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원과 인류의 대결을 그리고 있지만 이 영화는 자연과 인간, 환경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유인원에 빗대어 철저하게 인간의 내면에 대한 비유와 탐구로 이뤄진 영화죠.
영화는 요즘 헐리웃 영화들에 흔해진 스토리상의 반전이나 연출상의 비틀기 같은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묵직하게 자기 갈 길을 갑니다. 어찌보면 예측이 가능한 평이한 내용이라 볼수도 있겠지만 그렇다해서 이 영화가 뻔하거나 재미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고전 희곡처럼 인물들의 섬세한 내면 심리 묘사를 통해 예정된 비극으로 치닫는 안타까움과 카타르시스를 관객들에게 충분히 잘 전달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신뢰, 평화와 공존에 대한 희망, 그것이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인공 시저는 유인원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인간과의 공존과 평화를 희망합니다. 동시에 유인원은 인류보다 더 우월할 것이라고, 동료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바가 상징하는 절대 치유될 수 없을 성질의 상처와 분노마저도 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죠. 그러나 서로간의 오해와 그로 인한 공포가 쌓이고 쌓여 전쟁이 벌어지고 코바에게 배신당해 모든 것을 잃고 나락에 떨어진 후에 변화하게 됩니다. 자기 종족, 동료들에 대해 가졌던 순진한 믿음조차도 인간에 대한 또다른 차별주의, 치기어린 우월감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그리고 힘을 통해 무리의 리더자리를 되찾은 후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오해와 분노가 쌓인 상황에서 평화와 공존에 대한 희망마저 놓게 되죠.
유인원이 인간보다 우월하다 생각했지만 이제보니 인간과 다를게 없다는 시저의 명대사와,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는 법칙을 깨고 코바를 유인원에서 추방, 배제하는 모습이 이러한 부분들을 드러내고 있죠. 특히나 코바의 마지막 장면은 단순히 악당의 최후라는 통쾌함만 느끼기에는 참으로 씁쓸한 여러 감정들이 들게 만듭니다. 시저가 강해진 동시에 처음의 신념을 내려놓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인간 말콤과의 우정과 신뢰 역시 이미 두 종족 간에 벌어진 생존전쟁 앞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무너진 인간들의 건물잔해에서 인간은 뒤편 어둠 속으로 사라져 퇴장하고 떠오르는 햇볕을 받으며 시저가 유인원 무리의 리더로 다시한번 거듭나는 마지막 장면은 눈이 부실만큼 아름답습니다.(영화의 원제가 Dawn of the Planet of the Apes, 유인원 행성의 새벽, 여명..이란 점은 딱 이 장면을 가리키는 거죠. 이게 어째서 '반격의 서막'으로 번역됐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만 이 영화 시리즈 자체가 국내 개봉명 정할때 뜬금없이 정하기로 유명한 시리즈니 넘어가기로 합시다.. 그치만 작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반격'이란 단어와는 너무 거리가 멀어요.. 진짜 무개념 번역인듯;)
이 장면에서 저는 상반된 두 감정이 북받쳐올라 눈물까지 흘리며 봤습니다. 시저가 순진한 믿음을 버리고 자기 무리를 위한 이기적이고 강인한 리더로 거듭나는 '영웅의 탄생' 장면인 동시에 평화와 공존, 신뢰를 꿈꿨던 순수한 이상주의자가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실패의 서사시'가 완성되는 장면이기 때문이죠. 신념과 이상이 무너진 것에 대한 씁쓸함과 영웅의 탄생에 대한 경탄이 동시에 느껴지는 서사시란 점에서 개인적으로 다크나이트의 엔딩장면도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것은 결국 앤디 서키스의 섬세한 시저 내면 연기 덕분입니다. 골룸, 킹콩 등등 굵직한 디지털 배역들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며 이 분야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앤디 서키스는 시저의 유인원 몸짓 뿐 아니라 섬세한 표정과 눈빛까지 표현해내며 카리스마를 뽐냅니다. 어느 영화제 주연상을 받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호연을 펼쳐줬습니다.
액션 장면은 규모나 물량으로 승부하기보다 분위기와 연출력으로 승부를 한 것 같습니다. 전쟁 장면에선 의도적으로 공포영화의 느낌을 많이 차용했습니다. 시종일관 유인원 시점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이야기가 인간 시점으로 바뀌는 몇 안되는 장면 중 하나죠.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인간들의 마지막 피난처로 몰려드는 이종족의 습격은 좀비물 등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구도를 빌렸습니다. 액션의 긴장과 공포의 긴장을 적절히 배합한 방식이죠. 그러면서 동시에 영화의 시점이 너무 유인원 쪽으로만 쏠리지 않게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도 하는 장면입니다. 코바가 이끄는 광기에 휩싸인 무시무시한 유인원 무리의 습격을 바라보며 여태까지 시저에 몰입해 유인원의 시각으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본능적으로 공포감을 느낄수 밖에 없습니다. 관객에게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만들어 버리죠.
인간이 몰고온 장갑차를 코바가 빼앗아 제어를 잃게 만드는 장면이 이 영화 액션씬의 백미입니다. 인간이 만든 강력한 병기이지만 광기와 증오의 소용돌이 속에 방향을 잃고 피아 구별없이 몰살을 하며 인간 피난처의 정문으로 돌진하는 장갑차를, 제어를 잃어 빙글빙글 회전하는 포대의 시점으로 찍어낸 이 장면은 정말 정교하고 소름돋는 연출이라 할 수 있죠.
사실 킬링타임용으로 가볍게 보기에는 부적절한 영화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묵직하고 웅장한 서사시, 풍성한 볼거리를 지닌 웰메이드 SF로서는 정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