실록에 그러한 취지를 잘 설명해놨다. 조선조 초기에 모든 제도가 정립되던 시기에 실제로 고구려는 빼자는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맥을 이해한다면 제사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일입니다.' 라는 문단으로부터 고구려를 넣냐 아니냐는 고구려에 대해서도 제사를 지내줄 것인가 아닌가를 논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허조의 논거는 고구려는 이 나라에 공 세운 것도 없고, 오늘날의 단어인 문명의 관점에서 전장과 문물이라는 것은 단지 신라의 제도를 증감한 것이니까 신라 시조에게만 제사를 지내고 고구려는 빼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관해서 세종이 말하기를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하지 말자고 단지 정치가스러운 포용을 말해서 고구려도 유지된 것이다.

    결론은 고구려에게도 제사를 지내 줄 것이라는 것이다.

    단지 이러한 조선 초기의 논의로부터 고구려는 이후의 왕들에게서는 관성적으로 제사가 지내졌던 것이다. 그 것은 한민족의 강역으로 해석한 것은 실상은 만주국과의 내선일체 논거인 친일파들의 완전한 왜곡이라는 것이다.


    중원고구려비.jpg

    이 것이 5세기 고구려 우위론의 증거라고 하는 중원고구려비이지만 정작 교를 내리는 주체는 신라왕과 고구려왕이 혼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의 내용은 신라왕과 고구려가 형제지교를 맺은 뒤에 그에 상응하는 조처들로써 신라 매금이 자신의 영토의 제중인들에게 교사를 내리고, 그러한 후속조처들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 것이 고구려의 척경비라고 우기는 것들은 아주 더러운 친일파새끼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형제지교의 증거로써 의복을 서로 내렸거나 혹은 신라쪽에서 내렸다.

    상식적으로 세세토록 형제토록 지낸다는 표현을 삼전도의 굴욕같은 상황에서 했겠냐고도 반문할 수 있다.

    게다가 정작 중국쪽의 기록에서 고구려와 신라는 수나라때 이전까지는 잘 지냈는데, 어느날 신라가 함경도의 고을들을 털어가면서부터 외교관계가 경색되었다고 고구려쪽에서 항변하였다.

    그러니까 중원고구려비가 세워질 때에는 고구려와 신라는 아주 우호적인 관계였다는 것이다.


    제발 유사사학들을 따르지 말고 증거만 보자고. 게다가 광개토와 장수왕에 대한 논거 역시도 매우 한정적인 부분만 부각한 것이다.
    고구려왕은 애초에 그다지 실권이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고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으니, 곧 한(漢) 낙랑군(樂浪郡)의 옛 땅으로서 장안(長安)의 동쪽 5천 1백 리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 백제(百濟)에 이르고 북쪽은 말갈(靺鞨)에 이른다. 동서가 3천 1백 리요 남북이 2천리이다. 그 관직에서 가장 높은 것을 대대로(大對盧)라 부르고 1품에 비견된다. 나라의 일을 총괄하여 주재하는데 3년에 한 차례씩 교체하는데, 만약 그 직위에 적합한 자면 연한의 제한에 거리끼지 않는다.

    교체하는 날에는 혹은 서로 공경하여 복종하지 않고, 모두 군대를 이끌고 서로를 공격하여 이기는 자가 대대로가 된다. 왕은 단지 궁문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제어하지 않는다. 

    문자명왕 이후에 고구려왕들이 실제로 5부가 내전을 하는 동안에 궐안에서 틀어박혀서 존버나 하고 있었다는 것은 왜 언급하지 않는가?

    고구려의 왕은 대대로 실권이 없는 종자지만 유독 광개토와 장수왕과 문자명왕 때에만 조금 권력을 행사하였을 뿐이다. 그것이 기승전결이나 전후관계를 모두 다루는 온당한 관점인 것이다.

    그러니까 고구려 강대국론은 완전히 허구이고, 실상은 고구려에서 애초에 왕의 지위는 제사장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애초에 제사를 지내던 집안을 뜻하던 것으로 간주된다.

    고구려의 그러한 제사형태에 대해서는 남조와 북조가 모두 기록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점들은 친일파들에게 특히 곡해될 동기가 있었다. 왜냐면 천황이라는 직책도 일본의 19세기에 이르러서 의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에도 막부가 등장하기 이전의 일본사에서 천황의 위치는 제사나 지내던 삼한의 천군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아시카가 쇼군은 천황을 무려 내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점괘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내쳐져서는 황가의 무속인 여자들이 몸 팔아서 연명하고, 시주나 받아서 연명하던 것을 도쿠가와 이에야쓰라는 놈이 데려서는 앉히고는 일본의 명목상의 국왕으로 허수아비를 앉힌 것이 본래의 천황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천황가로부터 기인하는 피라미드형 복종사회라는 모델자체가 실상은 메이지유신의 존왕양이를 외치던 쿠데타 세력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아시카가 쇼군과 천황의 관계는 마치 연개소문과 보장왕의 관계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되려 이러한 관계가 더 고구려사내에서 보편적이었다고까지 해석될 수 있다.

    요컨데, 고구려왕이 조선이나 고려조의 왕과 같은 전제적인 존재였냐는 것 자체가 의문점이다.

    여기에 대해서 중국의 사서는 고구려의 왕은 제사나 지내는 존재이고, 정권은 정작 일본의 쇼군과 마찬가지로 5부들이 쌈판을 벌여서는 이긴 놈이 대대로가 되는데, 대대로와 쇼군은 거의 비슷한 것이고, 이론상으로는 3년마다 재신임을 받아야 하지만 연개소문과 마찬가지로 한 번 쳐 먹은 놈이 딱히 갑자기 권력이 줄 리가 없으니까 실상 연령의 제한없이 종신대대로로 행사하였다는 것이다.
    아마 여기서 대대로의 교체가 있다는 것은 나라내에서 극적인 정치이벤트가 일어났다는 뜻일 것이다.


    이러한 일반론을 깔고 보면, 단지 광개토와 장수왕과 문자명왕만이 특이점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특이점이 있는 이전의 고구려왕들과과는 다른 실권을 가진 존재였던 것 자체가 어쩌면 신라 내금과의 제휴관계에 의한 것임을 중원고구려비는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작 고구려의 왕이라는 것은 5부의 실권자들이 대대로쟁탈전을 벌이면 존버나 치던 존재인데, 광개토에서 문자명왕까지만 왕권이랄 것을 가져봤다는 것이다.

    게다가 동명왕이라는 것은 고구려왕이 대대로 제사를 지내던 고구려적인 mythism의 산물이지 실제인물이라고 하기 어렵다.

    혹은 그 것은 아마도 극지방 제민들의 구전역사가 의외로 신빙성이 있다는 부분을 고려한다면, 고구려인들의 매우 오래된 초기 정착자들의 리더이던 실존인물일 수는 있다.

    EU4-Jianzhou-Start.jpg

    자 여기서 북부여는 부리야트이고, 동부여는 예렌으로써 부리야트는 몽골인들 중에서 시베리아에 사는 자들을 일컫는 표현으로써 몽골로써도 이해될 수 있고, 예렌은 여전히 예이므로 고구려인은 예와 맥의 교집합내에서 탄생한 집단이다라고 한다면 고구려의 근본에 좀 더 다가설 수 있다.

    부리야트.jpg


    부리야트와 칼미크는 실상 서식지가 다른 몽골인들이 지칭되는 것이다.

    몽골인들이 후일에 중국에 정권을 세웠을 때에 여진족들을 우대해준 것조차도 실상은 그들을 몽골인의 동포인 부리야트계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여진족들의 언어는 퉁구스 계열로써 몽골과는 완전히 상이한 선남방계집단이다.


    다운로드 (1).jpg

    이는 총 273개의 게놈을 생정보학(bioinformatics) 기술을 이용해 수퍼컴퓨터로 분석됐다. 결론적으로 ‘한국인은 수 만 년 동안 동남아시아에서 여러 차례 올라온 사람들의 자손들의 복잡한 혼혈’이라는 것이다.

    이번 연구는 수십년간 논쟁의 대상이었던, 까발리 스포자 박사의 중앙아시아 쪽에서 동쪽으로 대륙을 건너온 북방계와 남쪽에서 온 중국계 남방계가 혼합돼 한국인이 형성되었다는 설이 맞지 않음도 재증명했다.

    2017년 같은 연구진은 8000년전 신석기 동굴인(선남방계)과 현대의 베트남계 동남아인 (후남방계)을 융합했을 때 한국인이 가장 잘 표현됨을 밝혔었는데, 이번에는 추가로 4만년에서 수천 년 전의 동아시아와 동남아 고대인 게놈 데이터 115개를 분석하여, 선남방계(북아시아지역인)와 후남방계(남중국지역인)의 혼합이 수천 년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보였다.


    여기서 선남방계는 위의 그림에서 보이듯이 북경과 동북3성일대의 원주민들이고, 그들은 애초에 동쪽으로 대륙을 건너온 북방계가 아니라 신석기 동굴인들이다. 그 것은 퉁구스계의 여진인들과 한국인들의 교집합이 되는 지점인 것이다.
    그들에게 베트남계 동남아인들이 융합된 것으로 김해지역의 오랜 설화인 캄보디아계 부남왕조의 허황후로 대표되는 인구집단이 한국에 정착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정작 서쪽에서 동진해온 인구집단은 동돌궐인들이 내외몽골에 정착한 최소한 기원후 3세기 이후의 일인 것이다. 그러한 동진해온 인구집단으로부터 부민 카간이라는 놈이 카간이라는 칭호와 함께, 투크르라는 진영이름을 창출하였던 것이다.
    그 것은 582년의 일이기 때문에 애초에 고구려가 부리야트계 선조를 가졌다고 기록된 부분조차도 후대의 외삽과 곡해일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가 582년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고구려가 부여의 후속국가라는 것은 실상은 몽골인들 밑에서 사역하던 여진족들의 후대에 믿어진 관점인 것이다.
    요컨데, 고구려도 몽골리안이라고 끼워넣기 위해서 후대에 외삽된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대(제위 1260~1294)에서 연경의 종사하는 지배계급으로써 금나라계 여진족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에 부여를 붙여넣은 것은 실상은 최대 기원후 1260년 이후에 원에 종사하던 여진족 엘리트들로부터 참칭된 허구의 것이다.

    그들 여진계 원나라 엘리트들로써는 자신들의 조상들의 국가인 고구려가 어떻게 해서든 몽골로이드의 하나인 양 각색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 한민족이나 여진족들의 유적은 기원후에나 발생한 몽골인들의 팽창과는 전혀 상이한 연원을 보이며, 한민족과 여진족이 그렇게 근본없는 역사는 아니다. 한민족과 여진족들의 근본은 거의 동굴인의 수준까지 간다는 것이 위의 게놈해독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1979년 7월 26일에 사적 제267호로 지정되었다. 유적은 한강 아래쪽의 하안단구에 위치하며 강 건너에는 아차산성이 마주한다. 1925년의 대홍수로 유물 포함층이 드러나면서 널리 알려졌고, 이때 황산장삼랑(橫山將三郞)나 등전양책(藤田亮策) 등 일인학자들이 엄청난 양의 토기·석기를 채집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에도 여러 차례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1966년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조사단에 의해 정식 발굴되었다. 이 때에는 원형 움집 2기와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돌도끼[石斧], 그물추[漁網錘], 간돌화살촉[磨製石鏃] 등이 출토되었다. 1967년에는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각 대학박물관의 연합발굴이 있었으며 1971∼1975년 사이에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이 4차에 걸쳐 조사하여, 신석기시대 집자리가 취락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발굴된 면적은 전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암사동 유적은 방대하다.

    암사동 유적의 방사성탄소연대값은 많으나 6200∼3400 B.P. 사이에 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나며 5000 B.P. 정도가 중심연대로 보인다. 토기무늬의 변천을 이용한 시기구분을 보면 토기의 대부분이 입술·몸체·밑 부분을 구분하여 무늬를 베푼 구분계 전면시문형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신석기 전기의 늦은 무렵)에 속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탄소연대측정값과 형식분류의 관점이 대체로 잘 맞아들고 있어 암사동 유적의 연대는 한국의 신석기시대에서 전기 늦은 무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빗살무늬토기와 민토기 사이의 이른바 과도기형 토기의 존재가 거론되며, 이 같은 현상은 바로 이웃한 미사리 유적에서도 드러나고 있음에 비추어 사람들이 암사동에서 신석기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살았다고 볼 수 있겠다.


    현대의 암사동 유적은 사실 제대로 발굴되지도 않았다. 아니 발굴될 수가 없다. 현대의 서울이 멸망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애초에 발굴이 제대로 되지가 않아서 미처 비정할 수 없지만 암사동의 취락은 실상 오늘날 서울 동부지역의 거의 태반을 아우르면서 백제성들과도 연속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 연배는 기원전 6200~3400년 사이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위의 게놈정보학의 표본으로써 기원전 8000년경의 동굴인이 쓰여졌음을 고려하면 한민족이나 한민족과 가장 많은 교잡을 한 동북3성 지역의 동굴인들은 거의 자생적으로 기원전 6200년 경에 신석기로 이행하였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서쪽에서 이주해온 몽골로이드들이 한민족에 융합되었다는 관점 자체가 실상은 중세에 생겨난 관점이며 전혀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내에서 남북조의 시대 이후에 등장한 선비-투르크계 지배집단들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엉터리고 비정된 중국사를 바로 잡으면 기원후 550년 경에 중국의 초나라의 장왕이라는 놈으로부터 중국 문명은 시작되었고, 기존의 가설과는 다르게 황하유역의 하은주라는 것은 황하유역의 허난성에 자리잡았던 선비-투르계 집단의 역사에 대한 고의적이고 광오한 오류로부터 발생한 낭설이다.

    카이펑과 정저우 일대는 선비족이 난입하였던 3세기 경에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있지만 실상은 만성적인 기근으로써 사람이 살기 힘든 지역이었던 것이 특이점이 있는 연도로써는 기원후 605년에야 수양제라는 놈이 운하를 파서 강남의 식량자원을 이송하는 대공사 이후에나 대량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지역으로 탈모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수문제라는 놈은 그전까지 우문씨가 취하던 선비족화를 금하고, 한인들 중 성을 고친 자들도 모두 한성을 회복하게 하는 한편 모든 선비족들에게도 한성을 써서 민족간 구분이 사라지도록 안배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한족으로 코스프레한 선비족들만 추출하기가 어려워진 이유이다.

    그러나 실상은 선비족끼리만 통혼하면서 한족들과 차별되는 지배계급을 형성하였고, 후일에 중국역사학자인 천친커에 의해서 관롱집단으로 비정되었다.
    관롱집단은 실상은 이민족 지배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관롱집단들이 동돌궐을 통해서 외몽골의 선비족계 집단과도 연결되어 있었고, 징기스칸이라는 존재는 동아시아내에서 별안간 등장한 집단이 아니라 582년에 돌궐 혹은 투르크라는 이름으로 발호하였던 집단이 키르기스족과 고구려인들에 의해서 외몽골로 축출되었던 군사집단들이 재등장한 것이다.

    징기스칸이라는 놈은 그러한 동동궐계의 오랜 귀족집안으로써 선민사상에 근거하는 선비족계 귀족집단의 혈통이라는 하나로 실상 그의 애비가 날려먹었던 세력을 같은 선비족 귀족이라는 계급적 성분 하나에 의거해서 그와 같은 지배계급이던 쟈무카와 옹칸의 지지에 의해서 모조리 회복할 수 있었던 동돌궐계 귀족집단이었던 놈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징기스칸은 그의 세력회복을 도와줬던 쟈무카와 옹칸을 후일에는 모두 내치고, 스스로가 대칸이 되게 된다.

    이러한 놈들은 모조리 한민족이나 여진족들보다 역사가 짧은 놈들이므로 그들이 한민족에 영향을 줬다거나 한민족의 기원에 섞여들어가는 설정은 완전히 곡해된 외삽이다.
    이러한 동호계 새끼덜의 역사가 중국사에 등장하는 것은 무려 기원후 386년의 북위의 성립 때에나 나타난 것이다.

    반면에 한민족에 영향을 준 베트남계의 후남방계들은 기원전 610년경에 초장왕의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초로부터 오와 월이 분가했다고 후대에 선비족 매너리즘에 의해서 사상가로 둔갑한 엉터리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역사가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던 공자라는 인간에 의해서 당시의 역사가 춘추라는 공자가 쓴 당대의 사서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역사가 공자에 의하면 초로부터 오와 월이 분가하였다. 그런데, 월나라는 이후에 선비족들의 침략 때문에 공자때에 언급된 지역보다 더 아래지역인 오늘날의 베트남일대로 밀려나게 되었는데, 그들 베트남인들이 한국인들과 매칭된다는 것이다.

    공자의 사서조차 후대에 선비족들에 의해서 외삽된 것으로 보고, 제나라는 북제를 위조한의 본신이었다는 진나라와 위나라는 북위를 송나라는 후대의 송의 데자뷰이자 코스프레인 유사역사로 비정한다면, 남게 되는 것은 진밖에 없게 되고, 춘추오패라는 것은 실제로 5명일 이유가 있고, 공자가 언급한 것은 초장왕과 오합려, 오부차, 월구천, 진목공의 실제로 5명이었을 것이다. 나머지는 후대의 정세내에서 만들어진 외삽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은 중국의 사천성일대에서 퍼져온 이주집단으로써 진과 초는 실상 같은 민족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에 유방이라는 놈은 항우에게 그들의 조상의 무덤이 있는 사천성일대로 물러나게 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한제국의 멸망 이전까지는 이들인구집단이 중국내에서 패권을 잡고 있었고, 이들은 사천성에서 일부는 북진해서 진나라를 세웠고, 주류들은 장강을 따라서 동진해서 초나라와 월나라와 오나라를 세웠다. 그러한 그들의 동진과 왕조의 흥망성쇠를 바로 그들과 교역관계이던 산둥반도의 변방인이던 공자라는 놈이 기록했던 것이다.

    따라서 진나라계의 유방과 초나라계의 항우는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양해에 의해서 유방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의해서 한국으로 건너온 월나라계들은 또한 진나라인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애초에 한국인에 고구려는 없다. 그러한 것이 참칭된 것은 실상은 정치중심이 현대의 개성과 서울지역으로 옮겨간 뒤에 서울지역의 구체제적인 기득권이 가졌던 선민사상이 고구려에 대한 낭만주의로 실상은 잔존하였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결과들은 오늘날의 서울지역은 명백하게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지역이었음을 증거한다.

    그러하다면 정작 서울로부터 단지 100킬로도 되지 않는 지역인 개성일대의 것들이 고구려를 참칭한 것 또한 실상은 실제의 고대사와는 전혀 다르다는 문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고구려가 팽창하였을 때에는 백제지역을 영유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중원고구려비의 존재를 고구려의 팽창으로 봐야하는 근거는 지금은 없다고 봐야 하는 상태이다. 중원고구려비는 단지 고구려와 신라의 제휴관계를 시사하는 외교적인 비석일 뿐이다.
    되려 마운령비와 함초령비가 신라의 팽창의 결과물이다.


    마운령비의 내용이다. 문제는 이 짓을 고구려의 전영토에 해놨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심히 빡치지 않았을 것 같은가?

    고구려가 끝까지 한민족인줄 착각하는 부류들에게는 빡칠 일이지만 애초에 신라의 한민족들에게 고구려라는 것은 영토나 슬금슬금 우려먹을 한갖 야인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신라의 고구려에 대한 열위론자들은 실상은 만주국계열의 정권이 존재하던 시기의 친일파들이고, 정작 중원고구려비는 신라의 이사금이 외교와 경제를 통해서 고구려왕을 제어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애초에 그들의 관계가 그러한 것이다. 고구려는 정복을 위해서 신라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이라는 놈은 대왕이라는 칭호가 무색하게 신라내에서 일어난 영주들과 왕권의 다툼에서 용병을 뛰러 온 것이다. 그러한 영주세력을 아마도 가야 혹은 왜로 표시하였다.

    광개토가 그간 한국인인 것처럼 나치의 레벤슬라움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강역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진영논거에 의해서 한국사로 비정된 것은 모두 친일파들의 작품이고, 완전한 역사에 대한 왜곡이다.

    되려 광개토와 가장 비교될 수 있는 사례는 정작 조선조 전기에 존재한다.

    맹가 첩목아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태조 4년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회령 지방에 살던 여진 추장 맹가 첩목아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서울로 와서 숙위하기도 하고, 이후 때마다 자기가 다스리던 여진족의 상태를 보고하고 지방 정사를 논했다.


    이 맹가 첩목아가 바로 청나라를 세운 아이신교로 누르하치의 6대조다. 그러므로 누르하치가 세운 청나라는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과장해 말하자면 한반도의 조선은 제1조선 또는 동조선이고, 청나라는 중국 대륙에 세워진 제2조선 또는 서조선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청(淸)나라-만주국은 곧 ‘우리 민족사’ [異論의 역사①]|작성자 ohyh45


    뭐 약간 본인이 싫어하는 국뽕이 가미된 것이지만 내용만 보자.

    맹가첩목아는 회령 지방에 살던 여진 추장으로써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서울로 와서 숙위하기도 하고, 여진족의 상태를 보고하고 지방 정사를 논할 뿐 아니라 그가 지배하던 부락의 구성원들을 이끌고 조선조 전기에는 이성계를 위해서 참전하기도 하던 집안인 여진족이다.


    를 보면 맹가첩목아는 조선의 말 잘 듣는 똘마니일 뿐이다. 그러나 위의 그림의 15. 번 기사에서는 맹가첩목아를 명 황제가 회유하려는 외교전이 개시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신라조부터 조선조 중기까지 한국인의 문명은 여진족들은 꽉 붙들어두고 있었다. 광개토가 한민족이라는 개소리는 만약에 조선이 약체화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도 않을 논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논조 자체가 20세기의 친일파들의 시대에 프레임이 형성된 것이다.

    다만 조선은 유교적인 관습에 따라서 그간 한반도에 존재했던 모든 왕국들의 개국조들의 신위에는 특별히 제사를 지내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동명성왕이라는 존재를 넣어줬던 것이다.

    그렇나 부분이 조선이 마치 고구려를 같은 민족의 나라로 인정했다는 낭설로 퍼진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던 14세기에는 민족주의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는 점을 이해하자.


    이미 실록에 그러한 취지를 잘 설명해놨다. 조선조 초기에 모든 제도가 정립되던 시기에 실제로 고구려는 빼자는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맥을 이해한다면 제사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일입니다.' 라는 문단으로부터 고구려를 넣냐 아니냐는 고구려에 대해서도 제사를 지내줄 것인가 아닌가를 논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허조의 논거는 고구려는 이 나라에 공 세운 것도 없고, 오늘날의 단어인 문명의 관점에서 전장과 문물이라는 것은 단지 신라의 제도를 증감한 것이니까 신라 시조에게만 제사를 지내고 고구려는 빼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관해서 세종이 말하기를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하지 말자고 단지 정치가스러운 포용을 말해서 고구려도 유지된 것이다.

    결론은 고구려에게도 제사를 지내 줄 것이라는 것이다.

    단지 이러한 조선 초기의 논의로부터 고구려는 이후의 왕들에게서는 관성적으로 제사가 지내졌던 것이다. 그 것은 한민족의 강역으로 해석한 것은 실상은 만주국과의 내선일체 논거인 친일파들의 완전한 왜곡이라는 것이다.



    이 것이 5세기 고구려 우위론의 증거라고 하는 중원고구려비이지만 정작 교를 내리는 주체는 신라왕과 고구려왕이 혼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의 내용은 신라왕과 고구려가 형제지교를 맺은 뒤에 그에 상응하는 조처들로써 신라 매금이 자신의 영토의 제중인들에게 교사를 내리고, 그러한 후속조처들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 것이 고구려의 척경비라고 우기는 것들은 아주 더러운 친일파새끼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형제지교의 증거로써 의복을 서로 내렸거나 혹은 신라쪽에서 내렸다.

    상식적으로 세세토록 형제토록 지낸다는 표현을 삼전도의 굴욕같은 상황에서 했겠냐고도 반문할 수 있다.

    게다가 정작 중국쪽의 기록에서 고구려와 신라는 수나라때 이전까지는 잘 지냈는데, 어느날 신라가 함경도의 고을들을 털어가면서부터 외교관계가 경색되었다고 고구려쪽에서 항변하였다.

    그러니까 중원고구려비가 세워질 때에는 고구려와 신라는 아주 우호적인 관계였다는 것이다.


    제발 유사사학들을 따르지 말고 증거만 보자고. 게다가 광개토와 장수왕에 대한 논거 역시도 매우 한정적인 부분만 부각한 것이다.
    고구려왕은 애초에 그다지 실권이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고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으니, 곧 한(漢) 낙랑군(樂浪郡)의 옛 땅으로서 장안(長安)의 동쪽 5천 1백 리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 백제(百濟)에 이르고 북쪽은 말갈(靺鞨)에 이른다. 동서가 3천 1백 리요 남북이 2천리이다. 그 관직에서 가장 높은 것을 대대로(大對盧)라 부르고 1품에 비견된다. 나라의 일을 총괄하여 주재하는데 3년에 한 차례씩 교체하는데, 만약 그 직위에 적합한 자면 연한의 제한에 거리끼지 않는다.

    교체하는 날에는 혹은 서로 공경하여 복종하지 않고, 모두 군대를 이끌고 서로를 공격하여 이기는 자가 대대로가 된다. 왕은 단지 궁문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제어하지 않는다. 

    문자명왕 이후에 고구려왕들이 실제로 5부가 내전을 하는 동안에 궐안에서 틀어박혀서 존버나 하고 있었다는 것은 왜 언급하지 않는가?

    고구려의 왕은 대대로 실권이 없는 종자지만 유독 광개토와 장수왕과 문자명왕 때에만 조금 권력을 행사하였을 뿐이다. 그것이 기승전결이나 전후관계를 모두 다루는 온당한 관점인 것이다.

    그러니까 고구려 강대국론은 완전히 허구이고, 실상은 고구려에서 애초에 왕의 지위는 제사장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애초에 제사를 지내던 집안을 뜻하던 것으로 간주된다.

    고구려의 그러한 제사형태에 대해서는 남조와 북조가 모두 기록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점들은 친일파들에게 특히 곡해될 동기가 있었다. 왜냐면 천황이라는 직책도 일본의 19세기에 이르러서 의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에도 막부가 등장하기 이전의 일본사에서 천황의 위치는 제사나 지내던 삼한의 천군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아시카가 쇼군은 천황을 무려 내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점괘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내쳐져서는 황가의 무속인 여자들이 몸 팔아서 연명하고, 시주나 받아서 연명하던 것을 도쿠가와 이에야쓰라는 놈이 데려서는 앉히고는 일본의 명목상의 국왕으로 허수아비를 앉힌 것이 본래의 천황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천황가로부터 기인하는 피라미드형 복종사회라는 모델자체가 실상은 메이지유신의 존왕양이를 외치던 쿠데타 세력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아시카가 쇼군과 천황의 관계는 마치 연개소문과 보장왕의 관계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되려 이러한 관계가 더 고구려사내에서 보편적이었다고까지 해석될 수 있다.

    요컨데, 고구려왕이 조선이나 고려조의 왕과 같은 전제적인 존재였냐는 것 자체가 의문점이다.

    여기에 대해서 중국의 사서는 고구려의 왕은 제사나 지내는 존재이고, 정권은 정작 일본의 쇼군과 마찬가지로 5부들이 쌈판을 벌여서는 이긴 놈이 대대로가 되는데, 대대로와 쇼군은 거의 비슷한 것이고, 이론상으로는 3년마다 재신임을 받아야 하지만 연개소문과 마찬가지로 한 번 쳐 먹은 놈이 딱히 갑자기 권력이 줄 리가 없으니까 실상 연령의 제한없이 종신대대로로 행사하였다는 것이다.
    아마 여기서 대대로의 교체가 있다는 것은 나라내에서 극적인 정치이벤트가 일어났다는 뜻일 것이다.


    이러한 일반론을 깔고 보면, 단지 광개토와 장수왕과 문자명왕만이 특이점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특이점이 있는 이전의 고구려왕들과과는 다른 실권을 가진 존재였던 것 자체가 어쩌면 신라 내금과의 제휴관계에 의한 것임을 중원고구려비는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작 고구려의 왕이라는 것은 5부의 실권자들이 대대로쟁탈전을 벌이면 존버나 치던 존재인데, 광개토에서 문자명왕까지만 왕권이랄 것을 가져봤다는 것이다.

    게다가 동명왕이라는 것은 고구려왕이 대대로 제사를 지내던 고구려적인 mythism의 산물이지 실제인물이라고 하기 어렵다.

    혹은 그 것은 아마도 극지방 제민들의 구전역사가 의외로 신빙성이 있다는 부분을 고려한다면, 고구려인들의 매우 오래된 초기 정착자들의 리더이던 실존인물일 수는 있다.


    자 여기서 북부여는 부리야트이고, 동부여는 예렌으로써 부리야트는 몽골인들 중에서 시베리아에 사는 자들을 일컫는 표현으로써 몽골로써도 이해될 수 있고, 예렌은 여전히 예이므로 고구려인은 예와 맥의 교집합내에서 탄생한 집단이다라고 한다면 고구려의 근본에 좀 더 다가설 수 있다.



    부리야트와 칼미크는 실상 서식지가 다른 몽골인들이 지칭되는 것이다.

    몽골인들이 후일에 중국에 정권을 세웠을 때에 여진족들을 우대해준 것조차도 실상은 그들을 몽골인의 동포인 부리야트계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여진족들의 언어는 퉁구스 계열로써 몽골과는 완전히 상이한 선남방계집단이다.



    이는 총 273개의 게놈을 생정보학(bioinformatics) 기술을 이용해 수퍼컴퓨터로 분석됐다. 결론적으로 ‘한국인은 수 만 년 동안 동남아시아에서 여러 차례 올라온 사람들의 자손들의 복잡한 혼혈’이라는 것이다.

    이번 연구는 수십년간 논쟁의 대상이었던, 까발리 스포자 박사의 중앙아시아 쪽에서 동쪽으로 대륙을 건너온 북방계와 남쪽에서 온 중국계 남방계가 혼합돼 한국인이 형성되었다는 설이 맞지 않음도 재증명했다.

    2017년 같은 연구진은 8000년전 신석기 동굴인(선남방계)과 현대의 베트남계 동남아인 (후남방계)을 융합했을 때 한국인이 가장 잘 표현됨을 밝혔었는데, 이번에는 추가로 4만년에서 수천 년 전의 동아시아와 동남아 고대인 게놈 데이터 115개를 분석하여, 선남방계(북아시아지역인)와 후남방계(남중국지역인)의 혼합이 수천 년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보였다.


    여기서 선남방계는 위의 그림에서 보이듯이 북경과 동북3성일대의 원주민들이고, 그들은 애초에 동쪽으로 대륙을 건너온 북방계가 아니라 신석기 동굴인들이다. 그 것은 퉁구스계의 여진인들과 한국인들의 교집합이 되는 지점인 것이다.
    그들에게 베트남계 동남아인들이 융합된 것으로 김해지역의 오랜 설화인 캄보디아계 부남왕조의 허황후로 대표되는 인구집단이 한국에 정착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정작 서쪽에서 동진해온 인구집단은 동돌궐인들이 내외몽골에 정착한 최소한 기원후 3세기 이후의 일인 것이다. 그러한 동진해온 인구집단으로부터 부민 카간이라는 놈이 카간이라는 칭호와 함께, 투크르라는 진영이름을 창출하였던 것이다.
    그 것은 582년의 일이기 때문에 애초에 고구려가 부리야트계 선조를 가졌다고 기록된 부분조차도 후대의 외삽과 곡해일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가 582년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고구려가 부여의 후속국가라는 것은 실상은 몽골인들 밑에서 사역하던 여진족들의 후대에 믿어진 관점인 것이다.
    요컨데, 고구려도 몽골리안이라고 끼워넣기 위해서 후대에 외삽된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대(제위 1260~1294)에서 연경의 종사하는 지배계급으로써 금나라계 여진족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에 부여를 붙여넣은 것은 실상은 최대 기원후 1260년 이후에 원에 종사하던 여진족 엘리트들로부터 참칭된 허구의 것이다.

    그들 여진계 원나라 엘리트들로써는 자신들의 조상들의 국가인 고구려가 어떻게 해서든 몽골로이드의 하나인 양 각색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 한민족이나 여진족들의 유적은 기원후에나 발생한 몽골인들의 팽창과는 전혀 상이한 연원을 보이며, 한민족과 여진족이 그렇게 근본없는 역사는 아니다. 한민족과 여진족들의 근본은 거의 동굴인의 수준까지 간다는 것이 위의 게놈해독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1979년 7월 26일에 사적 제267호로 지정되었다. 유적은 한강 아래쪽의 하안단구에 위치하며 강 건너에는 아차산성이 마주한다. 1925년의 대홍수로 유물 포함층이 드러나면서 널리 알려졌고, 이때 황산장삼랑(橫山將三郞)나 등전양책(藤田亮策) 등 일인학자들이 엄청난 양의 토기·석기를 채집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에도 여러 차례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1966년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조사단에 의해 정식 발굴되었다. 이 때에는 원형 움집 2기와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돌도끼[石斧], 그물추[漁網錘], 간돌화살촉[磨製石鏃] 등이 출토되었다. 1967년에는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각 대학박물관의 연합발굴이 있었으며 1971∼1975년 사이에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이 4차에 걸쳐 조사하여, 신석기시대 집자리가 취락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발굴된 면적은 전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암사동 유적은 방대하다.

    암사동 유적의 방사성탄소연대값은 많으나 6200∼3400 B.P. 사이에 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나며 5000 B.P. 정도가 중심연대로 보인다. 토기무늬의 변천을 이용한 시기구분을 보면 토기의 대부분이 입술·몸체·밑 부분을 구분하여 무늬를 베푼 구분계 전면시문형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신석기 전기의 늦은 무렵)에 속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탄소연대측정값과 형식분류의 관점이 대체로 잘 맞아들고 있어 암사동 유적의 연대는 한국의 신석기시대에서 전기 늦은 무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빗살무늬토기와 민토기 사이의 이른바 과도기형 토기의 존재가 거론되며, 이 같은 현상은 바로 이웃한 미사리 유적에서도 드러나고 있음에 비추어 사람들이 암사동에서 신석기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살았다고 볼 수 있겠다.


    현대의 암사동 유적은 사실 제대로 발굴되지도 않았다. 아니 발굴될 수가 없다. 현대의 서울이 멸망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애초에 발굴이 제대로 되지가 않아서 미처 비정할 수 없지만 암사동의 취락은 실상 오늘날 서울 동부지역의 거의 태반을 아우르면서 백제성들과도 연속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 연배는 기원전 6200~3400년 사이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위의 게놈정보학의 표본으로써 기원전 8000년경의 동굴인이 쓰여졌음을 고려하면 한민족이나 한민족과 가장 많은 교잡을 한 동북3성 지역의 동굴인들은 거의 자생적으로 기원전 6200년 경에 신석기로 이행하였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서쪽에서 이주해온 몽골로이드들이 한민족에 융합되었다는 관점 자체가 실상은 중세에 생겨난 관점이며 전혀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내에서 남북조의 시대 이후에 등장한 선비-투르크계 지배집단들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엉터리고 비정된 중국사를 바로 잡으면 기원후 550년 경에 중국의 초나라의 장왕이라는 놈으로부터 중국 문명은 시작되었고, 기존의 가설과는 다르게 황하유역의 하은주라는 것은 황하유역의 허난성에 자리잡았던 선비-투르계 집단의 역사에 대한 고의적이고 광오한 오류로부터 발생한 낭설이다.

    카이펑과 정저우 일대는 선비족이 난입하였던 3세기 경에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있지만 실상은 만성적인 기근으로써 사람이 살기 힘든 지역이었던 것이 특이점이 있는 연도로써는 기원후 605년에야 수양제라는 놈이 운하를 파서 강남의 식량자원을 이송하는 대공사 이후에나 대량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지역으로 탈모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수문제라는 놈은 그전까지 우문씨가 취하던 선비족화를 금하고, 한인들 중 성을 고친 자들도 모두 한성을 회복하게 하는 한편 모든 선비족들에게도 한성을 써서 민족간 구분이 사라지도록 안배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한족으로 코스프레한 선비족들만 추출하기가 어려워진 이유이다.

    그러나 실상은 선비족끼리만 통혼하면서 한족들과 차별되는 지배계급을 형성하였고, 후일에 중국역사학자인 천친커에 의해서 관롱집단으로 비정되었다.
    관롱집단은 실상은 이민족 지배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관롱집단들이 동돌궐을 통해서 외몽골의 선비족계 집단과도 연결되어 있었고, 징기스칸이라는 존재는 동아시아내에서 별안간 등장한 집단이 아니라 582년에 돌궐 혹은 투르크라는 이름으로 발호하였던 집단이 키르기스족과 고구려인들에 의해서 외몽골로 축출되었던 군사집단들이 재등장한 것이다.

    징기스칸이라는 놈은 그러한 동동궐계의 오랜 귀족집안으로써 선민사상에 근거하는 선비족계 귀족집단의 혈통이라는 하나로 실상 그의 애비가 날려먹었던 세력을 같은 선비족 귀족이라는 계급적 성분 하나에 의거해서 그와 같은 지배계급이던 쟈무카와 옹칸의 지지에 의해서 모조리 회복할 수 있었던 동돌궐계 귀족집단이었던 놈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징기스칸은 그의 세력회복을 도와줬던 쟈무카와 옹칸을 후일에는 모두 내치고, 스스로가 대칸이 되게 된다.

    이러한 놈들은 모조리 한민족이나 여진족들보다 역사가 짧은 놈들이므로 그들이 한민족에 영향을 줬다거나 한민족의 기원에 섞여들어가는 설정은 완전히 곡해된 외삽이다.
    이러한 동호계 새끼덜의 역사가 중국사에 등장하는 것은 무려 기원후 386년의 북위의 성립 때에나 나타난 것이다.

    반면에 한민족에 영향을 준 베트남계의 후남방계들은 기원전 610년경에 초장왕의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초로부터 오와 월이 분가했다고 후대에 선비족 매너리즘에 의해서 사상가로 둔갑한 엉터리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역사가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던 공자라는 인간에 의해서 당시의 역사가 춘추라는 공자가 쓴 당대의 사서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역사가 공자에 의하면 초로부터 오와 월이 분가하였다. 그런데, 월나라는 이후에 선비족들의 침략 때문에 공자때에 언급된 지역보다 더 아래지역인 오늘날의 베트남일대로 밀려나게 되었는데, 그들 베트남인들이 한국인들과 매칭된다는 것이다.

    공자의 사서조차 후대에 선비족들에 의해서 외삽된 것으로 보고, 제나라는 북제를 위조한의 본신이었다는 진晉나라와 위나라는 북위를 송나라는 후대의 송의 데자뷰이자 코스프레인 유사역사로 비정한다면, 남게 되는 것은 진秦밖에 없게 되고, 춘추오패라는 것은 실제로 5명일 이유가 있고, 공자가 언급한 것은 초장왕과 오합려, 오부차, 월구천, 진목공의 실제로 5명이었을 것이다. 나머지는 후대의 정세내에서 만들어진 외삽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은 중국의 사천성일대에서 퍼져온 이주집단으로써 진과 초는 실상 같은 민족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에 유방이라는 놈은 항우에게 그들의 조상의 무덤이 있는 사천성일대로 물러나게 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한제국의 멸망 이전까지는 이들인구집단이 중국내에서 패권을 잡고 있었고, 이들은 사천성에서 일부는 북진해서 진나라를 세웠고, 주류들은 장강을 따라서 동진해서 초나라와 월나라와 오나라를 세웠다. 그러한 그들의 동진과 왕조의 흥망성쇠를 바로 그들과 교역관계이던 산둥반도의 변방인이던 공자라는 놈이 기록했던 것이다.

    따라서 진나라계의 유방과 초나라계의 항우는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양해에 의해서 유방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의해서 한국으로 건너온 월나라계들은 고대에는 진나라인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윈난성계의 이주집단들이 진한제국이라는 것을 세웠기 때문이다.


    한국게놈.jpg


    이 것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영향을 준 위의 그림의 동심원들 중에서 두개에 남방쪽의 두개에 관한 설명이 가능하게 해준다.

    실상 중국문명은 버마쪽으로부터 문명의 요소를 받아들인 윈난성인들의 스촨성으로의 북진과 스촨성에서는 동진과 북진으로 나뉘어진 후남방계들의 진출에 의해서 초래되었고, 윈난성내에서 현대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황인이미지에 부합하는 시노티베탄계 황인과 메콩강상류의 타이족계가 모두 공존하고 있다.

    나는 그 것을 윈난성의 다리시의 바이족과 시솽반나의 다이족으로 표징되는 샘플로 간주하였다.

    요컨데 중국사의 개구라는 제갈량이라는 놈이 맹획을 계도하였다는 중세 선비족식 개구라이다.


    실제로는 맹획이라는 놈이 제갈량의 집단으로 표징되는 놈들에게 되려 이랬을 거라는 것이다.

    때는 기원전 600년 운남성, 

     

    맹획: 야 씨바라 중국버러지 으허 냄새 조깥네. 근디 여기는 돼지고기로 빚은 만두하나 없는가? 야 조밥, 수수떡(실제로 감질나게 알갱이가 작은 것을 존나게 뭉쳐서 꾸역꾸역 덩이가 된 것이다.) 이거 좃같은거 쳐 먹고 배가 부르냐?

    고정, 옹개, 제갈량의 무리덜: 저기요 ㅋㄷㅋㄷ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밥 좀 주세요 ㅋㄷㅋㄷ

     

    축융부인: 야 거지새끼덜이다. 야 어쩌냐?

    맹획: 야 삼겹살(원래는 콜레스테롤 쌓인다고 안 먹고 버리는 살) 좀 줘서 구워줘라. 미개인덜한테 꼭 제대로 구워서 먹는 법도 갈쳐주고, 이것들 기생충 있는거 그냥 먹고 우리부족에 병 옮긴다.

    축융: 응, 그럴께 ㅋㄷㅋㄷ

     

    고정, 옹개, 제갈량의 무리덜: 야 이거 존나 맛있네요. 으허 이게 뭐죠?

     

    축융: 응 이게 돼지라는 건데, 불라불라 상세히 설명해준다. 생략.

     

    맹획: 야 돼지새끼가 새끼를 존나게 잘 낳아서 말이다.(돼지는 본래 다산함) 새끼 10마리 쳤는데 너거도 2마리만 주까?

     

    고정, 옹개, 제갈량의 무리덜: 으허 감사합니다. 잘 키워서 번식시킬께요 ㅋㄷㅋㄷ 야 우리도 이제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다. 으허 만세다 으허 


    요컨데, 중국놈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주변민족들을 존나게 깔보는 경향이 있지만 정작 돼지나 닭이 버마로부터 흘러들어갔음을 오늘날에는 부인하기 힘든 형편이다.
    따라서 기원전 600년경에는 버마나 윈난성인들이 오늘날 중국대륙의 짱개들보다 더 발달된 문명을 가진 선진인이었을 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윈난성계 선진인들이 오늘날 장강하류와 주강유역까지 진출하였고, 한국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다시 말하지만 삼국지의 허구론과 더불어서 제갈량이 맹획을 문명으로 이끌었다는 프레임 자체가 완전한 허구라는 것이다.
    되려 진실을 찾자면 그와는 정반대로 맹획으로 표징되는 인구집단이 되려 제갈량과 고정, 옹개의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대륙에 살고 있던 미개한 인구집단들을 복속시키고, 초장왕의 초나라라는 매우 강력한 국가를 성립시켰다. 바로 그 지점을 공구라는 놈이 기록했던 것이다.


    그러한 그들이 한반도로도 이주해갔지만 정작 그들은 나중에 선비족들의 침략을 받아서 오늘날의 베트남으로 밀려났다. 바로 그 것인 베트남인과 한국인이 가지는 교집합의 정체이다.
    그리고, 오와 월 중에서 오나라 지역이라는 것은 오늘날에도 우어(오나라어) 사용지역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강과 산악과 정글과 바다로 둘러쌓인 방어하기에 대단히 용이한 지역이고, 오나라인들은 중국대륙 전체의 주인이 누가 되던간에 대애충 복속을 취하고, 그러한 삼각주 지역에서 고립적인 성향을 보이는 지역민들로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오늘날 오어 사용자들은 바로 난징이나 상해등을 포함하는 지역의 8~9천만 정도로 간주된다.


    440px-Wu_Dialects.png

    이게 오늘날의 우나라 사용지역이다. 바로 중국의 저장성일대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오나라인들은 예로부터 고립적인 성향을 보였기 때문에 윈난성계 이주집단 중에서 감숙성과 산시성지역으로 나아간 한반도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진출했던 진나라계들을 빼고 나면 천상 월나라인들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 월나라계들이 바다를 통해서 한반도로도 활발하게 진출하여서 고시베리아계 집단들과 교잡하였다. 그런데, 정작 후일에 월나라인들은 선비족에 의해서 오늘날의 베트남 지역으로 밀려났다. 그 것이 바로 베트남과 한국의 교집합인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그러한 월나라계들을 월인이라고 특정하기 보다는 진나라인들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것이 바로 경상도지역의 진나라인들의 실체이다.

    물론 이 것은 진시황의 불로초를 찾으려고 보냈다는 개소리와는 무관한 것으로 기원전 600년대 혹은 그 이전의 시기에 활발하게 이주하던 윈난성인들 이주집단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가 한국사라는 관점 이전에 애초에 퉁구스카들과 한민족의 유전학적인 경계는 고대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문명화의 속도차이에 의해서 양자가 구별되기 시작하였다.

    고조선어예맥어부여어고구려어동예어, 옥저어, 백제어신라어가야어 등이 고대 한반도 지역에서 사용되던 언어이며,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어와 연관이 있는 한편 상당수는 사료의 부족으로 그 형태를 가늠하기 힘들어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과거부터 구조와 음운의 유사성, 일부 어휘의 일치 등을 근거로 알타이 제어나 퉁구스어족와의 연관성이 제시되어 왔다. 마셜 엉거(Marshall Unger) 등의 저명 학자들은 일본어족 및 퉁구스어족과의 연관성을 추측하기도 하며, 마르티너 로베이츠 등 계속적으로 알타이어족 가설을 발전시키는 학자들도 다수 존재한다.

    크리스토퍼 벡위스(Christopher Beckwith) 등은 어휘나 고지명을 근거로 부여계 언어의 일본어족과의 연관성을 제시하며 현대 한국어족은 고구려어와는 연관없이 신라어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보빈은 일본어족설의 주요 자료인 고지명에 대해서, 고대에 한반도 남부에 일본계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분포해 있었던 근거로 논증하고 이를 반도 일본어(Peninsular Japonic)로 지칭하였다. 곧 한국어족 화자들이 만주 지역에서 한반도로 남하하면서 동화되어 사라져갔다는 것이다. 이는 지명과 사료 등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어 서구 학계에서는 유력한 학설로 떠올라있는 반면 논쟁도 있다.[6][7]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은 고구려어와 백제어의 어휘를 신라어 및 한국어와 비교분석하였고, 만주어 등 퉁구스어의 한국계 차용어를 근거로 일본계 언어가 한반도 북부 및 만주 지역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일본어족과 부여어족 간의 공통점을 대부분 단순 차용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부여계 언어 역시 한국어족에 속한다.[8]

    한편 알타이 제어가 아시아 지역에 확산되기 이전에 이미 성립하여 있던 여러 언어, 즉 고시베리아제어의 일종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김방한의 원시한반도어 가설에서는 한국어가 퉁구스어 등 알타이제어와 연관되어 있다고 가정하면서도 고대에 한반도에 비알타이적 기저 언어가 존재하여 이들 간의 혼용으로 고대 한국어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김방한과 유하 얀후넨 등은 또한 니브흐어 등 다른 고립어와의 연관 가능성도 추측하였다.


    한국어에 대해서는 요지랄인데, 나는 베트남어와 한국어의 유사성을 지목한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존칭으로 알고 있는 격칭들은 발음은 바뀌었지만 베트남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대세인 합니다는 경상도에는 캅니다다 원형이고, 캅안이나 꼬안등의 표현이 베트남어에 있다.

    어쩌면 이 것들은 문법자체가 여러언어들의 서술격들이 조합된 신라지역에 일어난 다문화의 결과물이다.

    요컨데, 캅니다가 합니다로 바뀌는 것에는 ㅎ- 발음을 빈번하게 해대는 퉁구스적인 tongue가 반영되었지만 캅-안은 베트남어로부터 그리고 니다는 일본어로부터 차용되었다.


    한국어는 발음은 선남방계식 발음체계이면서 베트남어식의 존칭격을 끝까지 유지시키려는 동기 혹은 근원기저에 일본어식 종결어미가 합쳐졌다.

    역사적으로는 포상팔국의 난으로 표현되는 대전쟁기간에 베트남계 월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경주와 김해, 부산등 동경상인들이 서경상인들을 군사적으로 복속시키고, 왜색이 강한 고성, 함안계 집단을 복속시키고 흡수하였다.


    여기에 따라서 임라일본부설이 정작 축소시킨 한국사는 정작 한국인들의 최초국가인 신라는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나던 기원후 209~212년에 이미 고대국가화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전성기를 6세기 이후로 보는 기성의 국사교과적인 관점들은 실상은 신라의 역사를 짧게 축소하려는 일본놈들의 수작질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즉, 기원후 209년, 즉 3세기초에 이미 신라와 신라의 영주세력이던 금관가야계 동경상인들은 서경상계 왜국들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국가화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이미 그때부터 열도로 진출하고 있었다.


    특히 선화공주가 의자왕의 친모라는 설을 따르게 되면 백제는 어느 순간에는 신라의 제후국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왜는 그러한 백제의 제후국으로써 왜나라의 격은 신라의 똘마니의 똘마니에 불과한 처지였다.

    다만 신라식 봉건제내에서 서유럽 봉건제와 마찬가지로 공작가의 봉신들인 백작들은 어디까지나 그 집안의 가신들이지 왕의 신하는 아니라는 것으로 왜가 신라의 직속신하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척되는 관점으로 게임 크루세이더 킹이라는 것을 해본 놈은 알지만 공작가와 백작가는 본가의 방계들이 대체로 차지하기 마련이었으므로 본가가 복속되어 있으면 방계들도 복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관점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왜의 왕가역시도 무왕과 의자왕의 친인척이 책봉되었던 것이다. 의자왕은 신라내에서 그가 신라왕녀인 선화공주로부터 이어지는 혈통을 통해서 신라왕이 될 명분을 찾았던 것으로써 lesser한 가문인 백제왕가 주제에 더 상위 타이틀을 혈통조작을 통해서 한큐에 먹으려고 한 해동증자였지만 끝내는 경주귀족들의 우리가 남이가 논거를 극복못해서 같은 항렬이던 김춘추가 신라왕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러한 구도를 살피게 된다면 실상 신라식 봉건제내에서 이미 백제는 아우러져 있었고, 백제왕이 신라왕의 타이틀을 요구할 수 잇을 정도로 이미 고대에 동족화가 진행되어 있었다. 그에 반하면 고구려는 조선조 중기까지도 이방인들의 국가에 불과했던 것이다.


    애초에 포상팔국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신라는 경상도내에서는 패권뿐 아니라 섬진강과 지리산일대와 그 동안에 대한 간접영유권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봉건제의 패러다임상 경주일대밖에 직할지배하지 못하는 신라왕의 한계상 굳이 그 일대까지 직접 영유하기보다는 정치적인 백제왕의 간접지배를 인정하는 한편 경제적으로 금관가야의 경제권내에 종속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한가지 레버리지는 금관가야지역의 김해의 대성동 일대에 사철이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과 소금을 전매하던 중국과도 거래할 수 있는 레버리지가 있었던 것이다.


    정치가 아닌 경제를 무시하는 기존의 관점과는 다르게 신라는 사철을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에 중국과의 제휴를 통해서 그리고 일본에 사철채취를 위한 식민지들을 두면서 번성하였다.

    일본의 사철을 이용한 야금술들은 모조리 가야와 신라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부산과 김해지역을 바탕으로 해상패권을 확립하였다. 그러한 한편으로는 일본내에서 리더쉽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몇몇 영주들은 백제왕의 휘하로 집어넣어서 열도인들의 divide and rule을 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지배는 진흥왕 때에나 겨우 전제화했다는 기존의 사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씹라 6세기에나 겨우 커서는 언제 열도까지 쳐 먹었단 말이냐.

    신라는 3세기 초반부터 큰 나라이고, 열도에 대한 지배는 아마도 세계사적인 일반적인 패러다임 교체기인 300년 정도의 시간동안 지배를 했을 것이라고 감히 마음대로 추측해본다.


    즉 포상팔국의 전쟁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전쟁이 가지는 의미상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립을 의미하는 고대사내에서 일대의 전쟁이었을 것이고, 이후에 신라주도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

    열도에 지배는 그러한 포상팔국의 전쟁내에서 왜계열의 영주들을 복속시키면서 부산과 김해를 통해서 열도로 진출함에 있어서 고성, 마산쪽의 해상집단의 견제를 일거에 해소한 이후에 발생함과 동시에 일본계 영주들을 복속시키면서 지정학적인 관심이 동시에 증가한 결과물이고, 그러한 패러다임은 포상풀국의 난의 시기인 209년부터 다이카개신이 일어난 622년까지의 시기로 확실하게 시기까지 비정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시대이다.


    즉, 한국문명은 209년에서 622년까지는 일본문명을 중국의 염철론 경제에 대응하기 위한 철산지의 식민지로써 이용하고 있었고, 특히 그러한 경상동부계 신라인들내에서 바로 남조의 월나라계들의 진출과 교잡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559년에 남조의 월나라계 왕조인 진패선의 진진이 멸망하면서 그간 한국인들이 카운터파트로 교역하던 초장왕으로 표징되는 버마-윈난성계의 중국인들과의 교역내에서 가지던 혜택들이 폐기됨에 따라서 622년에 왜에 대한 경제적 기득권도 상실한 것이다.


    그러한 역사는 모두 중세적인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선비족계 지배집단들의 통치기내에서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고, 단지 월나라인들이 한반도에 많이 넘어와서 살았다는 것만이 게놈으로 증명된 것이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분명히 어느 시점에서 일본이 신라의 제후국도 안 되는 떨거지였다는 관점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신라의 역사를 고의적으로 왜곡축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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