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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서북쪽 금강 가에 있는 아담한 절 영은사. 봄에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가득 피어나고 가을엔 국화꽃이 만발하여 절이 온통 꽃밭이 된다. 아름다운 그곳에 바람과 함께 들어온 이름도 없고 승적도 없는 이상한 승려.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마음대로다. 아침에도 내키는 대로 일어나고 말도 없이 어디로 사라져서 하루 종일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어느 때는 가끔씩 몸이 휘청거릴 때까지 술을 마시고 와서 동료 스님들에게 술주정을 퍼붓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영은사에서 스님들이 거주하는 요사채가 온통 불길에 휩싸였다. “불이야. 불이 났다.” “도대체 어디서 불이 난 거야?” “저, 저기. 괴승의 방이 불타고 있지 않은가.” “쌍놈의 새끼. 그 죽일 놈이 불 지르고 도망하였나.” “어서들 가보세.”
스님들이 물통과 삽을 들고 우르르 혜량이 쓰는 방에 몰려들었다. “어서 문 열게나.” 문 열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얼른 열어젖히고 “촥!” “촥!” “촥!” 물을 끼얹고 보니 탁자 위 조그만 금동상 앞에 혜량이 홀로 무릎 꿇고 합장을 하고 있다. 불이 난 것이 아니고 혜량의 수행 경지가 높아 그것이 멀리서 불꽃처럼 환히 비친 것이다. “하하하!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군.” “헤헤헤! 꼴좋다.” “인과응보라. 저 괴승이 항상 말썽을 피우더니 잘 되었어.” “야. 돌중. 어서 이절에서 꺼져버려. 퇴!”
“맞아. 절이 안 맞으면 중이 떠나야 해." "그렇고말고. 요새 나라에서 일본국에 부처의 도를 편다하고 승려까지 보냈다 하는데 저 물건도 그곳으로 가버렸으면 좋겠어.” 저마다 한마디씩 무더기로 저주를 퍼붓고 돌아가는 승려들.
그는 바로 그날 그대로 웅진성을 뛰어넘어 금강 가에 나왔다. “이놈들. 어차피 잘 되었다. 나도 그만 절을 나오려던 참이었는데.” 투덜거리며 터벅터벅 길을 떠나는 혜량. 그러면서 그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하하하! 하늘이 이 혜량에게 좋은 기회를 주는구나. 성왕이 명당과 부처를 소홀히 하니 백제국은 이제 종이호랑이.”
한참을 걷다보니 수려한 바위에 멋있게 구부러진 소나무와 온갖 꽃이 만발한 청벽에 도착한다. 굽이쳐 흐르는 검은 물결을 바라보며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주문을 외우는 혜량. 지성을 드리기 위해 항상 구질구질한 승복을 모처럼 깨끗이 빨아 입은 그의 입에서 간절한 부탁의 말이 흘러나온다. “수리수리 사바. 풍운의 신께 부탁하노니 죽음의 여의주를 빌려주시오.” 잠시 후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나는 구슬이 혜량의 손에 놓였다. 신기하게도 구슬에선 진한 피비린내가 풍겨와 정신을 몽롱하게 한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연씨 가문과 상의해보자.”
다음날 아침 강을 건너 연씨의 재실에 닿은 혜량. 좌평이 밖에 나와 반갑게 맞는다. “어서 오시오. 혜량. 안으로 드시지요.” 안으로 들어온 혜량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소승. 좌평께 문안인사 드립니다.”
혜량이 형식적인 인사를 하자 좌평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사께서 무슨 용건이 있나요?”
“사람 하나 빌려주실 수 있습니까?”
“도대체 누구입니까?”
“똑똑한 소년이 필요합니다.”
“그건 왜 필요합니까?”
“이것 좀 보십시오.”
혜량은 호주머니에서 여의주를 꺼내 좌평에게 보여주며 말을 잇는다. “무릉동 동굴에 커다란 이무기가 살고 있습니다. 이 여의주를 구렁이에게 전해 준 자는 나중에 용이 된 구렁이를 꼼짝 못하게 할 것입니다. 오히려 용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요.”
그 말에 좌평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정말 신비한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상당한 지혜를 가진 아이어야 됩니다. 마침 재실 안에 그 아이가 있습니다. 이름이 연모라고 하지요.”
두 사람이 안에 들어가자 아주 잘생긴 아이가 와서 인사를 한다. 사내이지만 꽃다운 여인보다도 더 아름다운 그를 보니 재실 안에 금방 봄 동산의 꽃들이 만발한 것 같다. 소년치고는 훤칠하고도 늘씬한 몸에 귀엽고도 갸름한 얼굴, 짙고 수려한 눈썹 아래 맑고 고운 눈동자가 샛별처럼 반짝인다. 무언가 애수에 젖은 듯 보이는 눈매의 쌍꺼풀에다 보조개가 움푹 들어간 연분홍 볼은 보는 여인의 마음을 무던히도 설레게 하여 한번이라도 연모와 눈이 마주치면 최면이라도 걸린 듯 금방 빠져들었다.
나이를 떠나서 확실히 비교되는 외모에 잔뜩 주눅이 든 혜량이 겨우 용기를 내어 묻는다. “공자. 소승의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겠소?”
그 말에 연모가 태어날 때부터 보였던 그 특유의 상냥한 웃음을 매혹적으로 지으며 묻는다. “뭐지요?”
혜량이 주머니에서 신비하리만치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구슬을 하나 꺼내 놓으며 은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승과 함께 이것을 가지고 가서 공자의 손으로 무릉동 동굴 앞에 놓으면 됩니다.”
연모가 아무 생각 없이 구슬을 손에 쥔 순간 그것은 어둠속 고양이 눈동자처럼 요상하게 번뜩이면서 그에게 무섭게 달려들었다.
“으아!” 연모는 구슬을 놓치면서 두 눈을 가리고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연모! 왜 그래!” 놀란 좌평이 재빨리 다가와 연모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연모는 간신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저기 저 구슬이......”
“어디?” 좌평이 바닥에 떨어진 구슬을 살펴보았으나 다른 이상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도령이 잠시 마음이 약해졌나 봅니다. 허허허!” 혜량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구슬을 주워 다시 연모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연모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뭐 때문에 내가 이 심부름을 하여야 하나요?”
“세상의 큰일을 공자께 맡기려는 것입니다. 이 구슬을 가지고 있다가 다른 존재에게 주게 되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대가 마음대로 조종하고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존재를 통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큰일 관심 없어요. 더구나 조종하고 끌어당기고 내 취향에 전혀 맞지 않아요.”
“공자! 여기 있는 소승을 한 번 믿어보시죠.”
“믿을 수 없어요.”
민망하게 된 좌평도 연모를 설득한다. “연모. 따라가 보면 어떨까?”
“좌평어른. 죄송하지만 갈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군. 좌평어른. 소승은 이만.”
“몸조심 하시오. 대사.”
혜량이 여의주를 손에 쥐고 날아오르듯 튀어가 까마득히 동쪽으로 사라져버린다.
혜량이 멀리 사라지자 좌평은 연모를 불러 나무란다. “연모. 저 스님은 평소 우리 가문과 인연이 깊은 사람. 어찌 그렇게 박대를 하나.”
“좌평어른. 우선 백제의 처지가 편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의 형편이 어렵다?”
“네. 어른. 지금 대왕과 이 연씨 가문에서는 명당자리인 웅진을 버리고 서울을 사비로 옮기려 하시지 않습니까?”
“어린 네가 감히 어른들의 결정을 비난하다니 무엄하다.”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합니다. 이곳 웅진은 서라벌처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 적을 쉽게 막을 수 있고 그 자체가 명당입니다. 더구나 금강 건너 유구와 마곡에 예로부터 전해오는 십승지 명당의 피난처도 있지 않습니까?”
“연모. 네 생각이 일리가 있다만 사비천도는 우선 이 연씨 가문의 영광과 백제국의 안녕을 위한 것이다.”
“좌평어른. 천도하려면 차라리 신도안과 연기가 훨씬 나아보입니다. 신도안은 멀리 금강이 휘감아 흐르는 계룡산의 바깥쪽 등줄기를 업은 안쪽에 해당하는 큰 명당입니다. 연기도 백두대간의 도도한 산줄기가 주변의 산세와 합쳐 금강으로 득수를 한 아주 좋은 풍수를 지니고 있어요.”
연모의 말을 듣고 있던 좌평이 놀라 입이 벌어졌다. “연모. 어린 나이에 그 정도로 풍수를 잘 보아 기특하기는 하군. 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어.”
“좌평어른. 그 까닭을 설명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우선 신도안은 풍수는 좋으나 당장 많은 양의 물을 가져다 쓸 수가 없어 도읍하기 어렵지. 연기도 좋은 땅이긴 하나 고구려에 가까워 항상 위협을 받고 있어.”
“......”
“그건 그렇고. 우리가 과연 도읍을 옮길 운명이 되나 알아보았나?”
그러자 연모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만세력과 종이를 뒤적거린다. “예. 어르신. 제가 보니 대왕이나 좌평어른 모두 대운에 역마살이 끼어 이사를 갈 운명입니다.”
연모의 말에 좌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렇겠지. 이번 사비천도는 연씨 가문과 왕실의 의지로 하는 것이니까.”
“헌데 좌평어른의 사주를 보다보니 정말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하하! 뭐가 그렇게 이상하지?”
“저와 어른께서 다른 일시에 태어났어도 같은 날 같은 시에 세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된다면 연모 네가 불쌍해. 너무 젊은 나이에 사랑도 못해보고 죽음을 맞을 것 같으니.”
“그것이 운명이라면 저도 슬픈 일입니다.”하면서 한없이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치명적으로 아름다워 보인다. 그런 연모에게도 서라벌의 왕궁에서 애틋한 사랑이 운명처럼 다가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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