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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카페 회원이 카페에 한번 올리기도 했고 나무위키에도 올린 이사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입니다
내용 자체는 상당히 퀄리티 있고 참고문헌이나 출처등도 다 정확히 밝히고 있으니 읽어볼만한 글이네요
그리고 이글은 제가 네이버 역사카페에도 한번 올린글입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당시 여러가지 요인들로 인해 조선인들의 반중국인 감정은 점점 커져갔는데(동남아에서 화교들과 현지인들이 겪는 분쟁과 비슷한 상황을 당시 조선이 겪습니다)
이 사건은 크게 1927년에 화교 대상으로 벌어진 폭동(이땐 인명피해는 크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만보산 오보 사건이라는 여러 언론에서 낸 조선인 수백명이 중국인에게 살해당했다는식의 오보가 계기가 되어
1931년 화교를 대상으로한 폭동이 일어났고
평양 화교 학살 사건이 터지게됩니다
이사건으로 당시 조선에 살던 중국인 130명 정도가 살해됩니다
1931년 7월.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테러를 벌였다. 그 대상은 화교와 중국인 계절 노동자들이었다. 이걸 1931년 배화폭동(화교배척폭동, 배화사건, 화교배척사건, 반중국인 폭동)이라 한다. 많은 화교들이 폭행과 강간을 당했고 학살당하며 화교 임산부들은 배가 갈라져 죽어 있거나 유방이 잘린 경우도 많고 납작하게 찌부러진 시체 또한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무시무시한 곳이 평양이었다. 평양의 조선인들은 화교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어린이, 늙은이, 아기와 아기를 안은 애엄마까지 가리지않았다. 평양 군중들에게 걸리면 어떤 화교던지 학살을 당했다.
『7월 5일 밤. 그 밤은 진실로 무서운 밤이었었다. 역사로서 자랑삼는 평양에 기록이 있은 이래로 이런 참극은 처음이라 할 것이다. 미의 도, 평양은 완전히 피에 물들었었다. 하기는 우리가 인류사를 뒤져서 문야의 별이 없이 피다른 민족의 학살극을 얼마든지 집어낼 수가 있다. 그러나 유아와 부녀의 박살 시체가 시중에 산재한 일이 있었든가! 나는 그날 밤 발 밑에 질적어리는 피와 횡재한 시체를 뛰어 넘으며 민족의식의 오용을 곡하든 그 기억을 되푸리하여(내, 비록 늙어 망녕이 들려도 이 기억은 분명하리라!) 검열관의 가위를 될 수 있는 데까지 피하면서 거두절미의 회고록을 독자 앞에 공개한다.』
-오기영, 평양폭동사건회고
결국 오기영이 말한대로 "전율할 살인극"이 일어나고 말았다.
(7월3일 이후 평양)
「유방이 양쪽으로 잘려나가고, 임산부도 참혹하게 살육당했으며 심지어 땅바닥에 엎어져 우는 화교 또한 밟혀 피 떡이 되었다」
-「朝鮮避難華僑之一封血淚書」(1931. 7), 萬寶山事件及朝鮮排華慘案, 中國國民黨中央宣傳執行委員會, 南京, 1931, 56쪽,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4쪽에서 재인용
이런 살육이 일어난 곳은 한, 두곳이 아니다. 평양에서 수없이 벌어졌다.
죽은 어린애를 죽은 줄도 모르고 힘껏 붓안은 채 경찰서로 도망해 와서 비로소 내자의 시체되엇슴을 발견하는 모성...젖 빠는 어린애를 껴안은 채 부축되어 서로 와서 땅 바닥에 뉘이자 숨이 넘는 모성. 시내는 완전히 XXX상태다.
곳곳에서 살인은 공공연히 XX의 XXX에(!) 감행되엇다.
군중은 완전히 잔인한 통쾌에 취해버렷다. 3, 4명 내지 6, 7명식 피흐르는 곤봉을 든 장정을 앞세우고 2, 3백명식 무리를 지어 피에 주린 이리떼처럼 마자 죽을 사람을 찾아서 헤맨다.
「여기 잇다!」한 마듸의 웨침이 떠러지면 발견된 중국인은 10분이 못 지나서 살려달라고 두 손을 합장한 채 시체가 되어버린다.
-늙은이의 시체의 안면에 구더버린 공포의 빛! 고사리같은 두 주먹을 엡브장스럽게 쥐인채 두 눈을 말둥말뭉 뜨고 땅바닥에 엎어저 잇든 영아의 시체!
날이 밝앗다. 간밤의 무참은 숨김 없이 드러낫다. 길 우에는 부서진 상품과 가구가 산적하야 보행좇아 곤란하고 전선에는 찌저진 포목류가 걸려서 새벽 바람에 건들거리고 잇다. 폐허다! 문허진 로마성인들 여기서 더하엿으랴. 곳곳에서 중국인 시체는 발견되엇다. 서성리 조성암(중국인)의 집에서는 일시에 10개의 시체를 발견하엿다. 피살된 자, 적어도 백을 넘으리라는 나의 예상은 드러맞고야 말앗다.
아침부터 경관은 무장을 하엿다. 중대가 출동하고 인근에서 응원경관대가 오고-그런 중에서도 백주에 다시 재습 삼습-XX의 XX로 피난 장소에 가든 중국인이 중도에서도 타살되고 목숨이 귀하야 8, 9명이 한 곳에 숨엇다가 몰사를 하는 등. 재습, 삼습에서 공책 한 권이라도 그대로 내버려진 놈이 잇으면 마자 찢어버렷다. 잉크병 한 개라도 거저 내버리기 아까웟는지 쓰레기통에다 맛장구를 처서 죄 없는 쓰레기통이 붉고, 푸른 땀을 흘리고 섯다
-오기영, 평양폭동사건회고, 재만동포문제 특집, 동광 제25호, 1931.9.4(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두껍게 싸힌 포목들아대서 중국인의 시체(뒤에 소생하엿다 한다) 하나가 발견되여, 구루마에 실리워 경찰서로 갓다.
이 관앞 상관가를 떠나서 나는 중국인 료리점가를 가보려 대동문 거리로 빼처서 나왓다.
대동문 아페서 강안통으로 우 춘관아페까지 가보매, 우 춘관도 모도 문이 부서저 나가고, 텅 뷔인 집에는 전등만 밝아잇지 인귀척은 업스며 그 조금 아페는 중국노동자의 시체(인력거꾼인듯)하나이 지키는 사람도 업시 구경꾼도 업시 행길에 누워잇섯서, 나를 소스러치게 하엿다.
몃 집 더 올라가서, 장춘관 건너편에 구경꾼 4, 5인이 들러서 잇기에 갓가히 가보며 중국인 시체둘이 덧두기어 잇섯다. 홍승루도 모도 문이 부서지고 그 집 아페도 시체가 잇섯다(고 귀억된다)
대동자동차부 앞에는 허리가 기억자로 뒤로 부러진 중국인이 아직 채 죽지는 안코 단말마의 신음을 발하고 잇고, 그 겻헤 다른 중국인 시체가 하나 잇고, 순사가 이 시체를 차고로 끌어 드리라는등 실타는등 다투고 잇섯다. 그러나 여기는 폭행군이 벌서 다녀간 뒤라, 비교적 조용하엿다.
료정가를 다 보고, 다시 아까의 관앞으로 돌아가 보려고 신창리 네거리까지 가매, 저편 보이는 관아페서는, 산악이 무너지는듯한 수만명의 함성이 울리기 시작하엿다. 그래서 그리로 띄여 갈 때에, 관앞에서 흐느적거리는 사람의 물껼이 이리로 밀려오기 시작하엿다. 그와 동시에, 기마순사의 모양이 비로소 여기저기서 번드기엇다. 군중은 긔마경관에게 몰리워서, 이리로 밀려 오는 것이엇다.
오늘밤의 돌발사건에 대하여, 인제야 경찰당국의 방침이 작정되여, 무장경관으로 하여금 이 군중을 해산시키는 것이엇다.
금만 흥분된 일이 잇서도 잠을 못이루는 나는, 이날 밤 가족들은 모도 피곤하여 잘 때도, 잠을 들지를 못하엿다가 새벽 다섯시쯤 후보가 궁금하여 다시 집을 빠저 나왓다.
백일하에 폭로된 참경!
범수머리에서부터 관앞까지 경관과 소방대로 철통같이 에워싸고, 통행을 금지한 이 평양의 간선도로는 무릅까지 빠질만치 각색의 비단포목으로 무치엇고, 전차 전등, 전화, 전동력의 각 전선에 역시 각색의 비단이 느리워 잇서서, 그것은 마치 때아닌 만함식이엇다. 거기를 여기저기 무장한 경관이 지키고 잇고, 소방수들은 도로에 덥힌 필육을 것노라고 야단들 하엿다. 구경꾼들이 벌서 경관망의 박게는 백 둘러서 잇다. 잠시간 이것을 구경꾼들 뒤에서 보다가, 나는 구경꾼들 틈을 헤치고, 그 아페 잇는 경관망까지 헤치고, 폭풍우 지난 현장에 발을 드려놓앗다. 경관은 나를 신문기자나 검사국원으로라도 보앗는지 아모말 업시 통과시켜 주엇다.
거기 들어선 나는 어마어마한 경관들의 시선을 등에 받으면서, 어젯밤, 그야말로 근본적으로 파괴당한 중국인상점들을 집마다 들여다보면서, 세계 개벽이래 인류가 아직 듯도 보도 못한 「비단보도」의 길을 더듬엇다.
삿젼골 압흘 지나다가, 나는 삿전골 어떤 집 아페 서 잇는 무장경관의 표정이 심상치 안흔 것을 보고, 거리를 버서나서 그 골목으로 들어갓다. 그러고 서슴지 안코 경관이 지키고 잇는 집 대문으로 쑥 들어섯다. 들어서매 나의 지인인 몃 몃 신문긔자도 벌서 그 집에 들어와 잇섯다.
그 집 툇마루에 중국녀인의 시체가 하나 업드려 잇섯다. 광에 중국인들이 업드려 잇섯다. 역시 시체인줄 알고 가까히 가보매, 약간 호흡이 잇는 것이 아직 체 죽지는 안헛스며, (지금까지도 이 점은 알아보지 못하엿지만) 그 체격으로 보아서 17, 8세의 소년인 듯 시펏다. 그러고 그겻헤는-나는 그것이 영아시인지 혹은 셀로이드인형인지를 지금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영아라면 생후 3, 4개월 박게는 안되엿슬 것이다. 그것이 분홍빛이 도는 점으로 보아서는 혹은 인형인 듯 싶기도 하지만, 벍어벗은 그 물체의 국부(그것은 게집에엇다)까지 똑똑이 조각된 점으로 보아서는 인형으로 볼 수가 업섯다. 나는 잠시 허리를 굽으리고 그것을 굽어보앗다. 무엇인지 정체를 밝혀보려는 호기심으로, 손까락으로 만저보고도 시펏지만, 만약 그것이 영아시이면, 이 후에 손가락에 감할 불쾌한 추억 때문에 만저 보지도 못하고 그냥 굽어보고만 잇섯다.
「쉬야. 쉬야」
문득 뒤에서 들리는, 겁먹은 이 소리. 돌아보니 웬 조선노인이- 아니 조선옷을 입은 중국노인이 빈사의 소년들을 부르는 것이엇다. 이 노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그것은 소설가인 나에게 잇서서는 무엇에 비길 수 없는 커다란 수획이엇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경악도 아니엇다. 비애도 아니엇다. 겁먹은 얼굴도 아니엇다. 그것은 단지 무표정한 얼굴이엇다. 그의 입이 들먹거리지 않고 그의 입에서 음성만 나오지 안흐면 그것은 명공이 깍가노흔 한 개의 사인상이랄 수박게 업는 무표정한 긔게적 얼굴이엇다. 나는, 잠시 그 노인의 얼굴을 보노라고 다른 데 주의치 못하다가, 노인의 아페서 무엇이 음적거리는 것이 걸핏 보이므로 그리로 눈을 떠러트럿다.
거기는 너덧살쯤 난 중국 어린애가 하나 잇섯다. 노인의 다리를 두 팔로 잔뜩 부둥켜 안고 잇는 그 어린애의 한편 귀와 그 근처의 가죽은 찢어저 느러지고, 그 편쪽 눈도 업서젓스며 입도 찌저진 정시치 못할 참혹한 형상이엇다. 어린애는 울지도 안코 아버지인지 한아버지 인지의 다리를 부둥켜 안코 몸만 와들와들 떨고잇섯다.
나는 창황히 그 집을 뒤로 하엿다. 더 볼 용긔가 업섯다.
-김동인, 류서광풍에 춤추는 대동강의 악몽, - 삼년전조중인사변의 회고, 개벽 신간 제2호, 1934.12.1(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끔찍하네요...
이 사건이 일본의 사주로 일어났다는 설도 있는데 역사학계에선 가설중 하나로 보고 있고 그런 주장에 대한 반박과 비판도 많다네요
https://cafe.naver.com/booheong/145460
그러나 이 주장은 현재 학계에서 비판을 받고있다.
예로 일본군부가 직접 개입했다는 가설에 반박이 있다. 예로 이사하라 간지를 중심으로 관동군 참모부군에서는 '만몽영유계획' 골격을 이미 1931년 6월에 갖춘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만보산 충돌 음모 → 만주사변 이라는 음모가설은 인과관계에 대한 정합성이 부족한 비약이란 지적이다.
(손승회, 근대 한중관계사의 새로운 시각 모색- 萬寶山事件 연구에 대한 적용 가능성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202, 2009.6, 401)
그 밖의 사건의 원인을 음모론으로 보는 것에도 비판이나 반대의견들이 있다.
화교배격사건의 원인을 일단 한국인의 화교배척감정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민족성 문제는 한중 사이를 이간질 시키려는 일본이 만들어 놓은것이고,이는 과거 개화파 지식인들이 만들어온 중국인 멸시관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이 민족성 문제가 화교배격사건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수 있겠으나,직접적인 관련은 없기 때문
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3쪽
이러한 일본의 책동설은 당시에도 제기되었다. 물론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그 자체로 연구 대상이지만 그것이 다 사실에 들어맞는 건 아니다 사건 하나하나가 일본의 대륙 정책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각각이 각본처럼 연결된 것인지는 의문이다 최근에는 책동설의 근거가 부족하고 만보산 사건에서 만주사변 에 이르는 연쇄의 인과관계가 확실하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40
일본의 책임은 확인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일본의 ‘사주’ 혹은 ‘음모’를 사건의 주된 요인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일본인이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여 항일연대를 파괴하기 위해 만보산사건을 조작했다고 하거나, 오보를 양산하고 식민지조선인을 사주하여 눈엣가시인 화교를 축출하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의도된 행동으로서 배화폭동을 야기했다고 할 수 있을까? 설사 그렇다고 더라도 1931년 조선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화교학살 폭동에 대해 한국인이 마땅히 지녀야할 역사적 책임감과 그에 따른 엄중한 반성의 당위성까지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63)
오히려 지구사로 따지면 이것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사태였다. 딱히 '제국의 인위적인 음모'라고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1927년의 배화폭동을 계기로 인적 교류에 대한 규제가 점차 강화되면서, 특히 중국노동자에 대한 단속문제가 한중관계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미 일본에서는 조선에 한 발 앞서, 중국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와의 경쟁, 관동대지진 때의 중국인 학살이 발생했다. 이 과정은 넒은 의미에서 19세기 말 미국의 중국인 노동자학살과 1903년의 중국인 노동자 입국금지령의 전개와 흡사하다. 즉, 공업화 정도에 따라 해외노동력이 유입될, 그리고 그를 흡수할 수요가 발생하기까지의 시간이 틀리기 때문에, 시차를 두면서 유사한 현상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 시기가 미국의 경우 19세기 중․후반 이었다면, 일본은 제1차 대전 호황기의 1910년대로 볼 수 있다. 외국노동자가 자국사회에 충격을 줄만한 규모로 유입되면, 이 인력을 필요로 하는 자본의 논리와는 별도로 사회갈등 이 발생하게 된다. 조선의 경우 그 시기는 1930년대였지만 이미 1920년대부터 단초가 나타나고 있었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2
이런 사건은 이미 관동대지진 때도 일어났고, 그 이전에 미국에서 일어났으며 한국도 유사한 현상이 반복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오히려 음모론으로만 보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김준현은 『‘만보산 사태’를 획책한 배후로 일본을 지목한 상태에서는, 다른 갈등주체들의 능동성을 소거해버릴 위험성도 내재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준현, 한국의 문학/지식 장에서 ‘만보산 사건’이 기억되어 온 몇 가지 방식, 한국문학연구 51, 2016.8, 57)
설령 일본의 사주가 주요원인이였다고 해도 당시 반중국인 감정이 없었으면 저런 규모의 폭동은 일어나기 힘들었겠죠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의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려주는 역사적 사건인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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