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인들 중에서 아직도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머리없는 무뇌충일 뿐이다.
적어도 동북3성과 고구려가 만주에 대한 한국의 클레임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멍청한 생각은 집어치우기 바란다.
애초에 삼국사기 자체가 실제로는 조선 전기에 쓰여진 것이지만 말이다. 실상 삼국사기는 조선조 전기의 조선의 지정학적 이해를 담고 있단 말이다. 그런데, 이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되려 한국에 유리한 논거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없는 한국인들은 아직도 고구려에 emphasize하지만 말이다.
민족구분이 없던 어떤 고대국가가 있다. 그런데, 나중에 뭐 편하게 말해서 중세에 민족구분이 생겨버렸다. 후일에 그 고대국가의 고대민족으로부터의 후신을 자처하는 나라와 실상 중세에 새로 생긴 신생민족이 그 나라의 역사는 우리 것이다라고 했을 때에 당연히 후자가 더 중요하다.
전자의 입장으로 말해버리면 리비아나 스페인도 모두 로마 때에는 이탈리아 땅이었으니까 이탈리아가 쳐 먹어도 된다는 논거밖에는 되지 않는다.
문제는 애초에 이러한 프레임 자체가 일본놈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나보고 짱개라는 놈들이 있는데, 갸들은 문제가 뭔지 전혀 생각을 못하는 놈들이다. 실상 고구려영토에 대한 간접영유권은 조선초 초기의 이성계의 것이다. 이게 존나 중요하다.
여기서 일본놈들은 이조라고 하면 닥치고 까야되었으니까 실상은 이성계와 그 아들들이 가지고 있던 영유권 문제를 고대로 치환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것이 대한민국 출범 이후에 한국인들의 경제성장과 함께 불어닥친 낭만주의와 함께 고대사의 강대국이었다는 고대한국 강대국론이 실제로 믿겨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고대한국이 비교적 강대국이었다고 쳐도 그 것은 되려 신라일 뿐이다. 고구려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통일신라의 이두가 일본까지 건너갔고, 카타카나가 신라어의 구결을 적던 것으로부터 기인했는가 하면 아마도 신라대에 고구려의 함경도쪽 인간들은 고려조에 6성을 쌓으니까 통교 좀 하게 해달라고 징징거렸던 여진족마냥 고대에도 해당 지역 인간들은 신라의 쌀 좀 팔아달라고 밥구걸하던 오랑캐가 고구려로 간주된다.
그에 따르면 광개토라는 놈은 부족국가내에서 짐짓 교살당하기 쉬운 약관도 안 되는 나이에 추장직이 되어서 일치감치 신라에 사역하는 쪽을 택하였다.
광개토의 가야정복이라는 것은 실상은 신라왕의 말을 듣지 않는 내토세력의 토벌에 광개토라는 놈 또한 종군한 것이다. 그러한 행위를 댓가로 그는 신라로부터 신라의 친구라는 명성과 함께 그 혹은 그의 후신인 장수왕이 신라의 이사금과 서로 다른 문화권의 옷을 주고 받아서 정상회담에서 신라 이사금이 여진족 옷을 입고는 의전을 진행해주는 당시의 예법상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아마도 그러한 것과 함께 후일의 천리장성 일대에서 일어나는 교역에서도 최혜국 대우를 받았을 수 있다.
기존의 영토만 가지고 고구려가 최강국이라는 설은 업데이트가 안 된 옛날 야그이고, 실상은 오늘날의 북한과 마찬가지로 고구려는 신라의 쌀이 없으면 되는 것도 안 되는 나라일 뿐이다.
광개토 대왕릉비 역시도 친일학자들이 매우 이상하게 해석했지만 당시에 가야지역이 이미 신라 이사금의 영유권 내에 있던 지역이라는 전제를 깔고 해석하면 역시나 광개토는 되려 신라 이사금에게 용병짓을 한 것이 되게 된다.
이게 어떻게 고구려의 우세론으로 이어질 수 있냐고. 기존의 친일파 사가들은 겨우 의복을 내렸다(하사했다)는 대목을 가지고 고구려가 신라보다 더 우위였던 것이다라고 해석했다는게 말이 되냐고?
적어도 문장상 고구려와 신라는 말 그대로 형제처럼 친한 사이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지.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종주권을 확약할 수 있는 대목을 보려면 조선왕조실록에서 삼전도의 굴욕 당시의 기사를 보면 된다.
고구려비에서 고구려가 삼전도마냥 신라 이사금에게 삼전도마냥 굴종을 가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할 수 없다.
되려 이 것을 요즘식으로 번역한다면 20년 전이었으면 우파들이 지랄지랄했겠지만 요즘 같은 시대로 말한다면 평양에서 문재인이 공산당 의전복을 입어준 격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호관계를 과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복을 김정은이 내리자 문재인이 이걸 입고는 정은이 가오 좀 살려줬다는 거다.
뭐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한국의 상국이냐고? 택도 없는 소리지.
어쨌든 이러한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광개토는 당시에 고구려의 진짜 주적이던 모용씨와의 전쟁에 주력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어쩌면 신라로부터 병량도 지원받았을 수 있다. 적어도 병량까지는 아니더라도 고구려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통상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만 어찌되었건 국가전체의 식량안보에 기여하는 셈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당시의 국제정세를 복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용씨는 3세기경부터 중국부터 침략하였던 선비-투르크계의 침략집단의 지배성분이다.
그리고, 중국을 접수한 선비족들이 고구려와 신라 등 동이족들에게까지 침략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에 대해서 일반적인 종족적인 관점에서 신라와 고구려는 제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수와 당이 중국을 통일한 시점으로부터 선비족 supremacy에 의해서 이러한 정세들은 역사내에서 곡해되었을 수 있다. 심지어 김유신이 당나라 군대에 군량을 대러 갔다는 기록조차도 신빙성이 없는 것이다. 정작 구당서에서는 신라와 당은 애초에 수틀려있었고, 당이 백제지역을 영유하니까 신라가 고구려인들을 해당 지역으로 이주시켜서 분쟁이 발생했다고 되어 있다.
어쩌면 신라가 당에게 병량을 줬다는 기록은 돌궐 새끼덜이 세계를 발아래에 뒀다는 의도를 지닌 뻥카였을 것이다. 적어도 정작 측천무후라고 하는 돌궐족 큰 애미는 그들에게 불리한 논조를 지닌 모든 기록을 죄다 바꿔쓰도록 공식적으로 지시하였고, 심지어 그 것을 숨기기는 커녕 자신의 치적인 양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그러한 것이 중국 역사의 신빙성의 수준인 것이다.
뭐 비유를 하자면 이건희의 이씨들이 조선조때부터 거부였고 삼성공화국은 기원후 1400년경부터 된 오래된 한국의 역사이다. 요정도 수준의 개뻥구라를 친 것 따위가 중국식 사서의 뻥카라는 것이다.
그걸 겨우 사대주의 사관 내에서 기사들을 중국의 서책을 빌려서 옮겨적었다는 것이 소중화를 자처하던 조선조 역사의 수준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내에서 소위 독창적인 부분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그 것은 정작 위화도 회군에 대한 변명이자 한편으로는 당시의 건주여진에 대해서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던 이씨가문의 특수한 사정에 의해서 정작 고대사가 각색된 것이다.
그들은 다른 문제는 그냥 중국 것을 복붙했지만 고구려와 관련해서는 이성계가 가지고 있던 당시의 종주권을 부인할 수는 없었으니까 고대사문제로 이 것을 치환한 것이다.
심각하게 말해서 고구려의 국내성일대를 포함한 통구나 훈춘일대는 당시의 건주여진의 땅으로 사실 엄밀하게는 건주여진이 고구려의 확장영토가 아니라 본진일대내에서 고구려의 후속국가가 맞다.
그러나 당시에 건주여진은 정작 이성계의 똘마니에 불과했던 것이다.
쌍성총관부 탈환은 1356년(공민왕 5년)에 시작되었다. 1356년 음력 4월에서 음력 8월 사이에 추밀원부사였던 유인우(柳仁雨)는 동북병마사가 되어, 공민왕으로부터 쌍성총관부 탈환을 명령받고 대호군 공부보(貢夫甫), 종부령 김원봉(金元鳳),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 이인임 등과 함께 출정했다.
이때 조휘의 증손인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은 필사적으로 반격했으나 조휘의 친손자인 조돈(趙暾)과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가 내부에서 고려군과 내통하여 쌍성총관부의 성문을 열었다. 쌍성총관부는 함락되었고, 조소생은 도망갔다.
이후 유인우는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하여 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관할 지역[2]을 수복했다. 쌍성총관부 함락에 공을 세운 이자춘은 동북병마사가 되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었고, 쌍성총관부의 초대 총관이었던 조휘의 후손인 조돈도 조카인 총관 조소생을 몰아내고 쌍성총관부 함락에 적극 협력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조상의 배신을 청산하고 새로이 고려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조돈은 조선 건국에도 관여하여 개국 공신에까지 이르렀다. 이성계가 나중에 태종을 싫어하여 함흥으로 떠나버린 것도 그의 출신지가 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에 함경도 지역은 이씨들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비단 이성계가 함흥으로 떠난 것 외에도 임진왜란 때에도 왕인 선조는 중국으로 튈려고 했지만 왕자 둘은 함경도로 보내서 함경도 지역에서 이씨들이 가지고 있던 위세에 근간해서 군세를 결집시켜서 다시 한번 왕가의 세를 도모해볼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최후의 전쟁의 하나인 울산성 전투에서는 바로 그러한 함경도 군세가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따라서 함경도와 예로부터 교역을 하면서 압록강과 두만가의 수계를 공유하는 건주여진의 종속여부는 왕조의 핵심 안보 사안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조는 수차례 건주여진에 대해서 정벌을 단행하면서 그들의 충성심을 붙들어 두었다. 적어도 예종 때까지는 남이, 강순, 어유소 등이 조선조의 건주여진에 대한 명백한 종주권을 확립하는 정벌을 단행하고 있었다.
즉, 만약에 우리가 15세기로 타임머신을 타고 간다면 동북3성의 3분지 1이 조선왕의 영향력이 미치는 왕화가 미치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그 것은 기원후 400년의 광개토가 아니라 1467년의 남이의 전공이 가장 화려했을 때에 실제로 한국은 만주지역에 대해서 가장 확고한 영유권을 가졌던 것이다.
나는 한국역사를 축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온당한 부분과 부당한 부분을 바로잡고자 할 뿐이다. 만주에 대한 영유권 그 것은 일시적인 시대 내에서는 실제로 받아들여졌던 개념이다. 게다가 그 시기는 되려 광개토 때보다는 현대에 더 가까운 시기이다.
그러나, 물론 통사 전체로 봤을 때에는 고려조에는 되려 쌍성총관부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성 사가들이 고구려를 통해서 세우려는 이정표마냥 항구적인 한민족의 땅이라고 할 수는 없고, 금대나 원대에는 되려 여진족의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조선조 초기에는 한국이 되려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 것을 고대로 치환하는 것은 조선을 비하하기 위한 일제의 프레임이 들어있는 것이다.
적어도 전세계 여느 왕조들이 다 그렇지만 초대는 존나 영웅인데, 후대에 말기에는 개병신이 통치하는 것처럼 조선조 역시도 초대들은 엄청나게 영웅적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죄다 지리멸렬 된 것이다.
그 것조차도 부인해서야 온당한 관점이 아니란 것이다.
여기서 열자들이 가져야 할 관점들은 동양사는 객관적인 관점이라는 것은 일체 존재하지 않고, 정권의 하수인들이 존나 아전인수식으로 적었다는 부분을 파훼하면서 봐야지 진짜 각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조선조 중기부터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급격하게 상실한 것들을 그들은 오늘날 외교정책의 문서를 적듯이 적어서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 것은 이후부터 집권할 특정 정치세력의 치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왕조실록조차도 그닥 온당하게 팩트를 완전하게 다루지는 않았다는 거다.
조선조 예종 때만해도 남이와 강순, 어유소가 일진이 찐따 다루듯이 개패고 다니던 여진이 선조때에는 니탕개를 내세워서 거의 전면으로 조선조의 지배를 거부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실록의 기사들을 참조하자면 종종반정 이후에 집권한 특정 정치세력과 관련이 있다. 그게 누구인가? 바로 사림이다.
당시에 중종반정과 함께 새로운 집권세력을 표방했던 사림은 실상은 훈구보다 더 실용적이기 보다는 귀족적이던 인싸의 화이트 트래쉬같은 놈들이고, 그 놈들 밑에서 신분제는 강화되었고, 국방력은 약화되었다. 실상 그들 내에서 벌어진 계파싸움 때문에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에피소드에서 드러나듯이 군사쪽의 지도자는 커녕 외교쪽의 책임자 하나를 제대로 임명할 수 없어서 각 계파가 내세우는 외교관을 동시에 파견해서는 그 둘이 상반된 보고를 하는 그런 수준이었던 것이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임란 직전에 대한 일본에 대한 판단에서 상반된 주장을 한 그러한 고사라는게 전세계적으로도 드문 병크라고. 아니 애초에 외교수장을 둘을 동시에 보냈다? 이거자체가 말이 안 되는거지.
그게 뭐죠? 응, 사림.
여기서 지혜가 있는 놈은 이미 본질을 볼 수 있다.
그러하다. 실제로 건주여진에 대한 조선왕의 여진족 추장세력에 대한 종주권을 잃어버린 것은 실상 신라왕이 아니라 사림정권내에서 조선조 중기의 왕들이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사림 새끼덜은 이완용이나 박영효등의 친일파들도 사림이었고, 결과적으로 대한제국까지도 집권하였으며 또한 태반은 친일파가 되었다.
그러한, 친일파 사림계 집안이라고 하던 소싯적에 경기고 댕기던 사림집안이면 서울대 다 가던 시절의 이병도 같은 인서울 앙시앵레짐같은 새끼덜이 그들의 조상들이 면피하기 위해서 싸지른 것들의 논조들을 거의 그대로 현대 한국사로 확정지은 것이다.
건주여진에 대한 조선의 종주권은 사림초기에는 명백하게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보면 조선의 군세나 명으로 가는 사신일행이 당도하면 근처의 여진족들은 응당 나와서 맞이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삼위(三衛) : 명(明)나라가 남만주(南滿洲) 일대에 둔 세 위, 즉 건주 삼위(建州三衛). 그 호구(戶口)는 다 여진족(女眞族)이며, 그곳의 추장(酋長)을 지휘사(指揮使)로 삼았다. 당초 명 성조(明成祖) 때에 건주위를 설치하였고, 좌위(左衛)를 증치하였으며 영종(英宗) 때에 좌위를 갈라서 우위(右衛)를 증치하였다. 건주 야인은 조선과 국경을 접하여 처음에는 화친하다가 점점 변방에 침입하여 괴롭혔으므로 조선에서는 압록강 상류 남변에 사군(四郡)을, 두만강 남변에 육진(六鎭)을 설치하여 방비하였는데, 조선 세조(世祖) 때에 사군을 폐지하자 그곳에 들어와 폐단을 일으키므로 세조 13년(1467)에 크게 정벌한 일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정해 북정(丁亥北征)이다.
그리고, 위에서 보듯이 명과 조선의 여진에 대한 종주권은 명목과 실질이라고 해야 할 부분들이 성립한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그 것은 명황제에게 귀속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왕의 권력 내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사색당파 새끼덜은 어느 시점에 이러한 영향력을 완전히 실효하였다. 그리고 백두산 정계비는 건주여진에 대한 조선의 영향력이 청산된 시대 이후에 청이 건국되고, 그러한 공간사내에서 맺어진 그 이전의 시대와는 다른 외교 패러다임을 규정하는 외교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위의 실록의 링크로부터 조선전기에는 조선의 군관들이나 외교관이 여진족 구역내에서 통행권을 가지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백두산 정계비에서는 용금지지라고 해서 압록강 너머의 땅에 대해서 조선인들이나 관료나 군인이 통행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한 것이다.
그 것은 청의 위력행사로 볼 수도 있지만 access권리는 실상은 주권문제라고 보는 것이 맞다.
문제는 20세기 이후에 정작 현대적인 한국사를 쓴다고 하는 시도들이 친일파의 인서울 엘리트들에 의해서 자행되었는데, 그러한 것들의 산물 내에서 그들은 그들의 집안 사람들의 과오를 적시에 기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서울은 오늘날과 같은 메트로폴리탄이 아니라 인구 90만명의 인서울북촌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타당한 오늘날의 지방중소도시의 조금 더 커진 버전 정도에 불과하였고, 그 시대 기성세대의 한국엘리트집단이라는 것은 바로 그 북촌의 지역유지와 같은 오늘날의 지방중소도시 촌동네 유지들이나 별반 다를바가 없으면서 그 모두가 촌새끼덜 마냥 한통속이던 아주 좁아터진 바닥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종자들로부터 오늘날 적폐라고 불리는 통합당 계열의 정파가 탄생한 것이다. 그에 반해서 민주당은 이후에 훨씬 더 커진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노부스(=신이주민)인 여느 보통 사람들, 커머너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 노부스들 내에서 전라계가 꽤 있다는 것이 전라도와 민주당의 인연일 것이다.
하여간 오늘날 영천시나 예천시나 안동시나 상주시의 조금 더 큰 버전이던 인서울북촌 서울시의 엘리트 새끼덜은 자기들에게 불리한 부분은 싸그리 남탓을 해놨다. 그 결과 탓이 돌려진 것이 통일신라이다.
되려 사서를 참고하자면 금이나 요가 존재하던 시기에도 윤관의 9성이나 서희의 강동6주의 지정학을 고려하면 고려조와 요, 금의 영역은 어느 정도 교차하면서 다만 외교적 양해에 의해서 그 것은 공존하였다.
고려는 그러한 지역들이 니것, 내것으로 나뉘어지는 것을 회피하려고 금에게 사대하였다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대에 이르러서 청과 조선의 경계가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지는 상황자체가 조선의 열위를 반영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전까지 해당지역에서 존재하던 국경과 외교의 패러다임의 교체를 의미한다.
게다가 고려인들은 그러한 외교상의 문제를 완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서 바로 그러한 책임소재가 모호한 중간 지대에서 몽골의 사신이 주살되는 일이 한중관계가 모호하던 시기에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번은 고려조 중기에 저고여의 사신이 중간지대에서 주살당한 것이고, 한 번은 고려조 후기에 명사신이 피습당한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중간지대가 철폐되는 것은 중국쪽으로써는 조선에 대한 호혜적인 정책을 폐기하겠다는 뜻이 된다. 그 것이 바로 남한산성에서 개긴 댓가인 것이다.
그러나, 북한왕조와 같은 당시의 조선정부가 그러한 부분들을 일일이 민중들에게 전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러한 것과 더불어서 앞에서 기술했듯이, 서울권에서 자자손손 기득권을 유지하던 적폐들의 팔이 기운 서사의 문제가 있었다.
그러한 인서울의 명문가들이라는 것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해찬이 교육부 장관이 되고 나서 이루어진 청사진과 더불어서 지균과 농어촌전형을 통해서 교육기회의 균형이 추구되기 전까지는 죄다 그들이 쓸어먹는 체제였다.
사실 그 이후의 변화조차도 잘살아지면서 아사리 해외유학을 보내는 것이 편리해진 상황에서 정치적 양보를 이끌어낸 것 뿐이다.
본인의 기억으로는 2003학년도 수능까지는 서울지역 특목고들가 서울대 3000명정도의 정원 중에서 대원외고 하나가 100명, 200명씩 쓸어담고는 했었다.
당시의 교육기회라는 것은 1960년대나 70년대에 경기고, 경복고, 휘문고가 쓸어먹던 체제에서 본질을 바뀌지 않은채, 모양새만 바꿔나가던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요 지랄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기사를 보면 예비합격자라는 것을 통해서 비명문고들은 아예 대놓고 쳐 내었다. 당시에 부산권이나 경북권이 서울대 가던 것 또한 실상은 한국전쟁 덕택에 그들 적폐들이 해당 지역에 여전히 거주하고 있던 역사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 것이 소위 60년대 학번들의 강남-경상도의 의리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족벌로 본다면 그들 전부는 실상 조선조의 지린성의 압록강과 가까운 곳과 압록강 일대에 영유권 혹은 종주권이 상실되게 한 원흉인 정치세력들이었다. 그러한 그들이 신라를 까는 척 하면서 남탓을 한 것이다.
그리고, 정작 고려사를 보면 쌍성총관부라고는 하더라도 그 것 또한 고려조에 완전히 예속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되려 이성계의 조상이던 이안사는 충렬왕에게 명백하게 서열상 그가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법을 취해야만 하였다.
애초에 제국대장공주를 고려왕에게만 준 것 조차도 이미 당시에 여진과 한민족에서의 서열문제에 대해서 고려의 기득권을 쿠빌라이가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조내에서조차도 실상은 이사금이 고구려를 제어하고 있었던 셈이라고 해석한다면, 한민족이 여진인들을 부려온 것은 꽤나 역사가 깊은 것이다.
즉, 건주여진과 고구려는 실상 같은 정치적,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한민족과 지닌 동일지역의 주도집단에 의한 정치세력이고, 다만 차이는 고구려가 땅이 더 컸던 것 뿐이다.
그러나 정작 코어인 영토로 간다면 이거나 이거나 그게 그 말이란 말이다.
이렇게 부풀려놔봤자 어차피 핵심지역은 위의 jianzhou와 똑같은 것이다. 다만 이 때는 팽창을 많이 하였던 것 뿐이다.
위의 지도로부터 북부여와 동부여라는 것조차도 실상은 북부여는 Buryatia와 Yeren이고, 동부여는 Haixi나 혹은 해서 입장에서는 jianzhou를 동부여라고 했을 것이다.
이 중에서 Buryatia의 발음이 바로 부리야트라고 해서 부여와 거의 비슷한 발음을 가지고 있다.
혹은 뭐 부리야트는 북부여이고, Yeren이 동북여겠지. 요컨데, 고구려 알못 것들의 착각과는 다르게, 정작 5세기때나 15때나 만주지역의 정세는 그닥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정작 그 것에 가장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한 것은 그보다 좀 더 지나서 한국과도 나선정벌을 통해서 인연이 있는 러시아의 남하이다.
그리고, 예맥이라고 들어본 놈 있을 거다. 예는 Yeren이고, 맥은 Mongolia다. 존나 쉽지. 이게 헷갈릴 수는 없다.
그리고, 중원고구려비의 것을 형제의 관계라는 것을 주종관계로 해석하지 않는 이상 경제적 주도권은 어차피 고대에도 한반도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경상도 가보지도 않은 것들도 지랄지랄은 잘 하는데,
애초에 신라일대는 태화강과 형산강을 이으면서 농토를 개척해 나간 것으로 보이는 지역에서 성립한 곳이다. 그에 따라서 태화강과 형산일대를 동천이라는 것을 통해서 연결해놨다. 지도상으로 동천이 울산공항옆에 있는 것이 잘 보일 것이다.
어쩌면 동천은 자연하천이 아니라 인간이 관개를 위해서 파낸 하천일 수 있다. 완전히 인간의 노오력으로 변한이라고 불리는 일대를 싸그리 농토로 바꾼 것이다. 동천뿐 아니라 동천에 연결되는 지천들은 더욱 명백하게 그 지역의 취락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도상으로는 뚜렸하게 표시되어 있는 것과는 다르게 동천은 오늘날 수량이 지극히 적어진 문제가 있는 곳이다.
본인은 그 곳 지역에 산 적이 있는데, 본인이 기억하기로는 경주지역의 준설하천들의 수량문제는 해당지역의 지역농민지에나 지역신문에서 가끔씩 다루는 소재이다.'
즉, 오늘날 해당 지역은 건조화로 인해서 농업이 잘 되지 않는 문제를 겪고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태화강의 수량도 결코 많지 않아서 울산시민들의 식수는 모두 낙동강의 물금취수장으로부터 취수된다.
오늘날의 동천이라는 것이다. 이게 뭔 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민망하다. 그런데, 이 정도의 물줄기에 물을 대야 하는 농토는 무려 100킬로에 걸쳐서 뻗어있고, 게다가 수많은 지천들을 연결해놨다.
본인의 경험으로는 해당지역의 농민들은 그다지 부농이 아니며 때로는 빚을 지는 밑지는 농사를 짓고 있고, 특히 가뭄 문제가 심각하다. 게다가 쌀농사임에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를 보면 농사는 그다지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특히 쌀농사는 더욱 그러하다. 그에 비해서 경주지역은 쌀농사마저 잘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고대에는 신라지역이 매우 풍요로운 지역이었고, 무려 100만이 살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 것은 변한 전체에 100만이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당한 것이다. 정작 오늘날에도 경주인구는 25만명 밖에 안 되는 것과 비교하면 말이다.
어쩌면 변한지역이 오늘날에 이르러서 건조화를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지역의 수량은 고대에는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수량을 이용해서 애초에 운하를 파고, 수로를 연결했을 것이다.
수량이 줄어든다고 가정할 때에 그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어쩌면 뭐 해당지역의 단층활동따위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지만 뭐 가설에 불과하다.
혹은 그 것은 수량이 줄어들고는 있었지만 물에 대한 점유를 원하던 물길을 점유한 지천들을 장악한 토호들이 물길을 막고 흐르는 물을 가둬놓으면서 동천전체의 경제는 쇠퇴한 것이다.
이 것은 석계지라고 하는 동천에 연결된 지류의 윗동네인데, 위에는 이렇게 저수지를 쳐 만들어놓고,
딱 요만큼만 물이 흘러내려가게 쳐 만들어놨다.
참고로 본인은 부산에 살지만 경북인들이 물을 점유하려는 본능이 아주 씹 것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석계지라는 곳은 동천 상류의 특정마을 한곳만을 위한 것이다.
뭐 지도를 찾아보세요. 동천의 지천의 상류지역에 죄다 이 지랄을 해 놨다.
그래서, 신라는 망한거야. 소설 사하촌라는 것을 보면 소싯적 땡중 새끼덜도 상류에 저수지를 만들어서 물길을 막고는 저수지 아랫동네 사람들을 존나게 괴롭히면서 갑질을 하는데, 그 지랄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요컨데, 동천은 신라의 젖줄이지만 상류에 보를 쌓아놓고 물길을 막아놓은 이기적인 지배세력과 어쩌면 지리적인 요인에 의해서 수량이 박살나면서 농업생산도 급감하였을 것이고, 만약에 반대로 해당지역의 오랜 옛날에는 지금보다 농업이 더 잘 되었을 수도 있다.
요컨데, 신라때에는 변한에서 나오는 농업경제의 생산성만으로도 식량안보를 이용해서 고구려까지 제어했을 수 있다. 그러나 특정 시대부터는 급격하게 쇠퇴해서 경상도내에서도 낙동강 중심으로 중심지가 이전되었고, 한반도 전체에서도 한강 유역으로 중심지가 옮겨간 것이다.
요는 요 지도 하나만 가지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위에서 존만한 신라땅에서 생산하는 곡창들이 위의 고구려땅 전체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았다고. 고구려의 땅이 크게 표시되어봤자 태반은 북만주의 산악지대와 타이가숲지대일 뿐이다.
국내성에 사는 광개토가 신라야 쌀 많냐. 좀 주라. 말이랑 호피랑 좀 바꾸자 으허 요 지랄캤다면, 그게 강대국이냐고? 게다가 인구도 고구려가 가장 적었다는 것은 팩트이고.
어차피 고구려 블러핑은 뻥이 심하다는 거다.
각설하고 신라 이사금은 경제적으로는 되려 고구려를 종속시켰을 가능성이 높고, 그러한 외교는 조선전기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되려 줄어든 것은 고구려에서 건주위가 되면서 여진족들의 만주내에서의 통합능력이 줄어든 것이다. 명대에는 아예 요동성일대는 한족들에게 영유당해서 감히 찾아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곧 청대에 찾아오기는 하게 된다.
그러한 관점으로 볼 때에 여진은 신라때부터 조선조 중기까지는 한민족의 정권에 의해서 제어되어 있었지만 사림이 지배하던 시기의 어떤 시기에 그러한 지배력이 상실되었고, 후금대에는 곧 조선왕과 후금왕의 서열을 규정하는 종주권도 부인되었다.
즉, 북방에 대한 영토는 아니지만 영향력은 신라가 아니라 조선의 후세대들이 상실한 것이다.
물론 명나라가 오늘날까지 존재한다고 했을 때에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영토개념은 국제법상 정리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논거를 따르자면 적어도 명대의 판세가 유지되었다라고 한다면 적어도 한국이 중국에 대해서 그 것은 건주여진인들에게 투표를 하게 해서 결정하자고 할 명분이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후금과 청과 함께 동북3성에 대한 조선왕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시대만 알고 있어서 착각할 수 있지만 그 영향력이 건재하던 시기라면 멀리있는 장성보다 가까이 있는 병장말이 법인 것마냥 조선이 우리의 지배자라는 것을 인정받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것은 이제는 지나간 과거에 되었기에 타임머신 타고 가지 않는 이상 주장되기는 어려울 뿐이다.
이러한 메카니즘에 주목한다면 동북3성에 대한 한민족의 영향력을 완전히 거세시킨 것은 신라가 아니라 조선조 중기 이후의 사림새끼덜이라는 것이 된다.
그러한 프레임을 잡고 사료비판을 한다면 더욱 더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