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정보 :
http://heartbrea.kr/bgmstorage/1272869 1976년 8월 18일 오전10시45분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유엔군 제3초소 앞에서 한국인 노무자 5명이 미루나무 가지를 치고 있었다.
현장에는 미군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의 장병들이 감독, 경비하고 있었는데
이때 북조선군 박철 대좌 및 장교 1명과 15명의 사병이 나타나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군 장교(Arthur Bonifas-경비중대장)는
관측소의 시야 확보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진행했다. 이에 박찰 대좌는 인근 초소에 있던 병력을 요청하여 잠시 후
트럭을 타고 온 몽둥이를 소지한 20여 명의 북한군을 대동하고 재차 작업중단을 요구했으나 아서대위가 거절하자 박철 대좌의 공격명령으로
몽둥이와 인부들이 지니고 있던 이 곡괭이와 도끼 등을 휘둘러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소대장인 마크 바레트(Mark Barrett) 중위가 이마에 중상을
입고 살해되었으며 나머지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미군 트럭 3대를 부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현장에서의 민간인 피해자는 없었음)
사건 직후 주한미군 사령관 리차드 스틸웰은 데프콘3를 발동하고 미군 방송을 통한 임시발표에서 휴가중이거나 부대를 떠나있는 전장병에게
즉시 부대복귀를 명령히는데 한국전쟁 이후 데프콘3가 발령되기는 처음이었다. 북측도 인민군과 예비군격인 로농적위대 및 붉은청년 근위대
등에 전시태세에 들어갈 것에 대한 명령을 하달함에 따라 한반도는 전쟁위기로 치닫게 된다.
미국의 포드 행정부는 긴급 참모회의를 열고 스틸웰의 제안에 따라 문제가 된 미루나무를 제거하기로 결정하는데,
이 작전은 미국의 전설적인 나무꾼의 이름을 따서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으로 명명되었고 1976년 8월21일 아침7시에
강력한 무력시위를 동반하여 전격 단행된다. 미국 본토에서는 핵탑재가 가능한 F111 전투기 20기가 날아왔고, 괌에서는 B-52 폭격기 3기,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서 발진한 F4 전투기 24기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였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7함대 소속 항모 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 중무장한 5척의 호위함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하여 북한 해역으로 이동하였다.
미국은 교전상황에 대비해 구체적인 전쟁계획인 일명 "우발계획" 까지 수립하여, 이 계획에 따르면 미루나무 절단 작업시에 교전상태가
발생할 경우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1차적으로 한국군 포병과 미군 포병이 북한지역 개성의 인민군 막사에 대한 포격과 개성 위쪽의
변두리까지 포격하여 초토화하고 인민군 포병부대를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쟁이 확대될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에 대한 탈환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북한의 전차부대가 남하할 경우 전술핵의 사용도 고려되었으니 그야말로 실질적인 전쟁계획이었던 것이었다.
당시 미군의 요청에 따라 한국군은 미루나무 절단시 돌아오지 않는 다리 입구 부근에서 1사단 수색대 요원들이 경계병으로 참여해 줄것을
요청받았으며 개인화기로 권총은 휴대할 수 있으나 북측이 재도발을 하기 이전까지의 보관은 미군이 휴대한다는 방침을 한미연합사로부터
전달받았다. 따라서 미루나무 절단작전의 수행시 만일 북한군이 재도발 해온다면 한국군과 미국군이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차후의 전쟁계획을 착수하겠다는 미국측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애초의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남과 동시에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대응과는 관계없이 응징보복을 계획하였으나 군사작전권은 미국측에
있으므로 단독적인 행동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측의 적극적인 대처방안을 기대하였으나 단지 미루나무만 절단하고 미루나무 절단시에
재차 도발할 경우에만 전쟁계획을 진행한다는 미국의 미온적이고 신사적인 대응방법에 불만을 품었다.
이에 북한에 자극을 가하고 도발을 유도하기 위한 그리하여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비밀리에 자신의 의지를 당시 노재현 합참의장과
유병현 합참작전본부장에게 전달하고 2명의 장군은 이러한 내용을 은밀하게 박희도 1공수여단장에게 거사자금 당시 50만원과 함께
지시하게 된다.
따라서 박희도 1공수여단장은 예하 64명의 정예 특전사 장병을 구성하게 하여 속칭 818 보복부대로 불리는 TASK Force 팀을 조직하게 되고
당시 특공대장으로 임명된 김종헌 소령은 팀원들에게 죽을 각오로 적지에 들어가자며 유서와 함께 손톱을 담을 수 있는 봉투를 팀원들에게
나누어 주게된다. 당시 64명의 팀원중 두 분은 이후 필자의 현역시절 한 분은 단장으로 만나게 되고 다른 한 분은 교관으로 만나게 된다.
당시 지시사항으로는 북한군 초소를 때려부시되 북한군 병사에게 육체적인 폭행은 가능하지만 절대 먼저 사격을 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북측의
사격이 있은 다음에는 차후 미국의 계획인 전쟁으로까지 유도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대응행동을 취하라는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미루나무 작전 당일에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경계병으로 참석대상이었던 한국군을 본 미군은 경악을 하게된다.
권총뿐만이 아니라 M-16 소총과 수류탄 그리고 심지어 크레모아들까지 휴대하고 나타난 것이다. 더구나 미루나무가 절단되기까지
북한측의 아무런 반응이 없자, 미군의 만류하는 통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군은 애초에 계획된 대로 북한의 재도발을 유도하기 위해
단독적으로 공동경비구역내의 북한군의 제 5, 6, 7, 8 초소로 몰려다니면서 차례로 부셔가며 무력을 과시하였으나 초소에서 폭행당하고
쫓긴채로 도망간 북한군 측에서 총기를 휴대하고 나타나서 보복해 줄 것을 하염없이 기다렸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철수하게 된다.
당시 북한군에는 도발하지도 말고 도발에 걸려들지도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고 하는데.... 때문에 더이상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고
북한은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하여 김일성의 유감성명을 전달한다. 북한의 유감표명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고 처음에 미국은
북한의 성명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다가 24시간만에 태도를 바꿔 이를 수락하고야 만다.
이후 북한군과 UN군은 판문점에서 판문점 공동경비를 분할 경비할 것에 합의하여 북한군이 통로로 사용하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지금까지도
통행이 차단된다. 당시 박정희의 의도대로 남한군의 도발유도계획에 따라 당시에 단 1발의 북측의 사격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사건이 일단락 된 뒤에도 북한은 18개월이나 준전시상태를 풀지 않았고, 한국도 그런 북한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등 사건의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 사건 당사자인 미국이 빠진상태에서 남한과 북한의 대결로 치닫게 되는데 북한은 언제라도 전쟁을 치를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고 모든 포병부대들의 휴전선 전진배치와 공군기지의 남쪽으로의 이전을 계획한다. 심지어는 1976년부터 2년 동안
대학 신입생을 뽑지 않고 이들을 모두 군대에 보내기도 했으니 북한측 역시도 사건 종결 이후에 고의적으로 증폭시킨 이같은 위기상황은
이후 77년 말까지 계속되는데 이는 북한 내부의 단속용으로 정치적인 의도로 활용되었다고도 한다.
한편 미루나무 절단 작전 종료시 한국군은 미군측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는데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인 스틸웰 역시도 박정희의 의도
였음을 알게 되었지만 대통령에게 항의를 할 수는 없고, 그러다보니 박희도 1공수 여단장을 엄중문책하고 강제예편을 주장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으로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는 않는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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