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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대국이고 신라가 소국이라고요? 이것은 서기 6세기 진흥왕의 신라 중흥 이후로 신라가 삼국의 다크호스로 등장했다는 우리의 교과서적 상식을 무너뜨립니다. 한국사 교과서에 단골로 실렸던 이 무렵의 신라 지도는 우리에게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지도만 봐서는 도대체 ‘백제가 신라보다 큰 나라’라는 말이 성립이 되느냐는 말입니다. 신라 영토는 경상남북도와 충청북도, 경기도, 강원도, 함경남도 일부에까지 뻗쳐 있고, 백제 영토는 신라의 4분의 1에서 5분의 1 크기입니다. 그런데도 삼국시대 말기 두 나라 중에서 전쟁의 주도권을 쥔 쪽은 백제였습니다. 최근에는 경남 남해에서 삼국시대 말기 백제 귀족의 무덤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7세기에는, 최소한 우리가 배웠던 저 지도보다는 백제의 판도가 훨씬 넓었던 것입니다. 멸망 당시 백제의 규모는 더욱 놀랍습니다. 무려 76만 호(戶)가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 말기 인구는 69만7000호였으니, 기록만으로 놓고 보면 백제가 고구려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였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인구밀도가 높았다, 행정착오였다, 세금 수취 방식의 차이였다, 아니면 일각의 주장처럼 ‘바다 밖에 또 다른 백제가 존재했다’… ‘신당서’ 백제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마지막에서 “백제 땅은 신라와 발해(!)가 나눠 가졌다”고 기록한 것도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지만… 일단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겠습니다.
진덕여왕의 우려 섞인 반응에 김유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의 승부는 크고 작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642년 대야성과 40개 성 함락, 645년 7개 성 함락으로 이어진 선덕여왕 말기의 심각한 군사적 위기 상황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지배층의 분열과 상대등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군사를 일으키겠다는 김유신의 진언을 진덕여왕이 허락하자, 김유신은 백제를 공격해 큰 전과를 거둡니다. 이후로 백제·신라 양쪽 기록에는 계속 신라, 특히 김유신의 군사적 승리가 많이 기록됩니다. 하지만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지적한 부분 중 “당시 김유신의 전공에 대한 기록이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는 평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기록만 보면 김유신의 연전연승으로 백제는 곧 무너져 망할 나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라가 자력으로 백제를 누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나당연합 같은 것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덕여왕의 말에서 보이듯 스스로를 ‘소국’이라 여기고 여전히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쪽은 신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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