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엄청난 빛과 소리가 GR을 해대고,
찰나에 갑자기 비가 와장창 쏟아지는 경험을 나는 국립현충원에서, 망월동에서,
그리고 한강변에서 해봤다.
다른 소나기의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난히 이 세 날만 기억이 나는 이유는
이 날들 또한 나만 안 무서운 날이었기 때문이다.
바다에 비가 오면 그렇게 조망이 작살이라는데, 한강도 좀 그런 면이 있다.
수면 위로 잔잔히 피어오르는 물안개 같은 것은 없지만
빗소리가 뭔가 운치있다고나 할까, 하여튼 이번에는 그 이야기를 좀 해봐야 겠다.
지금도 좀 있는데, 그 때도 한강변에는 화장실 두 개만 달랑 서 있는 시설이 많이 있었다.
장마만 지면 한강변이 침수되는 것이 일이라, 지금처럼 수위조절이 잘 되는 것도 아니라서
좋은 공원에 있는 화장실처럼 건물 구조로 만들었다가는 작살이 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떠내려가도 그렇게 큰 피해가 없을 만한, 조그만 화장실 시설물 두 개를 각기 성별 구분해서
한강변에 세워 두었다. 장마철 똥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세워둔 한강변 화장실들 중에는 심심찮게 관리가 잘 안 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냄새야 작살이고, 장소에 따라서는 범죄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고, 하여튼 좀 위험한 것들 많아서
사람들이 한강변 산책을 해도 화장실은 잘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보니 버려진 화장실도 생기고
그렇게 버려진 화장실은 딱 한 순간에 참 유용한 역할을 할 때가 있다.
바로,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데 그 휑한(그 당신에는 차양막 시설 같은 것도 잘 없었음) 한강변에
피할 곳이 마땅치 않으면 비 피하러 들어가는 용도로 말이다.
그날도 난 소나기를 피해 버려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일은 그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바로 옆 칸, 그러니까 여성용 칸에 역시 누군가가 비를 피하러 들어오는
소리가 쿵 하고 들렸다. 이왕 들어온 김에 일도 좀 해결하려 하셨는지, 부스럭거리다가 갑자기
비명이 짧게 들렸다. 그리고 뭔가 웅얼웅얼 하더니, 급히 문이 열리고 후다닥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변기 위에 고이 앉힌 끈끈이 똥이라도 발견하신 건가 싶었는데, 나야 냄새는 죽이지만
폭우 맞는 것이 더 싫어 그냥 빗소리가 줄어들 때까지 그 안에 있었다. 후덥지근한 시간이 지나고,
빗소리가 좀 줄어들었길래 맞아도 되겠다 싶어 난 유유히 화장실을 나와 가던 길을 가려고...했다.
화장실 밖 저 멀리서, 왠 검은 옷을 입은 여성 분 하나가 신문지를 뒤집어 쓰고 화장실로
돌격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노리는 것이 화장실인 줄 알고 갈 길을 가려고 했으나, 그 사람이
"저기요, 잠깐만요!"
하면서 나를 향해 손짓하길래 뒤돌아보았다.
"저기...죄송한데, 여기서 지갑 좀 찾아주실 수 있으세요?"
아하, 방금 옆 칸에 들어와서 부스럭 비명 웅얼웅얼 후다닥 하신 분이었다. 사정을 들어 보니,
비가 와서 피할 곳을 찾다가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자신도 옆 칸에 들어갔는데,
들어가는 과정에서 어쩌다가 지갑을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찾으려고 했는데,
이게 분명히 가방에 없는 것은 맞는데 화장실 바닥 어디에도 없더란다. 그러다가 우연히
벽을 봤는데,
뭔가 붉은 것이 벽에 흐르다가 말라붙은 자국이 있더란다. 천장부터 쭈욱.
섬뜩해서 이게 뭐지 하다가 갑자기 뭔가가 목을 베는 것 같은 날카로운 느낌이 들어
후다닥 뛰쳐 나왔다고 한다. 지갑은 분명히 화장실에서 떨어뜨린 것이 맞는데,
다시 들어가서 찾기는 싫고, 그런데 나는 그렇게 괴이한 화장실의 남자 칸에서 비가 그칠 때까지
스티비 원더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가 나왔으니, 뭔가 부탁할 만하다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난 또 아무 생각 없이 여자칸으로 들어갔다. (내가 원래 생각이 좀 없다)
확실히 핏자국이 있었다. 사람 목을 치면 피가 분수처럼 솟아 오른다던데, 그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거고, 그 사람이 알려준 연분홍 지갑을 찾는데, 그 칙칙한 곳에 그 색이
분명히 보여야 할 것인데 잘 안보이는건가 싶더니, 그건 페이크고 걍 바닥에 척 하니 떨어져
있더만.
그런데 좀 이상했던 것은, 그 연분홍색 지갑
'위에'
시커멓게 썩은 십 원 짜리 하나가 올라가 있었다.
지갑은 방금 떨어뜨렸고, 십 원 짜리는 분명 한 십 년은 이 화장실에서 부식된 것 같아 보이는데,
아무리 물리학의 딱지치기 법칙이 작용해도 그렇지 방금 떨어뜨린 지갑이 바닥에서 썩은 십 원 짜리를
쳐 올리는 동시에 그 밑으로 들어가 떨어지는 십 원 짜리를 받아낸다?
조금 많이 이상해서, 휴지로 그 십원 짜리를 슥 주워 주머니에 잘 싸서 넣고
나와서 그 여자분께 다시 한 번 화장실을 들여다 보라고 했다.
그 여자분은 너무 태연히 떨어져 있는 지갑을 보고 나한테 되게 미안해하며 그것을 주워 갔고,
난 그 십 원 짜리를 주머니에 넣고 볼 일을 본 후, 집에 와서 그 십 원 짜리에 뭍은 것을 알콜로
닦아내었다. 처음에는 까맣더니, 지우니까 빨개졌다. 피였다. 늘러붙어 썩어버린 피.
알콜로 닦고, 불로 소독하고, 다시 닦고, 하다보니 십 원 짜리가 반들반들 빛났다.
난 그 십 원 짜리를 왜 그랬는지 모르고 가지고 다녔고,
이 십 원 짜리는 나중에 심심찮은 활약을 해서 내가 '귀신 삐삐'라고 불렀다.
어쨌든 그 날, 버려진 화장실(살인이 일어난 것 같이 섬뜩하게 생긴)에서
지갑 위에 왠지 올라가 있던 피에 절은 십 원 짜리, 그리고 아마도 내 추측이지만
그 십 원 짜리가 뭔가 영적인 능력이 있어서 지갑을 안 보이게 한 것인가,
그리고 정말로 이후에 그 십 원 짜리가 한 일이 신기해서 아직도 기억나는 이 일은
비 오는 날 아침이면 계속 생각난다.
내가 마지막 퇴마(?)를 하고 딱 666일 만에 사라진 그 십 원 짜리와 함께.
다음 이야기는, 바로 그 내 마지막 퇴마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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