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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lovestory_29123
    작성자 : 카론의새벽
    추천 : 3
    조회수 : 1872
    IP : 118.128.***.176
    댓글 : 1개
    등록시간 : 2010/02/17 13:12:55
    http://todayhumor.com/?lovestory_29123 모바일
    너를 사랑했어








    우리가 함께 어떤 집을 방문한 적이 있어.
    자정도 한참 지난 시간 우리는 담배연기가 자욱해 공기가 푸르게 보이던
    어떤 방에 앉아 길고 복잡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나는 너의 얼굴에 떠오른 난 여기에 없어라는 표정을 보았고
    나는 너를 사랑했어.

    우리가 같이 본 영화를 네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
    네가 얼마나 다르게 기억하는지,
    너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얼마나 다른지 낙담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했어.

    나는 네가 톨스토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윗입술을 내밀며 글을 읽는 모습을 보았고
    나는 너를 사랑했어.

    네가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너를 바라보는 얼굴이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응시하고,
    그러고는 방금 떠오른 것을 찾는 양 핸드백을 뒤지는 모습을 사랑했어.

    한 짝은 옆으로 누운 좁은 돛단배,
    한 짝은 등이 굽은 고양이처럼 서서
    몇시간이고 너를 기다리던 하이힐 안으로 네가 서둘러 발을 넣는 모습을 사랑했고
    많은 시간이 흘러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진흙이 묻은 신발을
    다시 비대칭적인 외로움 속에 남겨두기 전
    너의 엉덩이, 다리, 발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능숙한 움직임을 사랑했어.

    내가 사랑한 것은 거리가 아니라 너였어.
    다른 사람은 미로같은 계단을 돌고돌아 극장밖으로 나오는데
    너는 지름길을 찾아 먼저 인도로 나올때 입가에 어리는 미소를 사랑했어.

    자동차들이 거리를 지나는데도 한쪽 인도에서 맞은 편으로
    단걸음에 유쾌하게 건너는 너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너를 걱정했고 너를 사랑했어.

    라디오 성우 목소리로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다툼을 재현하는 너를 사랑했으며,
    내가 두 손으로 너의 머리를 감싸 안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며,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바라볼 때 나는 너를 사랑했어.

    네가 사과를 세로로 잘라 완벽한 별모양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너를 사랑했고,
    어느 오후 어떻게 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너의 머리카락 한 올을
    내 책상 위에서 보았을 때 너를 사랑했으며,
    어느 날 함께 외출했을 때 만워버스 손잡이를 나란히 잡은 우리 손이
    별로 닮지않는 것을 슬프게 바라보았을 때
    내 몸을 바라보듯 너를 사랑했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기차를 볼 때 너의 얼굴에 나타나는 미묘한 표정을,
    그 슬픈 눈길과 똑같이 닮은 것을,
    갑자기 전기가 나가 우리 집 안의 어둠과 밖의 밝음이 천천히 자리를 바꾸었을 때
    다시금 너의 미묘하고 슬픈 얼굴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은 속수무책의 질투심으로 터질 듯 아팠지만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했어.

    오르한 파묵 '검은 책




    카론의새벽의 꼬릿말입니다

    이 게시물을 추천한 분들의 목록입니다.
    [1] 2010/02/17 19:13:32  218.157.***.79  
    [2] 2010/02/27 23:33:13  222.113.***.160  튤리비
    [3] 2010/05/02 10:02:48  66.249.***.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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