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은 정리해둔대로 정조편을 올립니다. 근대로 올수록 자료가 많아지는 반면 제 지식은 짧아
요약해서 쓰는 것이 쉽지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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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정조 : 영조가 탕평책을 내걸었지만 정작 소론은 영조대에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이에 비해 정조의 시대에 이르러 정계는 정조를 기준으로 완전하게 재개편됩니다.
1) 즉위과정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이기 전에 이미 "세자 스킵하고 세손한테 다이렉트로 물려줘야겠다"소리를 할 정도로 세손에 거는 기대가 컸습니다. 세손 역시 영조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성장을 보여줬습니다. 사도세자 살인을 주도한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외손자를 임금에 앉히는 꿈에 부풀었을 겁니다.
하지만 상황이 급변하는 것이, 세손 스스로가 외척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을 품었고, 외척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티를 내고 다닙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귀여운 외손자 손에 죽게 생긴 외척측은 필사적으로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는 술수를 펼쳤고 이런 술수가 실패하는 와중에 정조가 임금에 오르게 됩니다.
2) 외척숙청과 이카루스 홍국영
정조는 즉위 직후부터 외척을 쑤컹쑤컹 숙청하여, 영조말년을 주무르던 홍봉한(탕평당)과 김귀주(청명당) 양대산맥이 모두 퇴갤합니다. 이 과정을 함께한 것이 정조의 영혼의 동반자 홍국영입니다. 세손시절부터 정조의 오른팔을 자임해온 홍국영의 존재감은 실로 오른팔 이상이었고, 정조의 즉위와 동시에 온갖 요직을 모조리 겸임하면서 "세도재상(재상도 아니면서 재상의 세도force를 부린다는 뜻)"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내게 됩니다. 실로 홍국영이야말로 세도정치의 원조였죠.
홍국영이 권력에 취해 변질하고 몰락을 걷는 과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만감을 교차하게 합니다.
누이를 빈(원빈 홍씨)으로 삼은 것도 모자라 누이가 자식없이 죽자 정조의 재혼을 반대하면서 상계군을 죽은 누이(원빈 홍씨)의 양자로 삼습니다. 그러면서 상계군의 군호를 "완풍군"으로 고치는데, 이는 임금이 전주(=완산) 이씨이고 홍국영이 풍산 홍씨인 것에 착안해 완+풍君이라고 작명한 겁니다. 이게 어느 정도 추태인지 감이 잘 안 잡히신다면, 장차 대통령 직함을 대통령이라고 부르지말고 "명박"이라고 개칭해서 국가원수이자 행정부수반을 "명박"이라고 부르면서 임기가 끝나면 다음 "명박"을 뽑고 어린이들의 장래희망은 "명박"이 되도록하는, 그 따위 짓을 상상해보신다면 대충 임팩트가 비슷할 겁니다.
외척을 몰아내는데 힘을 합친 동료가 외척으로 변모하는 것을 지켜본 정조의 심정이 어땠을지..... 참 궁금한 부분입니다. 정조는 홍국영을 조용히 불러 실록에조차 나오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 홍국영은 곧바로 사직한 뒤 2년 후 요절합니다.
3) 통치술
인조반정으로 북인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숙종 대에 남인이 몰락, 영조 대에 소론이 몰락한 정치지형을 상속했습니다. 노론은 다시 친 정조파인 시파와 반 정조파인 벽파로 분화합니다. 아직 잔존하고 있던 남인과 소론이 시파에 합류했고, 벽파에 가입한 남인/소론도 있지만 이는 지극히 예외적인 현상입니다. 노론이 시파 벽파로 분열한 것이고 다만 남인/소론은 정조의 후원없이는 정계복귀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親정조派인 시파의 소수주주로 합류했다는 정도....로 정리하시면 되겠습니다.
정조는 영조말년을 어지럽힌 탕평당과 청명당을 초살시키고 즉위 후 3년만에 홍국영마저 내쫓았습니다. 왕권에 대한 도전을 일체 허락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숙종-영조와 일관되는 부분입니다.
영조의 탕평책이 영조 스스로 목호룡사건을 미화해야 하기 때문에 친 노론성향으로 흐르던 한계가 있던 반면,
정조의 탕평책은 소론/노론/남인을 모조리 아우르는 위용을 과시합니다. 남인 채제공은 남인인 탓에 정계에서 왕따를 당하면서도 정조의 전폭적 신임 덕에 정조의 대변인이라 할만한 활약을 펼칩니다. 다만 남인은 이미 자생력을 잃은지 오래라 채제공 사후 더 이상의 후계자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남인 중에 천주교신자가 많았는데 박해를 당한 것도 한몫 했습니다.
즉위 초반에는 영조가 죽은지 얼마 안 된 탓으로 사도세자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일관했으나, 정조12년 이후부터는 노골적으로 사도세자 신원회복을 꾀합니다. 우선 사도세자 무덤을 화성으로 천장합니다. 사도세자의 신원회복에 대해서 찬성하는 측이 시파, 이를 반대하는 측이 벽파가 됩니다.
이 시기에 무려 1만명이나 되는 영남의 유생들이 연명상소를 올립니다(이 파급력이란 가히 시청 앞 광장에 100만명이 모여 촛불집회를 하는 것에 비유할만합니다). 이게 바로 영남만인소입니다. 양란 이후 지방유생들이 소외되는 현상이 심화되었고, 특히 영남유생들이 심각하게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소외받던 영남유생들은 1만명이나 되는 역사상 전례없는 연명상소를 올리는데.............그 내용이 사도세자의 신원을 회복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신원회복을 통해서 소외받던 영남유생들이 중앙진출을 하겠다는 것이 이면에 숨겨진 의도입니다만 정조의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인 것만은 틀림 없습니다. 아..물론 그닥 효과를 보진 못했습니다. 촛불집회가 화력은 세지만 권력자들은 끄떡도 안 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4) 근대개혁군주?
정조는 흔히 근대개혁군주로 캐릭터가 세탁되는 것을 자주 보는데, 그건 환상일 뿐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정조는 철저한 주희 매니아여서 오히려 신하들이 주자학을 게을리해 나라가 엉망이 되었다는 푸념을 자주 합니다. 서학에 대해 정순대비보다는 관대한 태도를 취했지만 그것은 '네들이 주자학을 똑바로 안하니 이상한 놈들이 생기는 거 아니냐'는 식의 상황파악인 것. 정순대비가 서학을 독하게 잡은건 정조의 사전예방식 대응전략이 실패했고, 천주교도를 싸그리 잡아 죽이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패관문체를 두고서도 벼르고 벼르다가 집권말년에는 문체반정을 일으켜 반동으로 회귀. 혹자는 문체반정을 선조/숙종식 돌연변심으로 풀이하기도 하더군요. 홍국영을 은퇴시킨 전력으로 미루어 볼 때 개연성있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총애하는 김조순이 패관문학에 심취했다고 하자 크게 꾸짖고 반성문을 받기도 했고, 총애하는 정약용이 서학에 발을 담근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정약용의 반성문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조순/정약용에 대한 신임은 흔들림이 없었죠.
규장각을 설치해서 학문을 진흥하고, 신해통공을 통해 독점을 깨트려 상업발전을 촉진시키기도 했습니다. 왕안석에 대해 옹호한 적도 있는 것이 어느 정도는 개혁군주라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다만 근대계몽군주라고 할 수는 없죠).
하지만 정조 연간은 지구 한편에서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고 프랑스에서 혁명이 벌어진 시기입니다. 구미에서 있었던 일과 비교해 볼 때 정조의 조치들은 어떠했나..적절한 것이었나..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분명한 것은, 정조에 대한 과도한 환상은 진실을 가리는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죠.
5) 정순대비와의 관계
정조의 친모는 혜경궁 홍씨이고, 반면 정순대비는 영조가 늘그막에 들인 아내. 근데 정순대비 이 할머니가 형식적으로도 왕실 최고 어른일뿐더러 한 수 한 수를 신의 한수만을 놓는 만만찮은 인물이라...
청명당이 정순왕후를 구심점으로 하는 당파인데 위에서도 얘기했다시피 청명당은 정조즉위 직후에 청소 됐습니다.
그래서 정순대비는 개인적으로는 정조와 원수지간이 되는 겁니다.
정순대비는 여러 중요한 지점에서 정조와 대립각을 세우고, 정조 스스로도 노련하고 영악한 인물임에도 정순대비에 대해서는 주도권을 쥐지 못할 정도로 정순대비는 어려운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정순대비는 철저하게 명분론에 입각해서 최소한의 공격만을 했거든요.
반드시 이길 수 있는 베팅만을 하면서 정조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진짜 활약은 순조의 수렴청정을 맡을 때에 발휘합니다.
6) 독살설
독살설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다지 요절도 아니거든요.
게다가 말년에는 정조 본인이 반동정치를 실현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정조는 세종/영조와 더불어 동양권 군주 최종진화형이라 할만합니다.
그 스스로 이룩한 절묘한 정치적균형은 탁월한 정조의 정치감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후계자인 순조의 역량이 정조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 결국 왕조제도의 근본적인 한계점을 노출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