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치기 린치 살인사건
1999년 12월 4일 토치기현에서 발각된 납치, 감금, 폭행, 공갈, 사체유기 사건. 피해자의 부모가 9회에 걸쳐 조사를 의뢰했지만 계속 거절한 토치기현경의 태도가 세간의 충격을 주었다. 오케가와 스토커 살인사건과 함께 일부국민의 경찰불신의 일환이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발각후, 토치기현경은 여론 및 재판소로부터 강하게 비판 받았다.
사건의 개요
토치기현경 경부보를 아버지로 둔 범인 A(당시 19세)는 어린 시절부터 폭력적인 행위가 눈에 띄었으며, 통신제 고등학교를 퇴학당한 뒤에는 폭주족에 들어가 공갈과 상해 등의 사건을 몇 번이고 일으켰다.
A는 어느날 사원B(당시 19세, 닛산자동차 토치기공장 근무)와 무직인 C(당시 19세)로부터 돈을 갈취하고 있었으나, B는 회사의 동기이자 조용한 성격의 S를 자신을 대신할 희생양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1999년 9월 29일, B는 S를 전화로 불러내고, A 일당은 S를 납치해 소비자금융을 통해 잔뜩 빚을 만들게 한 뒤 자신들의 유흥비로 사용한다.
S가 소비자금융으로부터 돈 빌리는 걸 거부당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S의 지인과 친구들로부터 돈을 빌리게 하면서 2개월 동안 S를 끌고 다닌다. 그 사이 S를 호텔 등에 감금해, 최고온도로 설정된 샤워기로 물을 뿌리며 ‘열탕 커머셜’, 살충제 스프레이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서 몸에 뿌리면서 ‘화염방사기’ 등의 린치를 포함해 S를 괴롭힌다. 이에 의해서 S의 피부는 불에 타고, 얼굴은 뭉그러졌다. 사체를 검시했던 단계에서는 피부의 8할이 화상을 입어서 ‘설령 교살되지 않았더라도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심각한 외상을 입었었다. 하지만 범인들은 그런 것에도 상관하지 않고 병원조차 한 번 데려가지 않고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은 채 방치, 화상을 입은 피부에 또 다시 90도 이상의 뜨거운 물을 부으면서 욕실로 끌고 가 열탕 샤워를 하는 등(이미 이 시점에서 열탕 커머셜’은 일상화), S가 저항하면 할수록 더욱 심한 린치를 계속했다.
S의 실종에 불안해하던 S의 부모는 토치기현경 이시바시경찰서에 조사를 의뢰했지만, 응대했던 담당경찰관은 “댁의 아들이 나쁜 게 아니냐?”, “친구들과 돈을 나눠서 이상한 짓하며 놀고 있는 거겠지”, “마약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경찰은 사건으로 성립이 안 되면 움직일 수 없어” 등 S의 부모를 무시한채 전혀 상대해주지 않았다.
이후 S의 부모는 이시바시경찰서 뿐만이 아니라 가해자가 체포될 때까지 우츠노미야히가시경찰서, 우츠노미야중앙경찰서, 쿠로바네경찰서, 토치기현경본부 등에 조사를 의뢰했지만 전부 거부당한다.
S가 근무했던 닛산자동차에서도 B의 증언을 토대로 “S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견해를 표시했다. 하지만 S는 결근도 하지 않는 성실한 사원이었으며, 사내에서의 S에 대한 평가도 좋았던 것을 생각하면 닛산자동차의 이런 대응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저널리스트인 쿠로키 아키오씨는 이것은 닛산에 의한 사건은폐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사태가 이지경에 이르자 S의 부모는 독자적으로 S가 감금, 폭행당한 사실을 밝혀내고 범인 그룹에 B와 C가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바시경찰서는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S로부터 부모에게 자주 돈을 요구하는 전화가 걸려오게 되고, 부모는 S의 안전을 위해서 계속 돈을 입금하게 된다. 그 돈을 찾기 위해 은행에 나타난 S의 모습이 은행의 방범비디오에 찍히게 되는데, 비디오에 찍힌 S의 외견은 머리는 대머리가 되어 있고 피부는 상처 투성이에, 화상과 흉터 투성이의 실종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은행 관계자는 “S의 뒤에 복수의 남자가 있었다. 언제라도 비디오를 증거로서 제출할 용의가 있으니 경찰과 상담해주세요.”라고 S의 부모에게 권유한다. 이에 S의 부모는 다시 이시바시경찰서를 방문해 비디오테이프를 증거품으로서 은행으로부터 가져올 것을 의뢰한다.
하지만, 이시바시경찰서의 경찰은 ‘법원의 허가 없이는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다시 한 번 부모를 무시한다. 이 때 S로부터 부모에게 휴대전화가 걸려왔다. S의 부모는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이해시켜보고자 “아버지 친구가 있으니까”라고 말하며 아버지의 친구인척하며 경찰관에게 휴대전화를 건냈다. 하지만 이때 경찰관은 “이시바시서의 경찰관이다!”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말아 전화가 끊어진다. 경찰관은 “아, 끊어졌다”라고 말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휴대전화를 부모에게 돌려줬다.
일부에서는 A일당은 이 전화를 통해서 경찰의 조사가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생각해 S의 살해를 결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다. 이 형사의 부주의한 발언이 S를 살해하는 계획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재판에서도 인정되었다. 살해의 이유로서는 그 외에도 너무 심하게 린치를 하다보니 S의 신체에 불가항력의 상처가 남았고, S가 살아남는다면 사건의 발각을 피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의해서이기도 했다.
1999년 12월 2일, 범행 도중에 가담했던 고교생 D(당시 16세)와 함께 A일당은 S를 목졸라 살해했다. 그리고 이치가이마치(市貝町)의 산림에 파뭍는다. 사체를 파뭍은 구멍에는 콩크리트를 흘려 넣고 그 위에 베니어합판, 슬래트 등을 덮는다. 이런 사체 유기에 필요한 도구들을 사는데 S의 마지막 급료가 사용되었다. 사체를 숨긴 후 A일당은 “15년 동안 도망치면 괜찮아(당시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이라고 말하고, 불꽃놀이대회에 놀러가기도 한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참지 못한 D가 12월 4일, 경시청미타경찰서에 자수하면서 사건이 발각된다. 경시청은 조속히 미타경찰서 내에 조사본부를 설치하고 D의 증언을 바탕으로 S의 유체를 발견. 다음날 경시청은 A, B, C를 체포한다.
한편 토치기현경은 2000년 7월, S의 부모의 요청을 계속 무시했던 경찰관들을 징계처분했지만, 가장 무거운 처벌이 “정직 14일”이었다. 오케가와 스토커 살인사건에서 징계면직 등의 처분이 이루어졌던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가벼운 처분으로서, 도마뱀 꼬리를 잘라내기에 불과하다고 비판 받았다.
형사판결
자수가 사건 해결의 계기가 된 것을 인정해 D는 정상이 참작되어 소년원에 송치되었다. A, B, C 모두 사건 당시 미성년자였지만, 도쿄가정재판소는 형사처분에 상응하도록 역송, 우츠노미야지방검찰청은 살인, 사체유기죄로 A를 기소했다. S의 유족은 강도살인죄로 기소할 것을 우츠노미야검찰조사회에 요청했지만 기각되었다.
2000년 6월 1일 우츠노미야지방재판소는 “범행은 계획적이며 흉악. 극도로 자기중심적인 정상참작의 여지가 전혀 없는”이라며 A, B에게 무기징역, C에게는 징역 5~10년을 판결했다.
A는 항소했지만 2001년 1월 29일 도쿄고등재판소는 항소를 기각, 그 후 상고심에서는 기한이 종료되어 A의 판결이 확정되었다. A는 재판중 린치할 당시 S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했냐는 질문에 “즐거웠다”라고 발언. 또 일시적으로 “사형을 각오하고 있다”고 발언했었지만, 그 후에는 “S군의 몫까지 오랫동안 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기분이다.”라고 발언했다.
민사판결
피해자 S의 부모는 토치기현경의 조사태만이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에 대해서 국가배상법에 기준해 토치기현과 가해자 및 그 양친에게 피해보상으로서 1억5천만엔을 요구하는 민사재판을 시작했다. 토치기현경은 일단 유족에게 조사미스를 인정하며 사죄했지만, 판결에 따르면 “S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던 때 “경찰이다!”라고 정체를 밝힌 적은 없고, S의 모친이 요란스럽게 했기 때문에 전화가 끊어졌다”, “S가 스스로 조사 요청을 철회하도록 연락해왔다”, “경찰의 대응은 적절했고, 당시 사건을 예견할 수 없었다” 등의 발언을 했다.
2006년 4월 12일 우츠노미야지방재판소는 “토치기현경의 조사태만과 살해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인정, 이시바시경찰서원의 진술을 “전혀 신용할 수 없다”며 각하했다. 범인이 폭행과 협박등으로 피해자를 포섭하는 것은 흔한 일로서, “적어도 범죄조사에 관계된 자라면 당연히 숙지하고 있었어야 했다”라고 토치기현경의 거짓과 태만을 강하게 비난, S의 유족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다. 조사와 살해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던 이 판결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판결이 피고보호자의 감시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에 의해서 S의 유족은 항소, 패소한 토치기현도 판결에 불복하며 항소했다. 토치기현이 항소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토치기현지사였던 후쿠다 토미카즈(후쿠다는 2008년에 재선에 성공해 현재도 현지사이지만 후쿠다가 현지사를 하는 동안 토치기현은 재정이 바닥까지 추락해 현예산의 잔고가 30억엔에 불과할 정도로 파산 직전 상태가 되어 있다)는 “경찰관의 증언의 신뢰성”이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며, 경찰관의 증언을 거짓말 취급하는 이런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7년 3월 29일 도쿄고등재판소는 “토치기현경의 태만이 없었어도 피해자가 구출되었을 가능성은 3할 정도”라고 판단해 토치기현에 배상액을 약 1100만엔으로 대폭 감액해 판결한다.(이에 대해서는 토치기현은 1억5천만엔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 판결은 토치기현경의 잘못을 감싸주는 한편 경찰의 태만이 없었어도 피해자를 구출할 가능성이 어째서 “3할 정도”인가하는 그 수치의 근거를 제시하지도 못했으며, 피해자에게도 5할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는 내용이었다. 피해자 가족은 승복하지 않고 상고했다. 재판은 현재도 진행중.
그 외의 팩트
S의 부모가 조사를 요청해서 경찰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데는 아마도 주범인 A의 부친이 당시 토치기현경 경부보(2000년 7월 사직)이었기 때문에 현경내의 불상사를 은폐하려는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설이 있다.
또한 저널리스트인 쿠로키 아키오는 “S와 B가 근무했던 닛산자동차가 사원의 불상사를 은폐하기 위해서 경찰관 출신의 사원(경찰관을 그만 두기 전에는 경찰서장급의 클래스였던 인물)을 통해 토치기현경에 사건을 은폐하도록 지시한 것이 아닌가”라는 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 이 사건을 통해 경찰관 1명이 담당하는 인구가 지나치게 많은 실태가 폭로되었으며, 토치기현경의 실태와 소년범죄에 관한 수속의 복잡함 등 경찰의 수사 환경이 문제점으로 부각되었다.
S 아버지는 아들이 닛산자동차에서 근무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항상 닛산 자동차를 타고 “우리 아들이 만든 차다”며 자랑하며 다녔지만, 사건 이후로는 도요타 자동차만을 사용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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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만화나 영화 시나리오가 아닌,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이라는 것이 충격적입니다.
더군다나 저런 일을 겪으면서도 현지사인 후쿠다가 재선에 성공했다는 게 더 우습네요. 지금 토치기현의 재정상태를 보면 더 웃기고.
도치기현경의 수준이 저런 걸 보면, 아시카가 사건의 실체도 어떤지 짐작이 갑니다.
막장으로 달리는 사건의 스케일은 역시 일본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인가...
참고로 아시카가 사건 당시의 수사책임자였던 M씨의 발언이 아주 걸작입니다.
사건발생당시의 조사를 진두지휘했던 전 토치기현경간부(75세)는
"조사는 적절했으며 정당했다. 다른 진범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번 재검정에 대해서는 "신용할 수 없다.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자료 그 자체가 열화되던가 사라지던가 했다"고 하며 의문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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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일어표기가 필터링에 걸리는 듯 하여 모두 삭제하였습니다(__)
양해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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