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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는 러시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혔다. 그로즈니를 가로지르는 테렉강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지만 지난 10여년 동안 체첸의 끈질긴 독립 시도와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 간 충돌로 도시 기능은 마비됐다. 살육전(殺戮戰)도 계속됐다.
체첸족은 체첸어를 사용하며, 이슬람 수니파가 대부분이다. 1859년 러시아에 정복당했지만, 단 한 차례도 러시아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고 끈질기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민족이다. 체첸인들은 스스로를 카프카스의 20여개 민족 중 최고 용맹 집단으로 내세웠다.
1932년 체첸인들은 소련 지도자 스탈린이 강제로 언어·문화가 다른 잉구셰티아인과 체첸·잉구쉬 자치공화국으로 병합시키자, 무력으로 저항했다.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그로즈니 문턱까지 진격해 왔을 때 이들에게 협조함으로써 러시아에 재차 반기를 들었다. 이를 이유로 스탈린은 체첸인들을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시켰다. 스탈린이 죽고난 뒤 1956년 귀환이 허용되면서 체첸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체첸자치공화국으로 존재했다.
1991년 소련 해체기에 고(故) 두다예프 체첸 대통령이 체첸 독립을 선포하면서 내전이 시작됐다. 1994년 러시아가 군을 투입, 무력진압에 나선 1차 체첸전에서 두다예프를 포함, 3만명 이상이 희생됐다. 1996년 양측은 체첸이 2001년까지 독립을 유보하는 조건으로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마스하도프, 바샤예프 등 강경파들은 이에 반대하며 산악지대에서 독자세력을 형성, 대(對)러시아 투쟁을 벌였다.
언제 | 2004년 9월 1일 ~ 2004년 9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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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 북오세티야 수도 블라디캅카스 인근 베슬란학교 |
누가 | 체첸 반군 30여 명 |
무엇 | 학생과 학부모·교사 등 1,500여 명 |
어떻게 | 인질로 삼아 러시아군과 52시간 동안 대치하다 러시아 특수부대에 진압될 때까지 총 400여 명이 죽고 1,000여 명 부상 |
왜 | 체첸 분리·독립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환기, 체첸 주둔 러시아군의 빠른 철수 |
이 사건은 국제테러나 인질사건 가운데 어린이를 직접 테러 대상으로 삼은 최초·최악의 사건이자,
인질 규모면에서도 초유의 사건으로 꼽힌다. 러시아·미국 등 세계 각국에서 비난 성명이 잇따랐고,
국제연합에서도 인질사태를 비난하는 의장성명을 발표하였다.
또 우발적이고 지나친 진압으로 더 많은 인명피해를 낸 러시아 정부에 대한 비난도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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