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검술의 달인 '요여문"
임진왜란, 전쟁이 발발하고 조선편에 귀순하여 맹렬히 싸운 자들이 있음. 그들을 바로 "항왜" 라 함.
그 중 '요여문' 이란 자가 귀순하는데, 장수 계급에다 검술의 달인이었으며 진법의 달인이었다고 함.
일본 학자중에서도 임진왜란 항왜에 주목하여 연구하는 경우도 있는데 보통 그 자체에 관심이 잇다기 보다는
일본에서 실전된 고류 검술이 혹 한국에서 검보나, 자료가 발견될까 싶어서 주목하는 거라고...
일본 3대 고류 검술 중 2개는 모두 실전되고 유일하게 지금까지 형태가 남은것은 카토리 신토류 하나뿐임.
대표적으로 김충선, 김성인, 요질기(要叱其), 염지(念之), 사고여무(沙古汝武), 첨지(僉知), 평구로(平仇老), 산여문(山如文), 노고
여여문, 기오질기, 오카모토 에치고(岡本越後), 마고토키로(孫時老), 노부토키로(延時老)등이 있음.
이중에서는 김충선(사야가)이 가장 유명하나 왜란 당시 왜군에서는 네임드가 아니었음.
나머지 항왜들도 일본군중 최하급 병종인 아시가루(농민병) 출신으로 추정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던 손문욱 정도가 사무라이일것으로 추정.
항왜중 네임드는 두명으로 이글의 주인공인 '요여문' 과 '오카모토 에치고' 라 할수 있음. 둘다 당시 일본군에서 유명하고
장군 계급이었기 때문.
하지만 그들의 원래 일본 이름을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움. 조선왕조실록은 일본인의 이름을 한국음역으로 풀어서
적어놓곤 했는데 예를 들어 '시마즈 요시히로'를 왕조실록에서는 심안돈오(沈安頓吾)라고 적고 있는데, 시마즈 요시히로의 실제 한자 성명은 도진의홍(島津義弘)임. 따라서 요여문 또한 본래 일본 이름을 알 수 없으며, 야에몬 정도로 추정하나 이도 정확치 않음.
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갑인조(2월 17일)에 요여문이 일본군의 진법에 대해 설명한 것이 있음.
임진왜란의 일본군하면 '철포'로 이미지가 강해서 철포로 조선군들 다 때려잡은 걸로 알려졌지만.
당시 일본군의 주력은 '장창'부대와 나기나타, 활이었음. 철포는 수도 적고 환경적, 날씨 영향으로 제한적으로 운용.
일본 장창부대
요여문이 설명한 일본군의 진법
1. 깃대를 가진자가 최전방, 두번째에 철포대 세번째에 창과 나기나타, 검병이 정연하게 대열. 좌우에 기병을 교묘하게 설치
2. 싸움이 벌어지면 깃대를 진 자가 대열을 좌우로 분산, 철포대가 사격. 사격후 창검을 가진자가 돌진.
3. 깃대를 진 군사가 적의 양익을 에워쌈, 좌우의 복병과 함께 적의 후미를 포위.
4. 백병전으로 분투할때 분산하면서 또 많은 복병을 좌우에 배치. 철포와 창검으로 각각 하나의 부대를 이루어 숲속에 흩어져 매복하기를 반복
5. 도전할때는 반드시 소수의 군사로 유인하여 적이 매복한 곳에 빠지길 기다렸다가 일제히 공격.
본대가 백병전을 벌일때 저 장창으로 공격하는데, 찌르는 방식이 아니었음
일제히 긴창을 하늘로 세운다음 다 같이 내리쳐서 머리등을 두들김. 그렇게 마구 두들겨 전열을 무너뜨린다음 찌르거나 추격.
이때 장창이라 측면에 적들한테 돌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나기나타병이나 검병들이 측면을 보조하거나 추격할때 돌진.
나기나타는 일본도를 창자루에단 폴암형태의 무기라 보면 되는데, 단순히 긴 일본도를 장대에 단 형태부터, 언월도와 유사하거나 하키 형태등 다양했음.
실록에 왜인이 검으로 말과 병사를 베어냈다 라거나, 왜인이 검을 휘두를때마다 조선병의 머리 세개를 베어냈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나기나타를 나타낸것.
인터넷에 노다치 ㄷㄷㄷ 하면서 이런 기록을 찾는 경우가 있는데 나기나타임.
노다치
사실 노다치의 경우, 남북조시대 기마무사에서 보병전으로 흐름이 변하는 와중에 무기의 거대화 되면서 잠깐 등장했고
이후에는 거의 사용안함. 있더라도 소규모로 운용했음.
요여문은 일본군의 보병진법을 조선군에 가르쳤으며 큰 도움이 되었고 특히 그는 검술의 달인으로 유명했음.
그의 검술을 지켜본 조선 조정에
"보통 왜인이 아니니, 대우를 후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
그는 아동대를 만들어 검술에 소질이 있는 유망주들에게 검법을 가르쳣고, 이는 대대로 내려져왔으나
조선의 무관들이 배우기 어려운 일본검법을 꺼려하고 배우기도 쉽고 위력적인 월도로 선회하여 실전됨.
요여문이 사용한 검술의 유파를 추정하자면 카케류, 신토류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
카케류는 명나라 남부를 털던 왜구들이 익힌 검술로 명나라는 이것에 많은 피해를 입었음.
또 하나는 신토류일 가능성인데.
이 카토리 신토류는 일본 모든 검파의 시조라고 볼 수 있음.
가장 오래된 검술 유파이기도 함.
어느정도냐 하면 일본 역사서에 유일하게 검성이라고 적혀있는
2명, 츠가하라 보쿠덴, 가이이즈미 노부쓰나 모두 이 카토리 신토류의 제자로 시작하여 각자의 검술을 창안했을 정도.
이 외에 당대 유명한 검호들, 야규 신음류의 창시자 야규 세키슈사이 역시 신토류의 제자.
카토리 신토류의 창시자는 무로마치 시대
이이자사 초이사이 이에나오(飯篠長威斉家直)로 그는 매우 어린나이부터 전투에 참가하여 전투에 패한적이 없어 무려 60살까지
전투에 참가했음.
그는 풍부한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종합무술인 카토리 신토류를 창안했는데
검술뿐만 아니라 거합술, 유술, 봉술, 창술, 나기나타술의 병법, 풍수와 축성술, 수리검 기술, 첩보술 까지 그야말로 종합무술이었음.
무술의 모든 움직임은 35kg은 되는 요로이(일본 갑옷)를 걸친 상태에서 야외와 같은 평탄하지 않은 험한 지형에서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
그래서 투구와 흉갑 사이의 목 경동맥을 노리거나, 다리 안쪽의 갑옷이 가리지 못하는 부분 같은 상대 갑옷의 스키(틈)를 제치고 무기를 찌르는 식의 기법이 많음.
반면, 카부토(투구)의 장식 때문에 칼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동작이 걸리적거려서 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갑옷의 틈새를 노리기 어려운 때를 위해 힘으로 때려박는 강력한 내리베기 기술 역시 구비하고 있다. 여러모로 보아서 야전에서 싸우는 무사를 상정한 명백한 전쟁용 종합 무술.
워낙 유명한 탓에 본래 검법에 이런 영상까지 등장;
보통 카타나가 60cm 경우인데 반해, 카토리 신토류나, 거합술의 창시자들은 90cm 의 장검을 썻다하고
요여문역시 창대를 베어내고 적의 수급을 쉽게 얻어낸것으로 보아 그런 타치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음
보통 90CM 이상을 넘어가면 타치중에서 노다치로 구분하지만, 저 위의 노다치처럼 120cm의 무식한 길이가 아니라, 90cm로
그림처럼 창대를 꺽고 적의 머리를 사정없이 베어내는 길이
그의 검술과 진법 능력은 조선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굉장한 평가를 받았음.
명나라 장수들 대부분이 요여문의 기량에 대해 호평한 것이 실록 곳곳에서 보이며,
그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명나라 장수들이 모두 탄식하고, 명군 총사령관인 양호는 그자리에서 울기까지 했음.
요여문은 경주 진공 작전에 참여, 일본군의 갑옷을 입고 일본군에 잠입하여 정탐하거나, 적군이 소수로 이동할때 급습하여
수급을 베어내는등 맹활약함.
"여어.. 수고 많수다. 스컹"
1598년 1월 울산성 공략에 참전
고명한 검술과 병사 운용능력으로 백병전을 통해 거침없이 일본군을 베어내어 수급을 상당히 거두었고,
울산성 구원을 위해 접근하는 적의 구원부대 규모와 기동로를 파악하는듯 정보와 첩보전에 많은 공을 세웠음.
한음 이덕형은 선조에게 "와 왜놈이지만 이놈보소, 개쩝니다. 상좀 줘여함"
하고 높은 사대부가 이례적으로 왜인을 논공을 청할 정도의 무용을 뽐냄.
아울러 전투에 참가하여 역시 미친듯이 적을 베어내고 수급을 잔뜩 챙겨 복귀하는 와중에 명군 진지에 들름.
근데 하필 그 진지가 역대급 이뭐...병의 진지였으니..
선조가 인사한 명장수중 가장 품계가 낮은 인물인 파새란 자였는데.
당시는 와병중으로 오늘 내일 하고 있었음. 마침 병때문에 진상부릴게 필요했는지, 요여문을 보자마자 개진상을 떰.
바로 요여문이 얻은 왜군들의 목을 내놓으라고 생떼를 부림.
당시 수급의 갯수로 증거 삼아 전공을 가늠했으므로, 조선의 원균등은 관군으로 도움을 청하는 백성들을 잡아 목을 베서 왜군 잡앗다고 보고 하는 만행도 부림;
아무튼 요여문은 황당해 하면서 "이것은 내가 직접 벤 목이니 줄수 없소"
"내놔, 내놔, 내놓으라고. 그건 내꺼임, 내가 햇다고 올림거임!"
파새는 히스테리를 부리면서 요여문을 위협, 요여문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맹군인 명군이 이러자 매우 당황하면서도
무사의 공을 가로채려하니 부끄러운줄 알아라 하는 태도를 보임.
결국 파새는 요여문을 살해하라고 그야말로 미친 명령을 내리고
요여문은 당시 소규모 정예부대로 분전했으나 수를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사망함.
이 때가 울산성 전투 종결 3일전으로, 요여문은 조선과 명나라가 모두 공인할 정도로 울산 전투에서 엄청난 공을 세우고
어이없게 전투 종결을 얼마 앞두고 아군의 손에 죽음.
이 어처구니 없는 파새는 요여문을 살해하고 며칠뒤에 병사했는데, 병으로 죽기전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것으로 보임.
일본 검술 덕후였던 선조는 요여문을 매우 총애햇는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엄청나게 슬퍼했다 함.
명나라 장수들은 요여문이라 함은 병볍과 검술로 출중한 자가 아닌가 하면서
동지로서 함께 싸우며 전투에서 엄청난 무용을 뽐내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터라 매우 안타까워 했음.
특히 명나라 총사령관 경리 양호는 소식을 듣자마자 오열,
아이러니하게도 요여문의 행적과 무용은 파새가 그를 죽임으로서 기록에 남아있게 되었는데
나머지 항왜들처럼 그가 전에 세운 많은 공들이 기록된 것을 찾기 힘들기 때문.
귀순했다 해도 일본인이기 때문에 많은 전공이 후에 지워지거나 했기 때문으로
이는 이문욱의 사례로 증명되는데
항왜인 이문욱은 본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사로 그를 암살자들이 습격했을때 모두 베어내고 구해내 관백인 히데요시가
국성을 하사하여 가신이 되었음.
그는 조선에 항복한 뒤 이순신의 밑에 들어가 많은 공을 세웠고
이순신이 전투중 전사하자 이순신의 유언을 들은 뒤, 군사들을 독려하고 분투하여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마무리한 인물임.
선조 실록, 광해군 일기에 이순신을 대신하여 마무리한 인물로 이문욱이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 시대 후로 가면서 인조대에 이르면 이문욱은 삭제되고 그자리는 이순신의 조카 이완으로 교체됨.
당시에도 이문욱이 이순신이 전사하고 전투를 위임받아 지휘하자 조선 장수들이 매우 불쾌해햇다고 하는데
일본인이 그가 탐탁치 않아했음을 알수 있음.
이렇듯 항왜들은 후대에 가면 그 공이 축소되거나 아예 지워지는 경우가 많아,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대호평받은
요여문의 전투 기록은 찾아보기가 힘듬.
알려진 기록또한 명나라 장수 파새한테 살해당하면서 그 전후 공적이 알려진거라 참 아이러니 하다 할수 있음.
요여문은 당시 항왜중 조선으로 귀화한 매우 희귀한 장군급 네임드였으며
명나라와 조선에 모두 대호평받은 실록기록이 있는
검술과 병법의 달인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